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의 일생은 신의 손가락으로 쓰여진 동화다."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남긴 명언이다. 안데르센을 통하여 동화가 훌륭한 문학적 장르가 될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면, 그의 후예들은 손이 아닌 발로도 위대한 동화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덴마크 축구가 또 한번의 동화를 썼다. 덴마크 축구대표팀은 27일 오전 1시(한국시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요한 쿠르이프 아레나에서 펼쳐진 '유로2020 16강' 경기에서 웨일스를 4-0으로 대파하며 완승을 거뒀다.

3-4-2-1 포메이션으로 나선 덴마크는 초반 가레스 베일을 앞세운 웨일스의 공세에 주춤했으나, 전반 27분 담스가르드의 공간 패스를 이어받은 돌베르가 상대 페널티 박스 좌측에서 감아찬 슈팅이 그대로 골망을 가르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덴마크의 이날 첫 번째 유효슈팅이었다. 웨일스는 후반 3분 만에 웨일스 수비 니코 윌리엄스가 문전에서 걷어낸 공이 상대에게 이어지는 뼈아픈 실수를 저질렀고 돌베르가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추가골로 연결시켰다.

이후 경기흐름은 완전히 덴마크에게 넘어갔다. 웨일스가 교체 카드를 활용하여 공격을 강화했지만 덴마크의 견고한 수비를 좀처럼 뚫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후반 중반 이후부터 덴마크의 공격 빈도가 더 늘어났고 후반 43분 요아킴 멜레-추가시간에는 브레이스 웨이트의 추가골까지 터지며 점수차를 4골까지 벌렸다. 웨일스는 후반 45분 해리 윌슨이 거친 태클로 다이렉트 퇴장까지 당하며 추격의 의지를 상실했다. 이로서 덴마크는 유로2020에서 가장 먼저 8강진출을 확정한 팀이 됐다.

덴마크의 8강까지 오르는 과정은 드라마틱한 반전의 연속이었다. 덴마크는 조별리그 첫 두 경기인 핀란드전과 벨기에전에서 연패를 기록하며 뜻밖의 탈락위기에 몰렸다. 1차전에서 에이스 크리스티안 에릭센이 경기중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충격에 빠진 선수단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에릭센은 다행히 의식을 회복했지만 더 이상 대표팀과의 동행은 불가능했다. 사실상 덴마크의 조별리그 탈락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이킹 전사와 안데르센의 후예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덴마크는 마침 홈에서 치러진 마지막 3차전에서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러시아를 4-1로 대파하며 전혀 달라진 팀으로 환골탈태했다. 최종전을 앞두고 대표팀 훈련장을 방문하여 동료들을 격려한 에릭센의 응원도 팀의 사기와 동기부여를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서 B조는 3전 전승을 거둔 벨기에를 제외하고 덴마크와 핀란드-러시아가 나란히 1승 2패를 기록하게 됐다. 유로 조별 라운드의 순위 결정 방식은 승점>승자승>골득실 순이다. 세 팀의 승점이 같고 승자승까지 서로 맞물리면서 골득실로 운명을 가리게 됐고, 덴마크가 최종전 다득점에 힘입어 골득실 +2를 기록하며 핀란드(+1, 3위)와 러시아(–2, 4위)를 제치고 조 2위로 올라서며 기적적인 대역전극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바로 '코펜하겐의 기적'이다.

기세를 탄 덴마크는 16강에서는 지난 대회 8강 진출팀인 웨일스마저 완파했다. 러시아전에 이어 2경기 연속 4골을 터뜨리는 폭풍 화력을 과시했다. 덴마크의 8강진출은 유로 2004 이후 무려 17년만이다. 당시는 본선진출팀이 16개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덴마크는 사실상 우승을 차지했던 유로 1992 이후 최고의 성과라고 할만하다.

역대 유로 본선 사상 조별 라운드 첫 두 경기를 내리 연패하고도 토너먼트에 오른 팀은 지금까지 전무했다. 덴마크는 2연패를 극복하고 사상 첫 토너먼트에 오른데 이어 이제는 8강까지 오르며 그야말로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다.

알고보면 덴마크의 반전은 우연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라는 닉네임을 가진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북유럽을 대표하는 팀으로 꼽혔지만, 1980~1990년대 이후 강자들이 즐비한 유럽에서는 유로1992 우승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메이저대회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지난 4년 전 유로2016에서도 예선에서 탈락하며 본선무대조차 밟지못했다.

하지만 덴마크는 지난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한데 이어 유로2020 예선을 4승4무로 무패를 기록하며 본선진출에 성공했다.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린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어느새 10위로 올라서며 이번 대회에서 우승후보들을 위협할 강력한 다크호스중 한팀으로 꼽혔다.

덴마크의 폭발적인 다득점 행진은 그에 걸맞는 과정의 산물이다. 덴마크는 조별리그에서 이미 참가국중 가장 많은 61회의 슈팅과 22회의 유효슈팅을 기록했고 볼점유율은 57%에 이르는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했다. 약팀들을 상대한 대진운으로 폄하할수 없는 것은, 국제축구연맹 랭킹 1위 벨기에를 상대한 2차전에서도 무려 22회의 슈팅을 퍼부을만큼 화끈한 적극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특정 선수에 의존하지않는 다양한 공격루트와 끈끈한 조직력도 돋보인다. 덴마크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는 에릭센이었지만, 알고보면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하는 알짜배기 선수들이 넘쳐나는 두터운 선수층을 자랑한다. 손흥민의 토트넘 팀동료이기도 한 피에르 에밀 호이비에르는 핀란드와의 개막전에서 PK를 실축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후 3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에릭센의 공백을 잘 메웠고 팀이 상승세를 타는데 결정적인 활약으로 만회에 성공했다.

2000년생 신예 담스고르는 이번 대회에서 덴마크가 배출한 새로운 깜짝 스타다. 이번 대회들어 우승후보 벨기에와의 2차전부터 선발 출장하여 팀 패배에도 돋보이는 활약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데 이어, 러시아전에서는 20세 353일의 나이로 덴마크 축구 역사상 유로 본선에서 득점을 기록한 선수에 이름을 올리며 확고한 주전으로 도약했다.

조별리그 2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며 활약했던 주포 유수프 포울센이 부상으로 결장한 16강전에서는 카스페르 돌베르가 선발 기회를 잡자마자 멀티골을 터뜨리며 훌륭하게 빈 자리를 메웠다. 주장 시몬 키예르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에릭센의 사고 이후 정신적으로 흔들리던 팀이 붕괴되는 것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공백이 발생해도 모두가 합심하여 빈 자리를 메우는 덴마크가 얼마나 훌륭한 원 팀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제 덴마크는 체코-네덜란드 경기의 승리 팀과 8강에서 만난다. 비극이 될 뻔 했던 스토리를 기적으로 바꾸어놓은 덴마크의 반전 동화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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