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에서 주인공 김대석(바우, 정일우 분)은 명나라 장수 모문룡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가 모문룡과 얽히게 된 것은 조정 실세 이이첨(이재용 분)의 음모 때문이다. 그를 없애고자 하는 이이첨은 '김대석을 없애주면 지원해주겠다'는 밀서를 자기 아들 이대엽(신현수 분)에게 건넸다. 김대석과 함께 모문룡을 방문하는 기회에 모문룡에게 은밀히 밀서를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국경 상황을 파악하고자 김대석 일행을 파견하겠다는 게 이이첨의 외형적인 명분이었다. 이로 인해 김대석 일행은 모문룡의 군영을 방문하고자 평안북도 쪽으로 북상하게 됐다. 도중에 이들은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는 명나라 병사들을 혼내줬다가 감옥에 갇히게 됐고, 이 때문에 김대석은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됐다.
 
다행히 김대석은 이대엽과 함께 탈옥한 뒤 후금(정식 국호는 대금, 청나라의 전신) 군대에 붙들렸고,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장군을 거기서 만난다. 김대석과 이대엽은 강홍립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환하게 된다.
 
"위에는 천당이 있고, 아래에는 소주·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말이 있다. 송나라 때의 범성대(范成大)가 편찬한 지방 안내서 <오군지(吳郡志)>에 나오는 이 문장은 흔히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소주·항주가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쑤저우(소주)와 더불어 항저우(항주)가 얼마나 좋은 고장인가를 표현할 때 인용되는 문장이다.
 
 MBN 드라마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MBN 드라마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 MBN

 
전형적인 무인 모문룡
 
바로 그 항저우가 모문룡(毛文龍)의 출신지다. 2005년에 <명청사 연구> 제23집에 수록된 정병철 전남대 교수의 논문 '명말 요동 연해 일대의 해상세력'은 "모문룡은 항주(杭州)인으로 요동총병 이성량 휘하에 있다가 무과에 급제하여 백호·천총·수비·유격으로 차례로 승진한 전형적인 무인"이라고 설명한다.
 
이름 속의 문(文)과 달리 무인으로 성장한 그가 한국사에 등장한 것은 요동(만주)에서 약해진 명나라가 후금에 반격을 시도하면서였다. 기존 최강국인 명나라가 신흥 강국인 후금의 급부상을 막느라 힘겨운 패권전쟁을 벌이던 이 시기에 모문룡은 뜻하지 않은 전공을 세워 본국에 승전보를 전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국운이 쇠하는 명나라에 희망을 주는 존재로 떠오르게 된다.

광해군 후반기인 1621년의 이 상황에 관해 정병철 논문은 "당시 모문룡은 200명 남짓의 수군을 거느리고 해상으로 진출하여 요동반도 연해의 저도·광록도·급점도·석성도 등의 섬을 차례로 점령하였다"고 한 뒤 "후금의 배후지이자 조선으로 통하는 요충지인 진강(鎭江)을 습격·탈환하여 명(明) 조정에 승전보를 전한 '진강의 기첩(奇捷)'으로 일약 유명해졌다"고 설명한다.
 
압록강 입구인 진강은 지금의 중국 단둥(단동)이다. 모문룡이 이곳을 점령한 사건은 뜻밖의 대첩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진강의 기첩'이란 말이 나왔다. 후금의 기세에 눌리던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단비 같은 승리였다. "모문룡의 진강 탈환은 당시 승승장구 서진(西進)하던 후금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모(毛)는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부각되었다"고 위 논문은 평가한다.
 
중국 북쪽이나 동북쪽 국가들이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난 뒤 '거의 의례적으로' 한민족을 침공한 것은 그렇게 해야만 중국 본토를 안정적으로 점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민족과 적대하는 상태에서 그대로 남진했다가는 한민족이 중국 왕조와 손잡고 자신들의 배후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그런 전략을 실행해서 한민족을 확실하게 자기편으로 만든 국가는 중국 전역을 정복하게 됐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데 그친 국가는 중국 전역이 아닌 중국 일부를 정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거란족 요나라나 여진족 금나라가 북중국 정복에 그친 것은 한민족을 확실하게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고, 몽골족 원나라와 여진족 청나라가 북중국뿐 아니라 중국 전역을 지배한 것은 한민족과 중국 왕조의 동맹 가능성을 확실히 차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모문룡이 부각된 것은 그런 정세 구조 때문이었다. 후금이 청나라(정식 국호는 대청)로 국호를 바꾼 것은 1636년이고 중국 전역을 점령한 것은 1644년이다. 모문룡이 부각된 1621년은 후금의 기운이 상승 중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명나라가 최강국일 때였다. 이런 시기에 모문룡 부대가 한반도와 만주를 잇는 단둥을 점령했으니 후금 입장에서는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광해군
 
 MBN 드라마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MBN 드라마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 MBN

 
한편, 광해군 정권은 모문룡으로 인해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장군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전쟁터로 나가 후금에 항복한 때가 1619년이다. 제3국들의 패권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광해군의 중립외교·실용외교가 가동되던 때였기 때문에, 광해군은 모문룡이라는 돌발 변수로 인해 외교적 기조가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보쌈>의 최근 방영분은 이 시기의 광해군 정권을 보여줬다.
 
모문룡은 단둥을 점령함으로써 명나라에 희망을 주었지만, 그곳을 오래 지키지는 못했다. 후금의 압박을 받고 평안북도 앞바다의 가도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그런 뒤 '요동 수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세력 확충을 시도하면서 조·명 양국으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아낸다.
 
그런데 명나라와 달리 조선은 모문룡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2010년 2월 <역사비평>에 실린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논문 '이여송과 모문룡'은 "(모문룡은) 자연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에 손을 빌릴 수 없었다"고 한 뒤 "하지만 광해군은 최소한만 수용할 뿐, 그에 대한 지원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후금과 사단이 생기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고 설명한다.
 
모문룡은 자칫하면 조선의 중립외교를 훼손하고 조선을 남의 나라 전쟁에 휘말리게 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었다. 동시에, 동맹관계인 명나라의 장수였다. 그래서 광해군 입장에서는 이러기도 힘들고 저러기도 힘든 애매한 골칫거리였다.
 
그랬기 때문에 모문룡 역시 광해군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623년 쿠데타로 광해군이 실각하자 모문룡이 인조 정권을 적극 돕는 이유가 된다.
 
인조의 쿠데타를 지지한 세력은 이 쿠데타를 반정이라 부르며 합리화했다. '부정'한 상태를 '정(正)'의 상태로 되돌린 사건이란 의미에서, 되돌릴 반(反)을 써서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은 이 쿠데타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명나라는 이를 찬탈로 규정했다. 이는 인조 정권의 국제적 위상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모문룡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조 정권이 명나라의 외교적 승인을 받는 데 협력한 것이다. "모문룡도 반정 직후 명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광해군은 배은망덕했는데 인조는 마음을 고쳐먹고 명에 일편단심을 갖고 있다'며 인조를 찬양하면서 책봉 승인을 거들었다"고 한명기 논문은 설명한다.
 
이렇게 상당부분은 모문룡 덕분에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낸 인조 정권은 그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 가도에 군량을 보내고 그곳 중국인들의 조선 본토 상륙도 허용했다. 위 논문은 "인조는 모문룡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책봉 받는 과정에서 힘써준 것을 감사했다"면서 "그의 배려를 '백세토록 감격하며 가슴에 새겨둘 은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요동 수복과 후금 격퇴를 외치는 모문룡이 명나라뿐 아니라 조선 조정의 전폭 후원까지 받는 상황은 여진족을 더욱 불안케 만들었다. 이는 후금이 1627년에 정묘호란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후금이 보기에 모문룡과 가도는 '목에 걸린 가시'였다. 요동 전체를 점령하고 서진을 꾀하려는 판에 모문룡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아야만 했다. 후금이 특히 우려했던 것은 조선이 모문룡과 합세하여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1627년 후금이 정묘호란을 일으켰던 것은 사실상 모문룡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모문룡은 여진족이 급부상하고 이 때문에 패권전쟁이 벌어지는 17세기 전반에 여진족에 대한 공포심에 편승해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상당부분은 그가 원인이 되어 조선은 정묘호란이라는 국난을 당해야 했다.

모문룡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보쌈>의 주인공처럼, 조선의 운명도 그로 인해 위태해졌다. 결국 그는 정묘호란 2년 뒤에 숙청을 당해 처형당한다. 1628년 숭정제 즉위를 계기로 그의 우군이 명나라 조정에서 퇴조한 데 따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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