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작가 시점'은 늘 카메라 뒤에 서 있지만 방송국 구석구석을 누비는 방송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궁예부터 김두한까지, 선 굵은 연기를 주로 해온 배우 김영철이 요즘은 '동네 아재'가 됐다. 그는 산책하듯 전국 동네를 저벅저벅 걷는다. 걷다 지치면 노포에 들어가 국밥을 시켜 먹고, 내친김에 식당 주인과 사는 얘기도 나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분들을 만나면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난다"며 안경을 벗고 눈가를 꾹꾹 누른다.

그 진솔함 때문일까. KBS1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예능 각축전'인 토요일 오후 7시대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임에도 최고 시청률 9.3%를 기록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혹자는 이 프로그램이 '집밥'을 닮았다고도 말한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계속 당기는 매력을 가리킨 표현이다. 집밥처럼 푸근한 방송을 기획하고 구성한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지난 17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이하 <동네 한 바퀴>) 제작사 허브넷의 김소현 작가를 만났다.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김소현 작가 KBS 1TV 교양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의 김소현 작가가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김소현 작가 KBS 1TV 교양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의 김소현 작가가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정민

 
"우리 회사의 이미애 대표가 방송 작가 선배다. 그 선배가 어느 날 여행할 때 조그마한 가게나 작은 밥집이 매력 있지 않냐며 동네를 한 바퀴 도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 그런 얘길 하셨다. 그 말에 공감해 기획을 했다. 프로그램 제목도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하는 동요에서 착안했다. 쉽고 편안하고 만만한 이름으로 정했다. 처음부터 오래갈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자가 중요하겠더라. 그 역할을 국민배우라고 할 수 있는 김영철 선생님께 제안을 드렸다. 선생님도 다큐에 대한 갈증이 있으셨던 것 같다. 인연을 잘 만난 셈이다."

평범함 속 비범함 찾아 4박 5일 답사

처음에는 <동네 한 바퀴>가 너무 평이할 거라는 우려도 존재했다. 제작진은 "그 동네가 그 동네지. 이런 포맷이 길게 갈 수 있겠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에 대해 김 작가는 "모든 동네에 칼국숫집이 있지만 주인 한 명 한 명은 다 다른 인생을 산다, 동네가 있고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있고 동네가 있더라"며 "방송을 하면 할수록 비슷해 보여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얼마나 가겠냐는 말을 듣던 <동네 한 바퀴>는 2018년 여름, 파일럿 두 편을 내보낸 뒤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어 현재 126회를 송출했다. 세간의 우려는 회차를 거듭할수록 호평으로 바뀌었다.

<동네 한 바퀴>는 유명 관광 명소를 도장 찍듯 들르지 않는다. 익숙하고 평범한 동네를 배우 김영철과 함께 산책하듯 거닌다. 제작진은 누구나 다 아는 관광지가 아닌 동네 풍경을 담아내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지역의 동네가 섭외되면 작가들과 PD, 조연출 네 명이 4박 5일 출장 짐을 꾸린다. 좁은 골목길을 발품 팔아가며 누벼야 사소한 것들이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바쁘게 걸을 때는 눈여겨보지 못하던 것들을 (동네 한 바퀴를 통해) 발견하려 한다. 경상남도 진주의 경우 재미있는 기억이 있다. 원도심의 골목 시멘트 담벼락에 동서남북 방위표가 그려져 있더라. 그런데 동서남북이라고 쓰여있는 게 아니라 서북남동 이런 식으로 쓰여 있었다. 인생을 정방향으로만 가려하지 말고 때로는 발길 닿는 대로 가봐라, 그런 말을 방위표가 하고 있는 것 같더라. 그런 것들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동네에 고여 있는 향기나 색을 찾으면서 다니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렇게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찾으려 동분서주했던 시간들, 얼마나 많은 사람과 동네를 만나고 다녔을까. 쌓인 추억 가운데 어떤 장면이 가장 각별했는지가 궁금했다. 김 작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청파동 개미슈퍼'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울 청파동 인근의 조그마한 슈퍼인데 주인아주머니가 슈퍼 앞집에서 태어나셨다. 맨날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다니면서 슈퍼 주인 하고 싶다 생각을 했는데 결혼하고 지방에서 살다가 다시 부부가 청파동으로 돌아오게 된 거다. 그리고 정말로 집 앞 슈퍼의 주인이 됐다.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스토리 아닌가. 또 그곳에 외국인들이 많이 오고 게스트하우스가 많아지다 보니 한 달씩 장기 체류하는 여행자들이 생긴다. 그러니 주인분이 세탁 세제 같은 것들을 천 원어치씩 파신다. 손님이 컵라면 사가면 김치도 공짜로 썰어주신다. 그렇게 팔면 하루에 만 원이나 남으실까 싶다(웃음)."

속도의 시대에 역행하는 느릿한 콘텐츠
 
 서울 삼양동 사전 답사 중인 김소현 작가

서울 삼양동 사전 답사 중인 김소현 작가 ⓒ 김소현


속도의 시대, 이렇게 느릿한 콘텐츠가 큰 사랑을 받는다는 건 눈여겨 볼만한 일이다. 얼마 전에는 김 작가에게 보그 코리아 신광호 편집장이 문자를 보냈단다. 개인적으로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지만, 신 편집장은 매주 주말마다 <동네 한 바퀴>를 본다며 잘 보고 있다는 인사를 전했다. 김 작가는 "가장 화려한 세계에서 일하는 패션 매거진 편집장이 오래되고 낡고 평범한 동네 여행기를 흥미롭게 본다는 게 신기하다"며 놀라워했다.

<동네 한 바퀴>는 '안티'가 적은 프로그램으로도 유명하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말처럼, 아무리 잘 만든 방송도 안티가 없기는 힘든 일이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 김 작가가 눈을 빛냈다.

"안티가 정말 드물다. 저도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새로 나온 프로그램이라서 그런가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안티가 잘 생기지 않더라. 심지어 홈페이지 시청자 소감 란에 '단골'까지 계실 정도다. 방송 소감을 자주 올려주시다 팬 분들끼리 친해지기도 하셨다. 그분들은 게시판에 서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 그걸 보면서 우리 프로그램이 약간 동네 사랑방 같은 역할도 한다고 느꼈다. 어쩌다 예고를 조금 늦게 올리거나 하면 팬 분들이 질책을 해주시는데 거기에도 애정이 담겨있다. 제2의 제작진 같은 느낌이다. 그 정도로 안티가 많이 없다. 그게 참 감사하다."

제작진만큼 이 프로그램에 애정이 많은 또 한 사람은 진행자 김영철이다. <동네 한 바퀴>를 몇 번 본 사람이라면 배우 김영철이 생각보다 섬세하고 눈물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고여 있는 빗물 웅덩이에 발장난을 치는가 하면 10대들의 "사딸라" 대사 요청에 스스럼없이 유행어를 들려준다. 혼자 사는 할머니 댁에 가서는 찐 감자를 얻어먹고, 그 한 끼로 정이 담뿍 들어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대문 밖을 서성인다.

김영철의 벌게진 눈자위에서, 할머니가 봉지 가득 담아준 찐 감자에서, 정제되지 않은 골목의 풍경에서 시청자들은 사람 냄새를 느낀다. 김 작가는 "김영철 선생님이 우리 프로그램을 하시면서 동네 지기, 동네 아재의 사명감도 느끼시는 것 같다, 우리 프로그램을 잘 가꿔서 열심히 오래오래 해야겠다고 말씀하신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우리 동네 와달라"는 요청도 많았을 것 같다는 질문에 김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진이 장소를 섭외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프로그램 명에도 '동네'가 들어가는 만큼 처음에는 서울 중심의 도시 속 동네들로 시작했다. 그러다 전국의 동네를 다 담아야 진정한 동네 한 바퀴가 된다는 생각에 지역을 골고루 담아내려 하고 있다.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가장 중심적인 건 원도심이다. 이미 다 개발되어 아파트가 세워진 곳보다는 아날로그 감성이 조금은 남아있는, 토박이들이 있는 원도심 위주로 가고 있다. 지역으로 가면 읍내가 될 것이고.

해가 거듭되다 보니 고민이 생긴다. 언제까지나 원도심이 개발되지 않고 남아있어 주지는 않는다. 아파트가 세워지고 개발이 된다. 아파트 속에도 사람들의 삶이 있지 않나. 그런 장소를 어떻게 <동네 한 바퀴>스럽게 담을 수 있을까를 고심한다. 개발되어 변해가는 도시도 분명 지금의 동네고 현실이니까. 예를 들어 서울 창동 같은 곳 가면 정말 다 아파트이지만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서 마스크를 같이 만들고, 폐 식용유 모아서 비누를 같이 만드는 이웃이 있다. 음식 하나 하면 같이 문 열고 부쳐 먹고 나눠 먹는다. 그런 장소를 저희가 구석구석 찾아내고 만나고 소개하는 게 숙제다."


"사람 냄새 나지 않을 것 같은 동네가 더 흥미롭다"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김소현 작가 KBS 1TV 교양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의 김소현 작가가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 김소현 작가 KBS 1TV 교양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의 김소현 작가가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정민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 작가는 앞으로 가고 싶은 동네를 묻자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서울 한복판, 그것도 금융과 방송, 국회와 아파트가 밀집한 여의도에서 촬영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얼핏 봐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을 것 같은 동네가 더 흥미롭다. 원도심이나 예스러운 동네는 당연히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의도처럼 '여긴 진짜 힘들겠다' 싶은 장소가 더 도전 정신을 자극한다. 여의도 아파트 아래 지하상가 가보면 떡 방앗간부터 구둣방까지 정말 다양한 상점이 있다. 또 아파트 사이사이에 조그마한 과일상, 노점상, 뻥튀기 장수 분들도 터주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계신다. 그래서 증권가와 방송가, 아파트 빌딩 사이에 숨어있던 오래된 여의도를 다뤄보고 싶다."

김 작가는 1993년에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다. <VJ특공대>, <힐링다큐 나무야 나무야>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그는 지금까지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른 6개월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방송을 만들어왔다. 29년 차 방송작가인 그에게 <동네 한 바퀴>는 어떤 의미를 갖는 프로그램일까.

"내 성향이 하나를 하면 오래 하는 편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하나의 일을 수십 년 할 수 있다. 잘 옮기지 않는다. <동네 한 바퀴>에는 그런 분들이 많다. 한 자리에서 20년, 30년 일하신 분들은 기본이고 국수 하나만 뽑으며 50년을 살아오신 분도 있다. 100회 특집에는 1968년에 기상관측요원으로 기상관측소에 들어가서 평생을 보낸 분도 만났다. 그분께 선생님의 인생을 날씨로 본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답하셨다. 쾌청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날이 대체로 맑음이었다고. 그 말을 듣는데 울컥할 만큼 감동이었다. 인생에 대한 감사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오늘 좋은 일이 있다고 마냥 좋을 것도 아니고 오늘 인생의 위기가 오고 흐린 날이라고 해서 그게 인생까지 흐리게 하는 건 아니다. 작가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교훈을 얻었다."

김 작가는 전국 각지의 동네에 답사를 나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듣는 말이 있다고 전했다. 입으로는 "뭘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느냐"고 말하면서도 동네 분들이 그렇게 반색을 하신단다.

"아버지 어머니 또래 분들이 '나는 그냥 애 키우고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뭘 볼 게 있다고' 다들 이러신다. 그분들 인생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지 잘 닦아서 보여드리고 싶다. 모든 동네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작은 선물 같은 프로그램으로 오래갔으면 좋겠다. 동네에 온기가 있고 동네부터 건강해야 거기에 사는 우리도 힘내서 일하고 살아가지 않겠나."
전지적작가시점 방송작가 동네한바퀴 김영철
댓글1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