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의 '레전드'다. 박 감독은 지난 2017년 10월 베트남 축구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이래 눈부신 역사를 만들어왔다.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을 시작으로 같은 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강 진출, 아세안 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우승, 2019년 아시안컵 8강진출 2019 동남아시아(SEA) 게임 우승 등의 업적을 세웠다. 연이은 호성적에 항상 100위권 밖이었던 베트남의 국제축구연맹(FIFA)랭킹은 6월 기준 92위로 뛰어올랐다.

여기에 베트남은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앞두고 있다. 베트남은 현재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G조에서 5승 2무, 승점 17점으로 조 1위에 올라있다. 오는 16일 아랍에미리트(UAE)와 G조 최종전을 치르는 베트남은 비기기만 해도 조 1위로 최종 예선에 진출할 수 있다. 설사 패하더라도 승점이 높아 8개 조 2위 중 5개 팀까지 주어지는 와일드카드가 가능하다. 비록 박 감독은 지난 경기에서 받은 경고 누적으로 아랍에미리트전에는 벤치에 앉지 못하게 됐지만 베트남의 상승세에는 큰 지장이 없을 전망이다.

아시아에서도 축구변방으로 꼽히던 베트남이 월드컵 최종 예선이 진출한다면 자국 역사상 최초가 된다. 이미 지금까지 업적만으로도 베트남 역대 최고의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는 박항서 감독의 전설이 또 하나 추가되는 셈이다.

그런데 축제 분위기 속에 돌연 박 감독의 거취 문제가 튀어나오며 뜻하지 않은 논란에 휩싸였다. 박 감독은 지난 12일 말레이시아전이 끝난 뒤 공식기자회견에서 "최종예선 진출에 성공한다면 내가 베트남에서 해야 할 일은 거기까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듣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 박 감독의 발언은 급기야 '사퇴설'로 번지며 큰 파장을 불러왔다. 2차 예선을 끝으로 박 감독이 베트남 사령탑에서 물러날 거라는 추측에서부터 박 감독의 계약기간, 연봉협상 문제 등 그동안 베트남축구협회-언론과 빚었던 미묘한 갈등이 다시 소환되기도 했다.

다행히 박항서 감독 측이 해명에 나서면서 사퇴설은 해프닝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박항서 감독의 대리인 DJ매니지먼트 측에 따르면 박 감독의 발언은 "베트남 대표팀이 현재까지 거둔 성적에 대한 긍정적인 자평의 의미"였다는 것.

박항서 감독의 애매한 계약기간도 오해를 부추겼다. 박 감독은 베트남축구협회와 2019년 11월 3년 연장 계약을 맺었다. 박 감독은 내년 1월이면 베트남과 계약기간이 만료된다. 만일 베트남이 최종예선에 진출한다면 박 감독은 월드컵 예선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계약이 만료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공교롭게도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전세계의 A매치 일정이 잇달아 연기되며 월드컵 예선일정도 1년 가까이 미뤄진 것이 박 감독의 계약기간과 맞물렸다. 또한 통상적으로 다른 축구협회 등이 메이저대회 일정을 기준으로 대표팀 감독의 계약기간을 산정하는 것을 비교하여, 베트남이 그동안 한번도 최종예선에 진출한 경험이 없다는 것도 베트남 축구협회가 박 감독과의 계약기간을 정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계약조건상 유사시 1년 연장 옵션도 포함되어 있어서 양측 모두 재계약 논의가 당장 급할 것은 없다. DJ 매니지먼트는 신뢰를 중시하는 박 감독이 여전히 베트남 축구협회와 계약기간은 꼭 이행해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항서 감독의 사퇴 해프닝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두 가지다. 첫째는 지나친 유명세에 따른 부작용이다. 박 감독의 인터뷰 내용 일부만 발췌되어 유튜브 영상에 나오면서 전체 인터뷰 맥락과 다르게 전달되었고, 다시 이를 여러 언론과 누리꾼들이 팩트 체크없이 확대 재생산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당사자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초래할수 있다는 점이다. 경각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박 감독의 거취에 대한 팬들의 뜨거운 관심은, 과연 베트남의 아름다운 동행이 언제까지 아름답게 계속될 수 있을까에 대한 현실적인 우려도 포함되어 있다. 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출전하는 대회마다 눈부신 성적을 거두며 기대치가 높아졌다. 대리인인 DJ매니지먼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부 언론에서 아직 2차 예선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최종 예선 및 월드컵 본선 진출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하며 "박 감독의 발언은 섣부른 기대감에 대해 경계의 의미"라고도 덧붙이기도 했다.

한국축구가 히딩크 감독 시절 '4강신화'를 한번 이뤄낸 이후 대표팀이나 감독들이 한동안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지나치게 높아진 팬들의 눈높이에 곤욕을 치러야 했던 상황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베트남이 설사 최종 예선에 진출하더라도 '언더독'의 입장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한국, 일본 등 아시아의 내로라하는 강호들을 제치고 본선 티켓까지 따낼 확률은 현실적으로 높지 않다. 

박항서 감독 스스로도 앞으로 베트남에서 더 이뤄낼 수 있을 만한 도전 목표가 무엇이 남았을지 고민이 될 법하다. 출전한 대부분의 대회에서 역대 최고성적을 경신했고 더 올라갈 곳이라면 이제 새로운 우승 트로피나 월드컵 본선 진출 정도다.

올라가는 것도 어렵지만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요아힘 뢰브 독일대표팀 감독이나, 비센테 델 보스케 전 스페인대표팀 감독의 사례는 월드컵 우승을 비롯하여 자국 축구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세운 명장이었지만, 정점에서 '박수칠 때 떠날' 시기를 놓쳐 몰락의 순간까지 경험하는 흑역사를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 감독이 베트남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겠지만,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는 말처럼 모든 인연에는 시작과 끝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박 감독도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베트남축구협회와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내년 1월, 혹은 월드컵 최종예선의 성과에 따라 향후 거취를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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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감독 베트남축구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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