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이 될 뻔했던 이야기가 '동화'로 바뀌었다. 벼랑 끝에 몰려있던 덴마크가 최종전에서 극적 반전을 이뤄내며 16강 진출의 기적을 썼다. 

덴마크는 22일(한국시간)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파르켄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0) 러시아와의 B조 최종전서 4-1로 대승을 거뒀다. 승점 3점을 기록한 덴마크는 핀란드, 러시아와 동률을 이뤘지만 골득실에서 앞서며 조 2위로 16강 진출을 확정했다.

덴마크는 이번 대회에서 여러모로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팀의 간판스타이자 손흥민의 전 동료로 한국팬들에게 친숙한 플레이메이커 크리스티안 에릭센이 지난 핀란드와 조별리그 1차전 경기 도중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장면은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생중계되면서 많은 이들이 충격에 빠졌다.

다행히 에릭센은 응급조치를 받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생명을 건졌다. 이 과정에서 침착한 대처로 에릭센을 살리고 주변 상황을 정리한 덴마크 주장 시몬 키예르의 리더십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상대팀 선수와 관중들, 수많은 축구인들과 시청자들이 한 목소리로 에릭센의 쾌유를 기원하며 응원하는 모습은 '축구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휴머니즘의 가치를 일깨워주며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덴마크가 받은 타격은 어쨌든 클 수밖에 없었다. 에이스의 갑작스러운 공백에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가까이에서 목격하고 심리적으로 흔들린 덴마크 선수들은 핀란드와의 1차전(0-1), 벨기에와의 2차전(1-2)에서 내리 패하며 벼랑 끝에 몰렸다.

러시아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2연패로 승점 1점도 얻지 못한 덴마크는 조 최하위에 그치며 각 조 3위 팀 중 상위 4팀에게 주어지는 16강 와일드카드 티켓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일각에서는 에릭센의 사고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덴마크 선수와 코칭스태프를 배려하지 않고 경기일정을 강행한 UEFA의 처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이에 UEFA가 다시 성명서를 내고 반박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에릭센은 심장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이후 러시아와의 최종전을 앞둔 대표팀 훈련장을 찾아서 동료들을 격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릭센은 생명을 건졌지만 다시 축구선수로 활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상황이다. 하지만 개인적 아픔보다도 대표팀을 먼저 생각한 그의 응원은, 바닥까지 떨어졌던 덴마크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독기를 품은 덴마크는 러시아전에서 지난 2경기와는 전혀 다른 경기력을 선보였다. 최대한 많은 득점을 놓고 승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덴마크는 안방에서 홈팬들의 일방적 응원을 등에 업고 러시아를 강하게 몰아세웠다. 전반 38분 미켈 담스고르(삼프도리아)의 중거리 선제골로 기선을 제압한 덴마크는 후반 14분 유수프 폴센(라이프치히)의 추가골이 터지며 승기를 잡았다. 후반 25분 러시아 주바에게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허용하며 추격을 당했지만, 34분 안드레아스 크리스텐센(첼시)- 37분 조아킴 멜레(아탈란타)의 연속골이 터지며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같은 조의 우승후보 벨기에가 3연승을 거둔 것도 덴마크에 큰 도움이 됐다. 이로써 덴마크-핀란드-러시아가 모두 똑같이 1승 2패를 기록한 상황. 본래 유로2020은 승점이 같을 경우 '승자승 우선' 원칙을 적용하지만 핀란드가 덴마크를 잡고 러시아가 핀란드를 잡으며 3팀간 전적이 맞물리는 상황이 되면서 골득실로 순위를 가리게 됐다.

덴마크가 러시아전의 다득점에 힘입어 5골 4실점 +1로, 핀란드(1골 3실점, -2)와 러시아(2골 7실점, -5)를 제치며 최종일에 조 2위로 16강에 올라서는 극적인 대반전이 완성됐다. 러시아는 최하위로 탈락이 확정됐고, 핀란드는 3위로 일단 다른 조의 경기결과를 마지막까지 지켜봐야하는 상황이 됐다.

덴마크는 한 번의 승리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기록을 달성했다. 덴마크가 유럽선수권 대회에서 조별리그를 통과한 것은 지난 유로2004(8강, 당시는 16개팀 출전) 이후 무려 17년만이다. 29년전 유로 1992에서는 깜짝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이후 최근 6번의 대회에서는 예선탈락 2회, 본선 조별리그 탈락 3회에 그치며 별다른 힘을 쓰지못했던 덴마크가 모처럼 자존심을 회복한 장면이다.

덴마크는 지난 2018 러시아월드컵(16강)에 이어 메이저대회 본선에서 2연속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하는데도 성공했다. 또한 메이저대회 본선에서 4골을 넣은 것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나이지리아전 4대1 승리 이후 23년만이었다. 이날 선제골을 기록한 담스고르는 20세 353일의 나이로 덴마크 역사상 유로 본선 최연소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날 승리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 덴마크의 탈락 위기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에릭센에게 덴마크 팀 동료들이 바칠 수 있었던 가장 최고의 선물이기도 했다.

한편 B조가 불러온 나비효과는 다른 조의 판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유로2020은 조 3위 중 4팀에 와일드카드가 주어진다. C조의 우크라이나는 1승 2패 승점 3점으로 조별리그를 3위로 마무리했지만 골득실 –1로 같은 승점을 기록한 핀란드(골득실 –2)보다 앞선다. 다른 조의 결과를 더 지켜봐야 하지만 B조의 순위가 뒤집어지면서 우크라이나에도 16강행의 실낱같은 희망이 살아난 셈이다. 지난 유로 2016 우승팀인 포르투갈도 조별리그에서 3위에 그쳤으나 와일드카드로 기사회생한 바 있어서, 토너먼트 판도에 얼마든지 큰 태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B조 2위로 16강에 오른 덴마크는 A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 웨일스와 만나게 되어 이제는 8강도 노려볼 만하게 됐다. 북유럽의 강호로 꼽히지만 국제무대에서 오랜 침체기를 거쳤던 덴마크 축구가 모처럼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에 걸맞은 명성을 회복하며 또 한 번의 드라마를 써내려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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