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축구팬들의 여러 논쟁거리 중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는 난제는 바로 '손차박 대전'이다. 저 멀리 독일에서 한국 축구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차붐' 차범근과 세계 최고의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무려 8년 간 활약했던 '해버지' 박지성, 그리고 현재진행형 레전드로 차붐의 기록들을 하나씩 지우고 있는 '손세이셔널' 손흥민까지. 이들 중에서 한국 축구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했던 선수를 고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1994년 수비수로 K리그 베스트11, 1998년 공격형 미드필더로 K리그 득점왕과 비스트11, 2002년 공격수로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됐던 '유비' 고 유상철이 있기 때문이다. 유상철은 최종 수비수부터 최전방 공격수까지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던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였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축구를 이끌었 양대산맥은 '황새' 황선홍과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지만 유상철 역시 이들과 함께 한국축구의 황금기를 빛냈던 주역이다. 병을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했기에 유상철의 죽음을 대하는 축구팬들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생전에 A매치에서 통산 124경기에 출전해 18골을 기록한 유상철은 한국 축구에서 의미 있는 순간마다 결정적인 골을 터트리며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다.

유상철이란 이름 석 자를 알린 한일전 동점골

지금이야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축구 종목에 만23세 이하의 젊은 선수들이 출전하는 게 당연해 졌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안게임 축구는 A대표팀의 정예멤버가 출전했다. 특히 한국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조병득, 박경훈, 조광래, 이태호, 박창선, 조민국, 김주성, 최순호, 변병주, 허정무 등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했던 핵심 선수들이 대거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은 1994년 미국 월드컵이 끝난 후에 열린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월드컵 멤버들을 대거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 중에는 미국 월드컵 멤버에 포함되지 못했던 울산 현대의 대형신인 유상철도 있었다. 한국은 8강전에서 홈팀인 '숙적' 일본을 만났다. 일본은 '도하의 기적' 희생양이 되면서 미국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했지만 미우라 카즈요시와 이하라 미사미 등을 중심으로 역대 최강의 '황금세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축구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이 경기의 영웅은 단연 한국이 자랑하는 스트라이커 '황새' 황선홍이었다. 황선홍은 일본과의 8강전에서 후반 헤더 역전골과 종료 직전 페널티킥으로 결승골을 터트리며 한국의 영웅이 됐다(하지만 한국은 4강전에서 거짓말처럼 우즈베키스탄에게 0-1로 패하며 노메달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유상철은 황선홍이 영웅이 될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확실하게 해냈다.

전반 30분 미우라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한국은 만회골을 넣기 위해 파상공세를 펼쳤고 후반 6분 고정운의 크로스와 황선홍의 힐패스를 받은 유상철이 발등으로 감각적인 슛을 날리며 동점골을 기록했다. 유상철이라는 이름을 축구팬들에게 알리는 첫 번째 계기가 됐고 이후 유상철은 2005년 독일월드컵 최종예선 후 대표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한국축구의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했다.

한국축구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유비의 투혼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한국축구의 영웅' 차범근 감독이 이끌던 한국 축구 대표팀은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왼발의 달인' 하석주가 그림 같은 프리킥 골로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선제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하석주는 첫 골을 넣은 지 3분 만에 백태클로 인해 퇴장을 당했고 수적 열세에 빠진 한국은 후반에만 내리 세 골을 허용, 1-3으로 허무하게 역전패를 당하며 첫 승의 꿈이 또 한 번 좌절됐다.

두 번째 상대는 우승후보로 불리던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였다. 한국은 훗날 '명예 한국인'이 되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에게 경기 내내 끌려 다니다가 0-5라는 큰 스코어 차이로 패했다. 이 경기에서 눈에 띄는 한국 선수는 네덜란드의 슈팅을 막기 위해 90분 내내 몸을 날린 김병지 골키퍼와 후반 교체 투입돼 과감한 중거리슛을 때린 이동국 밖에 없었을 정도로 네덜란드와 한국의 전력 차이는 컸다.

현역 시절 월드클래스로 인정 받았던 차범근 감독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대한축구협회는 조별리그 2경기에서 1골8실점으로 2패를 기록한 차범근 감독을 대회도중 경질해 버렸고 한국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벨기에전을 김평석 수석코치 체제로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당시 만26세에 불과했던 유상철은 선발명단에서 제외된 최영일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출전했다.

한국은 전반 7분 만에 루크 닐리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힘들게 경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투혼을 발휘하며 그라운드를 누볐고 유상철은 후반25분 세트피스 상황에서 하석주의 크로스를 받아 미끄러지면서 오른발 슛을 날려 벨기에의 골문을 갈랐다. 내심 한국을 완파하고 16강 티켓을 따내려 했던 벨기에를 집으로 보내며 한국축구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던 유상철의 멋진 골이었다.

한국의 월드컵 첫 승을 만든 통쾌한 중거리슛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7일 별세했다. 향년 50세. 사진은 2002년 6월 4일 저녁 부산에서 열린 한일월드컵 D조 한국의 첫 경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두번째 골을 넣은 유상철(왼쪽)이 설기현과 환호하는 모습.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7일 별세했다. 향년 50세. 사진은 2002년 6월 4일 저녁 부산에서 열린 한일월드컵 D조 한국의 첫 경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두번째 골을 넣은 유상철(왼쪽)이 설기현과 환호하는 모습. ⓒ 연합뉴스

 
90년대까지 국내 대부분의 축구인들은 "한국은 체력과 정신력은 좋지만 기술이 별로"라고 한국축구의 특징을 스스로 정의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2001년 한국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한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의 기술은 뛰어나지만 체력과 정신력이 수준 이하"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은 기존의 대표팀 터줏대감들 대신 박지성, 김남일, 송종국, 설기현 등 체력이 좋은 젊은 선수들을 대거 중용했다.

그렇게 대표팀이 세대교체되는 와중에도 꾸준히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던 선수가 바로 유상철이었다. 유상철은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로 실제 히딩크호에서도 수비형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 후방 수비수를 넘나들며 히딩크 감독이 최적의 포메이션을 찾을 수 있게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진공청소기' 김남일이 수비형 미드필더에 자리하면서 유상철은 조금은 공격지향적인 중앙미드필더에 배치됐다.

유상철은 2002년 6월 4일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출전해 노련하게 경기를 조율했다. 그리고 한국이 1-0으로 앞선 후반 7분, 기습적으로 공격에 가담한 유상철은 통쾌한 중거리슛으로 추가골을 기록했다. 당시 리버풀FC에서 활약하던 폴란드의 골키퍼 예지 두덱의 손에 맞고 골문으로 빨려 들어갈 만큼 강한 슈팅이었다. 한국은 이날 건국대 선후배 황선홍, 유상철이 한 골씩 기록하며 월드컵 첫 승의 감격을 누렸다.

당시 영국의 축구 평론가 앤드류 워쇼는 유럽축구연맹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유상철은 이번 월드컵에 참가한 최고의 미드필더다. 세계 축구팬들은 그의 등번호(6)를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극찬했다. 2002년 월드컵 올스타에 선정된 유상철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와일드카드로 출전해 한국의 8강 진출을 이끌었지만 2005년에 당한 무릎 부상 후유증 때문에 독일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하고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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