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나 바둑 등 게임에 관심 없지만 게이머들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콘텐츠는 흥미롭다. 게다 그 게이머가 게임의 전유자들로 여겨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 그것도 소녀이고 보면, 상당이 흥미진진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즈 갬빗>을 이른다.
 
AI가 체스와 바둑에서 인간을 좌절시킨 지 오래다. 2016년 알파고와 세기의 대결을 벌인 이세돌은 3년 뒤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이세돌은 한 토크쇼에 나와 알파고와의 대결이 은퇴를 결심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게임에서 인류를 압도하는 이 시기에, 1960년 대 체스 플레이어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가 인기를 끈 것은 아이러니하다. 어쨌거나 내 흥미는 이 드라마가 남자들의 주 무대인 체스 판에서 한 소녀의 성장담을 어떻게 균형감 있게 펼칠 것일까였는데, 결론적으로 말해 이 소녀의 성장담은 성공적이다. 이 성공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물론, 여타의 성장담이 그렇듯이 주인공의 굴기하는 도전에 힘입고 있지만, 마지막 화가 또렷이 각인시킨 건 오히려, 성공의 밑돌을 단단히 괴고 있던 것이 주인공이 백인이라는 인종적 우위에 있음을 뒤늦게 자각시킨 데 있다.
 
이 드라마의 미덕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즈 갬빗> 관련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즈 갬빗>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대부분의 성장 서사가 그렇듯, <퀸즈 갬빗>의 주인공 베스 하먼(애니아 테일러 조이) 역시 불운한 개인사를 가지고 있다. 베스의 엄마는 뛰어난 수학자로 설정되지만, 어쩐 일인지 극단적 결정을 내리고 딸인 베스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싱글 맘에게서 자라던 베스가 어느 날 갑자기 고아가 되어 보육원에 보내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보육원은 원생 여아들을 순응적 소녀로 길들이기 위해 매일 안정제를 투약하는 무시무시한 곳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베스에게 체스 인생을 열어준 통로이기도 하다.
 
보육원 관리자 윌리엄 샤이벨(빌 켐프)은 자신이 머무는 지하 공간만큼이나 어둑한 인물이다. 말도 표정 변화도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짐작하기 어려운 샤이벨은 인생의 대부분을 체스 판 앞에서 보내는 중이다. 무료했을 터, 9살 여자아이라도 체스 상대로는 나쁘지 않을 테니, 체스를 가르쳐달라고 당돌히 나선 베스를 받아들인다. 매우 짧은 시간에 청출어람 한 베스의 천재성을 간파한 샤이벨은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름 없는 후원자가 되어 베스의 성공과 좌절을 힘께 한다.

누구에게나 못 이룬 꿈은 있는 법이다. 미진한 꿈에 집착하고 애달파하는 대신, 그는 이를 대리할 소녀를 응원하기로 한다. 한 번도 호들갑스런 지지를 표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라고, 여자라고 경시하지 않고 베스의 재능을 사랑하고 존경한 샤이벨의 깊은 마음은 쉬이 흉내 낼 수 없는 웅숭깊음을 가지고 있다.
 
체스에 입문하고 삶의 활기를 찾은 베스는 머릿속으로 체스를 둘 때 안정제가 효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점점 안정제에 중독되어가던 어느 날, 베스는 휘틀리 부부에게 영혼 없는 입양을 당한다. 호감과 책임 없는 입양이란 불행을 예고하기 마련이지만, 이 또한 역설적이게도 베스에게 다른 출구를 열어준다.
 
스텝 맘 애마 휘틀리(마리언 헬러)는 '키친 드링커'다. 아이를 잃은 후 다시 아이가 생기지 않자 실의에 빠졌을 테고, 냉담해진 남편 대신 불행을 달래준 건 술이었을 것이다. 잃은 아이의 대체물로서 베스를 낙점한 방식은 비윤리적이고 실의에 빠진 아내를 방치하는 남편 또한 비인간적이다. 애정의 유효기간이 지난 부부에게 입양 아이가 생긴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여기까지라면 애마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남편에게 버려진 후 다른 선택을 한다.
 
외로움에 지쳐 홀로 피아노를 치는 애마의 모습엔 짙은 고독이 비어져 나온다. 그 고독의 깊이를 동질의 쓸쓸함에 처해본 베스는 대번에 알아본다. 데면데면하던 베스와 애마가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아픔을 토닥이게 되고 연대적 관계로 나아가는 지점이 이 드라마의 백미다. 남편에게 버려졌어도 베스에게 "엄마가 되는 법은 배울 수 있겠다"며 좌절을 돌파하려는 낯선 모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도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남편이 별거를 선언하고 일체의 경제적 지원을 끊자, 가난한 모녀에게 호구지책이 급선무다. 입양한 딸이 체스 천재라는 것과 "체스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애마는 놀랍고도 반갑다. 그는 궁색한 경제 상황을 포장하지 않고 체스 상금의 일정 부분을 자신의 몫으로 떼어 달라고 베스에게 요청한다. 애마의 재기가 반가운 베스는 모녀다움이라는 진부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비즈니스 파트너로 애마를 적극 수용하고는 오히려 그에게 그가 제안한 것보다 후한 커미션을 약속한다. 입양한 딸에게 먹고사는 일을 책임지게 한 스텝 맘의 미안함과 비굴함을 가장된 위로로 얼버무리는 대신, 공생의 파트너로 승격시킴으로써 자존심을 지켜준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모녀로 살아가는 법이다. 애마와 베스의 공생법은 한 집에 살고 가족이 되는 것이 반드시 헌신과 희생으로만 가능하다고 믿는 가족주의에 유의미한 한 방을 날리고 있다.
 
이 드라마에 점수를 좀 더 얹어줄 수 있는 부분은 체스 게이머로 등장하는 남자 조연들의 면면이다. "여자 애가 다 그렇지" 하며 얕보던 마음은 베스와의 대국에서 그의 가공할 실력에 가루가 되도록 빻이지만, 이들이 패배를 받아들이는 면모는 '이런 남자들이 있다고?' 싶을 만큼 대견하다. 베스에게 졌지만 더 좋은 게이머가 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는 해리 벨틱(해리 멜링)은 성숙한 인격자다. 베스에게 끌리지만 관계를 성적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은 남녀 관계에 존중이 얼마나 유효한지를 알려 준다.

미국 체스 1위인 베니 와츠(토머스 브로디생스터)는 첫 승부에서 베스와 무승부가 되지만, 이미 베스의 천재성을 간파한다. 베스에게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고 고무시키고 적극적으로 돕는 태도는, 미 챔피언십에서 베스가 놀라운 실력으로 승리했어도 "어느 여자 선수보다 잘했다"고 망발하는 남성들의 맨박스를 걷어찬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말고도 베스에게 패배했지만 그의 불세출의 실력을 추종하는 몇 남자 동료들은 성원을 아끼지 않고 세계 챔피언십을 열렬히 응원한다. 다만 이런 의문이 남는다. 이런 '신사다움'이 진짜 있었다고? 혹은 있었다면, 이 '찐 남자다움'은 모두 어디다 갔다 팔아먹었단 말인가. 이들의 우정이 아름답지만, 판타지로 느껴지는 괴리는 어쩔 수 없다.
 
체스 세계에 흑인 여성은 없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즈 갬빗> 관련 이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퀸즈 갬빗>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베스가 9살부터 입양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보육원엔 욕쟁이 원생 졸린(모시스 잉그램)이 있다. 베스와 졸린은 나이가 꽤 되도록 입양되지 않은 처지였다. 그러다 베스가 떠나고 졸린만 남게 되었을 때, 졸린의 그 쓸쓸한 표정은 잊을 수 없지만, 졸린은 그렇게 지워졌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졸린이 마지막 화에 '나 잊은 거 아니지?'하며 뒤통수를 치며 등장한다. 게다 어딜 봐도 궁기라고는 없는 힙한 모습을 하고는 베스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준다. 왜일까?
 
때는 1968년으로 백인이 흑인을 대놓고 차별하던 악명 높은 '짐크로우법'이 사라진 때이긴 하다. 그러나 사회적 분위기는 언제나 법과 등치하지 않는다. 드라마의 배경인 1968년에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백인 범죄 집단 'KKK'가 활개 치며 흑인을 테러하던 세상이었다.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사회 분위기에, 고아 흑인 소녀 졸린이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힘입어 대학을 졸업해 백인이 다니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상당한 돈을 저축해 로스쿨에 진학하는 꿈을 키우고 있다. 또한 베스도 없는 차를 굴리고 게가 백인 애인이 있다고 떠벌리는 졸린이 베스와 격렬히 백인 스포츠인 스쿼시를 친다. 글쎄...
 
이런 설정은 영화 <히든 피겨즈>에서 흑인 여성 천재들이 흑인이라 겪은 수모나, 영화 <그린북>에서 주인공이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임에도 흑인이기에 겪어야 했던 1960년대의 혐오와 차별이 극소수 흑인의 경험이거나, 동시대에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실제로 두 영화가 실제 인물들을 바탕으로 했는데도 말이다. '짐크로우법'이 1965년에 폐지되었다가 아니라 1965년까지 존속되었다고 본다면, 그리고 지금도 여전한 'KKK' 테러의 망령이 'Black Lives Matter'의 도화선을 긋고 있다면, 졸린이 백인 친구를 "흰둥이"라 부르며 "네가 이룬 걸 이루고 싶다"고 제시를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할당받는다 해서, 흑인의 피해와 고통을 판타지에 가까운 성공으로 초경량화한다고 해서, 졸린이 제시처럼 든든한 지원자 없이 홀로 분투하며 느껴온 고독을, "우린 고아가 아니었어. 서로가 있었으니까"라며 제시의 등을 토닥인다 해서, 이를 즉시 평등한 흑백 여성 연대로 나아가는 단초라고 믿게 하는 것은 염치없는 연출이 아닐까.
 
물론 졸린의 성공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며 흑인이라고 반드시 불행하란 법은 없으니, 이런 설정이 무조건 비판 받아 마땅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재차 언급하건대, 1960년대는 '소수인종 우대정책'이 사회 문화 저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던 때가 아니고(지금도 수용되지 못한 채 백인들의 역차별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근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의 흑인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와 배제는 그들을 힘겨운 삶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인종적 맥락을 사소히 한 채, 뜬금없이 졸린을 마지막 화에 혜성처럼 등장시켜 베스의 방황을 마무리시키고 마침내 체스 대가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수호천사로 변신시키는 것이 과연 어떤 효과를 위한 장치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졸린의 등장은 드라마 내내 그들이 펼친 다이내믹한 세상에 단 한 명의 흑인도 없었음을 죽비처럼 일깨우며, 졸린의 피부색이 베스가 속한 체스의 세계와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가를 선명히 드러냈다. 졸린이 베스를 아무리 '흰둥이'라 부른들, 세상 누가 베스를 '흰둥이 체스 그랜드 마스터'라 칭하겠는가. 베스의 하얀 피부는 체스 그랜드 마스터의 선결 조건이었음을 우리는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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