[올림픽] '달려라, 박지현' 26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농구 조별리그 A조 1차전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

▲ [올림픽] '달려라, 박지현' 26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농구 조별리그 A조 1차전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 ⓒ 연합뉴스

 
대한민국 여자농구가 올림픽에서 첫 경기부터 최대 이변을 일으킬 뻔했다. 비록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아쉽게 석패했지만, 세계무대에서 오랜만에 한국농구만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데 의미가 컸다.

전주원 감독이 이끄는 여자농구 대표팀은 26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농구 A조 첫 경기에서 스페인과 접전끝에 69-73으로 석패했다.

스페인은 국제농구연맹(FIBA) 랭킹에서 미국과 세르비아에 이어 3위의 강호다. 지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는 은메달을 차지한 바 있다. 남녀농구 모두 세계최강 미국 다음가는 강팀으로 꼽힌다. 반면 한국은 19위에 불과해 스페인과는 격차가 컸다.

한국 여자농구는 연령대별 대표팀을 포함해도 스페인을 상대로 역대 단 한 번도 이겨본 일이 없다. 대부분이 두 자릿수 이상 점수차로 4쿼터 이전에 승부가 났고, 가장 최근 대결인 지난 2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올림픽 최종예선에서는 무려 37점차(46-83)으로 대패한 바 있다.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었던 만큼 많은 이들은 승패보다 얼마나 점수차가 벌어질지에 관심이 맞춰졌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한국농구 저력 보여줘

하지만 뚜껑을 열자 '여랑이'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경기 초반 몸이 덜 풀린 상황에서 3분여 동안 무득점에 그치며 0-8까지 끌려갈 때만 해도 역시나 뻔한 승부가 될 듯했다. 하지만 6분 15초 박혜진의 득점으로 한국이 공격의 포문을 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은 박지수와 강이슬-김단비 등 여러 선수들이 고르게 득점에 가세하며 추격에 나섰고 한국은 15-16으로 점수차를 좁힌 채 1쿼터를 마쳤다.

2쿼터는 한국의 페이스였다. 박지수의 3점슛으로 첫 역전에 성공한 한국은 이후 스페인과 경기 중반까지 근소한 점수차로 접전을 벌였다. 한국이 전반을 오히려 스페인에 35-33, 2점차로 앞섰고 3쿼터에도 다시 리드를 내줬지만 53-54, 1점차에 불과했다.

4쿼터 초반, 체력이 한국의 발목을 잡았다. 발이 무거워진 한국이 1쿼터 초반처럼 3분여간 무득점에 그치는 동안 스페인이 외곽슛과 속공으로 순식간에 12점을 연속 득점하며 점수차가 벌어졌다. 하지만 한국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은 박지수와 박혜진의 득점으로 종료 17초를 남기고 다시 4점차까지 따라붙었다.

스페인의 턴오버로 한국은 마지막 추격의 기회를 잡았으나 종료 9초를 남기고 작전타임 이후 재개된 경기에서 강이슬의 슛이 빗나가며 아쉽게 대어를 놓쳤다. 강이슬은 팀내 최다득점인 26득점을 올리며 선전했고, 박지수가 17득점 10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특히 박지수가 골밑에 건재했기에 한국은 비록 높이 싸움에서 스페인에 밀리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박지수는 적극적인 림어택은 물론 수비가 몰리면 외곽으로 침착하게 패스를 내주며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냈다. 덕분에 한국은 3점슛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공격루트를 가져갈 수 있었다.

선수들은 대부분 자신보다 크고 강한 스페인 선수들과의 매치업에서 주눅들지 않는 적극성을 보여줬다. 여자농구대표팀이 이번 올림픽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여자농구는 살아있다
 
[올림픽] 스페인에 막힌 한국 26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농구 조별리그 A조 1차전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 한국 김단비가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 [올림픽] 스페인에 막힌 한국 26일 일본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농구 조별리그 A조 1차전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 한국 김단비가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여자농구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은메달을 차지하며 한때 세계무대에서도 경쟁력을 인정받았지만, 2000년대 이후 세대교체 실패와 세계농구의 상향 평준화가 맞물리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도쿄올림픽은 한국여자농구가 2008 베이징 대회 이후 무려 13년 만에 밟는 본선대회였다. 여자농구대표팀은 최종예선에서 이문규 감독이 본선행을 이끌었음에도 대회 과정과 리더십에서 많은 구설수에 휘말리며 사령탑이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여자농구대표팀의 지휘봉을 새롭게 잡게된 전주원 감독은 한국 하계올림픽 역사상 단체 구기종목 최초의 한국인 여성 감독이었다. 동계올림픽과 외국인까지 포함하면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이끈 세라 머리(캐나다)에 이어 두 번째였다. 본인이 한국여자농구의 전설이기도 한 전 감독은 여자대표팀이 마지막으로 세계무대 4강에 올랐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 4강 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주원호의 앞에 펼쳐진 현실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농구협회의 부실한 지원과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등의 악재로 인하여 대표팀은 제대로 된 평가전이나 전지훈련 한 번 치르지 못하고 올림픽에 나서야 했다. 심지어 전주원 감독은 코치 경험은 풍부하지만 감독으로서는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번 올림픽이 데뷔 무대였다.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한국 여자농구는 이번 대회 참가국 중 최약체이자 1승 제물로 거론되는 실정이었다. 메달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축구나 야구, 핸드볼, 김연경이라는 슈퍼스타의 존재로 주목받는 여자배구 등 다른 구기종목에 비하여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냉정히 말해 전패만 안 하면 다행이라는게 현실적인 기대치였다.

하지만 여자농구 개막전이었던 스페인과의 대결에서 전주원호는 당당히 아시아 농구의 경쟁력과 자존심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농구가 나아가야 할 희망을 제시했다. 다른 구기종목들과 달리 농구는 여전히 아시아와 세계무대의 격차가 뚜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남자농구는 지난 7월 조상현 감독이 이끄는 A대표팀이 최종예선에서 리투아니아-베네수엘라에 연패하며 1996년 애틀란타 대회 이후 25년 연속 본선진출에 실패했다. 이무진 감독이 이끌었던 청소년대표팀은 U-19 농구월드컵에서 참가국 16개국 중 15위에 그쳤다. 유일한 승리는 아시아팀인 일본을 상대로 최하위 결정전에서 거둔 1승이 전부였다. 현실적인 격차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발전에 대한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한국농구의 현실에 많은 농구팬들이 실망했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는 남자농구에서 아시아팀인 이란이 유럽의 강호 체코와 접전 끝에 78-84, 단 6점차로 석패한 데 이어, 여자농구에서는 한국이 우승후보 스페인을 상대로 대등한 승부를 펼치며 아시아농구의 저력을 보여줬다. 막연히 아시아농구의 경쟁력을 비하하거나 강팀들의 들러리가 될 것이라는 선입견을 보기좋게 뒤집은 결과였다.

물론 여전히 전주원호가 가야 할 길은 험난하다. 여자농구의 현실적인 목표는 1승 정도이고 양궁이나 축구같은 다른 유력한 종목들처럼 메달권의 성적을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올림픽과 스포츠 정신의 진정한 가치는 결과와 성적만이 전부가 아니다. 때로는 최선을 다한 패배가 부끄러운 승리보다 값질 수 있으며, 후회없는 도전과 과정이 주는 감동이야말로 스포츠의 진짜 매력이다.

스페인전은 한국여자농구가 여전히 살아있고 팬들의 응원과 관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여랑이의 다음 상대는 29일 열리는 캐나다전이다. 비록 메달을 따내지 못하더라도,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지 못하더라도, 지금 여자농구 대표팀은 묵묵히 그들만의 특별한 역사를 조금씩 만들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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