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가요계 주 고객의 연령은 대폭 낮아졌다. 이는 곧 '주류가요'였던 트로트의 침체를 의미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주현미와 현철, 김정수, 김수희 등이 번갈아 가며 가요대상 트로피를 차지하던 시대를 지나 트로트는 송대관과 태진아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근근이 명맥을 이어갔다. 이 같은 현상은 90년대 후반 아이돌 위주로 가요시장이 또 한 번 재편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트로트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던 2004년, 걸출한 트로트 가수 한 명이 등장했다. 1999년 강변가요제 대상 출신으로 뒤늦게 트로트 가수로 변신해 데뷔한 <어머나>의 장윤정이었다. 그리고 장윤정이라는 대형가수의 등장은 트로트의 건재를 알리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다시 십수 년의 시간이 흘러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을 통해 트로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90년대 한국의 트로트와 비슷한 취급을 받은 것이 홍콩의 누아르 영화였다.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으로 대표되던 홍콩 누아르 영화는 90년대 홍콩 영화의 침체와 오우삼, 서극 등 거장들의 할리우드 진출이 맞물리면서 급격히 몰락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월드컵으로 떠들썩하던 2002년, 홍콩에서는 누아르의 부활을 알린 영화가 개봉해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훗날 한국영화 <신세계>에도 모티브를 줬던 양조위, 유덕화 주연의 <무간도>다.
 
 <무간도>는 홍콩 금상장 영화제 7관왕과 대만 금마장 영화제 6관왕을 휩쓸었다.

<무간도>는 홍콩 금상장 영화제 7관왕과 대만 금마장 영화제 6관왕을 휩쓸었다. ⓒ 디스테이션

 
3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휩쓸어

80년대 누아르의 대표 얼굴 주윤발과 이수현, 가수와 배우를 오가던 장국영과 알란탐, '4대천왕'으로 불리던 유덕화, 장학우, 곽부성, 여명, 그리고 희극지왕 주성치와 '액션의 신' 성룡, 이연걸까지 화려한 홍콩 남자배우들의 라인업에서 왕조위는 어느 계보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위치의 배우였다. <아비정전>부터 왕가위 감독과 호흡을 맞춘 양조위가 국내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작품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었다.

<중경삼림>에서 페이(왕정문 분)의 짝사랑을 받는 경찰663을 연기하며 여성관객들을 설레게 한 양조위는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등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며 홍콩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잡았다. 2002년 장예모 감독의 <영웅 : 천하의 시작>을 통해 이연걸, 견자단 같은 전문 무술배우들과 연기한 양조위는 같은 해 <무간도>에서 <열혈남아>, <지존무상>, <천장지구> 등 누아르에 익숙한 배우 유덕화를 만났다.

<무간도>에서 범죄조직 삼합회의 스파이가 된 진영인을 연기한 양조위는 특유의 고독한 매력을 뽐내며 열연했다. <무간도>는 '홍콩 누아르의 화려한 부활'이라는 극찬을 들으며 크게 성공했고 양조위는 홍콩 금상장 영화제를 비롯한 3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무간도>의 판권을 구입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2006년 <디파티드>라는 제목으로 <무간도>를 리메이크해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2003년 <무간도3-종극무간>에 출연한 양조위는 2004년 '왕가위 감독의 <2046>, 2007년 이안 감독의 <색,계>, 2008년과 2009년에는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 시리즈에 출연해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다. 2013년에는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에서 영춘권의 달인이자 송혜교의 남편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90년대 중반 <중경삼림>의 인기와 함께 양조위의 인지도가 한층 올라가 90년대 중·후반 홍콩을 대표하는 배우로 군림하기도 했다.

양조위는 왕가위, 이안, 장예모, 오우삼 같은 중화권의 거장들이 믿고 캐스팅하는 배우다. 이는 그만큼 양조위가 출중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는 증거다. 어느 계보에 넣기도 애매한 이름이 아니라 어떤 계보에도 묶을 수 없는 독보적인 홍콩의 '영제(영화황제)' 양조위는 오는 9월 개봉예정인 마블 히어로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샹치의 아버지 만다린을 연기할 예정이다.

엇갈린 운명, 같은 덫에 빠진 경찰과 깡패
 
 양조위(오른쪽)와 유덕화의 불꽃튀는 연기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간도>는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다.

양조위(오른쪽)와 유덕화의 불꽃튀는 연기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간도>는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다. ⓒ 디스테이션

 
과거의 홍콩 누아르 영화는 사나이들의 우정과 배신,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낭만과 의리 속에 특유의 미장센을 통해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하지만 까다로워지는 관객들과 점점 자극적인 영화들을 만든 제작사들의 무리수로 인해 누아르는 그저 총소리만 들리고 선혈이 낭자한 삼류 액션 영화로 전락했다. <무간도>는 과거 관객들이 열광하던 홍콩 누아르 영화의 순수한 재미를 다시 찾았다는 점에서 더욱 반갑고 가치 있는 작품이다.

사실 <무간도>에서는 오우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홍콩 누아르 특유의 우아한 총격전은 없다. 두 주인공의 의리로 정의를 구현하는 내용도 아니다. <무간도>는 화려한 볼거리 대신 인물의 심리변화에 주목한다. 홍콩 최고의 연기력을 가진 양조위와 누아르에 특화된 유덕화의 연기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진행방식이었다. 실제로 두 주인공은 영화 속에서 서로를 신뢰하거나 의리를 지키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삶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영화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하는 진영인(양조위 분)과 유건명(유덕화 분)은 딱 한 번, 삼합회 조직 두목 한침(증지위 분)을 검거하려 할 때 힘을 합친다. 모스부호를 통해 경찰에게 신호를 주던 진영인의 방식을 알아챈 유건명은 같은 방식으로 진영인과 통화를 하고 두 사람은 모스부호를 통해 한침의 거래 현장을 급습한다. 그리고 경찰이 된 유건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10년 넘게 모셔온 보스 한침을 살해한다.

진영인과 유건명의 옥상 장면은 두 배우의 카리스마가 충돌하며 영화의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뜬금없이 등장한 경찰에 의해 진영인은 이마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과거와 현재, 흑백과 컬러가 오가는 교차편집과 쓰러진 진영인의 다리에 걸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무간도> 최고의 명장면이다. 그리고 유건명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사이 상황을 정리하고 경찰 신분으로 당당하게 문을 나선다.

<무간도>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공동감독 유위강과 맥조휘는 <무간도>를 3부작으로 완성시켰다. <무간도>의 프리퀄격인 <무간도2 : 혼돈의 시대>는 양조위와 유덕화의 청년시절을 연기했던 여문락과 진관희가 주인공으로 나섰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황국장 역의 황추생과 한침 역의 증지위였다. 양조위, 유덕화에 여명까지 합류한 <무간도3 : 종극무간>은 1편과 개연성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관객들에게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파견 나간 부하직원 생일 챙겨주는 국장님
 
 황추생(왼쪽)은 <무간도>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선역과 악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황추생(왼쪽)은 <무간도>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선역과 악역을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 디스테이션

 
<무간도>와 여러 가지 면에서 설정이 비슷해 표절 논란이 오가기도 했던 <신세계>에서 이자성(이정재 분)을 폭력조직에 투입시킨 강과장(최민식 분)은 냉정한 경찰간부다. 이자성 역시 강과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거나 따르지 않는다. <무간도>의 진영인과 황지성 국장(황추생 분)도 비슷한 상황이다. 하지만 10년째 진영인을 삼합회의 스파이로 보낸 냉철한 황국장은 진영인의 생일 선물을 챙길 정도로 인간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특히 황국장이 옥상에서 택시로 떨어져 살해당하는 장면은 <무간도> 중반부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삼합회 일당들의 추격을 느낀 황국장은 진영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먼저 내려 보내고 자신은 삼합회 조직원들에게 고문을 당하다 살해당한다. 하지만 황국장은 끝까지 진영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황국장이 택시 위로 떨어졌을 때 진영인이 세상을 잃은 듯한 슬픈 표정을 지은 것은 자신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영인은 극중에서 정신병을 앓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때문에 정기적으로 정신과 상담 치료를 받는다. 멜로 요소가 거의 없는 <무간도>에서 진영인과 상담 치료 선생님 이심아 박사는 그나마 작은 멜로 감정을 느끼는데 진영인은 이심아 박사에게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경찰임을 고백했다. 이심아 박사를 연기한 배우 진혜림은 영화 <친니친니>의 삽입곡 < A Lover's Concertro >를 불러 90년대 후반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다.

<무간도>에서 유덕화의 청년시절을 연기한 진관희는 2006년 아시아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로 선정됐을 정도로 중화권에서 잘나가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하지만 2008년 여배우들과 찍은 부적절한 사진이 대량 유출되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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