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영웅의 영정 7일 오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의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

▲ 월드컵 영웅의 영정 7일 오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의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한국축구의 전설 유상철이 우리 곁을 떠났다. 췌장암으로 투병해오던 유 전 감독은 지난 7일 오후 7시 서울아산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향년 50세, 대한축구협회는 공식 홈페이지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당신과 함께한 그날의 함성과 영광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과 사진으로 하늘의 별이 된 한국축구의 영웅을 추모했다. 국내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영웅과의 때이른 작별을 안타까워하며 애도와 추모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를 졸업하고 1994년 울산 현대에 입단하면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유상철은 이후 일본의 요코하마와 가시와 레이솔 등에서 활약했고, 2006년 친정팀 울산 현대에서 프로 생활을 마감했다. K리그에서 9시즌 동안 142경기 37득점 9도움을 기록했다. 국가대표팀(1994-2005)에서는 A매치 124경기에 출전하여 센츄리클럽에 가입했으며 18골을 기록했고, 월드컵에도 2회(1998, 2002) 출전했다.

선수로서의 유상철은 '한국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라는 평가로 요약된다. 그는 미드필더를 비롯해 수비수, 공격수까지 말 그대로 골키퍼 빼고 필드 플레이어로서의 모든 포지션을 자유자재로 소화한 선수였다. 보통 선수가 한 포지션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여 여러 포지션을 전전하게 된다는 선입견과 달리, 유상철은 어느 자리에 놓든 동시대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칠만큼 너무 특출나서 한 포지션에만 묶어두기 아까운 선수에 가까웠다.

그는 K리그 역사에서 김주성과 함께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 모두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뽑힌 인물이기도 하다. 프로 입문 초창기에는 윙백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대표팀에 데뷔할 때는 스위퍼로 발탁됐다. 1998년에는 울산에서 스트라이커/공격형 미드필더를 넘나드는 프리롤에 가까운 역할로 득점왕까지 차지한 바 있다. 소속팀과 대표팀을 가리지 않고 팀 사정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물론 한 경기에서도 수시로 여러 포지션을 넘나들기도 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이 정도 수준의 멀티플레이어는 전무후무할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또다른 멀티플레이어의 대명사로 꼽히는 박지성도 미드필더 전 포지션과 측면 수비수까지 소화한 적은 있지만 신체적 조건의 한계로 최전방 공격수나 센터백은 맡지 않았다. 그에 비하여 유상철은 유럽과 남미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당당한 체격조건과 뛰어난 축구지능을 바탕으로 어떤 포지션에서도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다. 그야말로 '한국의 루드 굴리트'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유상철 본인이 생전에 가장 선호하고 최고의 활약을 보여줬다고 평가하는 자리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실제로 그가 개인성적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울산과 J리그 요코하마 시절은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장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스리백 전술 하에서 유상철을 윙백에 뒀을 때 공수겸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며, 그 자리를 그의 최적의 포지션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유상철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윙백으로 발탁되었고 조별리그 최종전인 벨기에전에서 동점골까지 넣었다. 많은 이들이 그가 어떤 자리든 한 포지션에 정착했다면 박지성-차범근 못지않은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할만큼 다재다능함 때문에 손해를 본 측면도 있다.

그에 대해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투지였다. 경기장 밖에서는 온화한 성격과 말투로 친숙했지만 경기장 안에서는 그야말로 물러설 줄 모르는 원조 파이터였다. 히딩크호 시절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전에서 전반전에 코뼈가 부러졌는데도 풀타임을 소화하고 경기 종료직전 헤더로 결승골까지 넣어 2-1 승리를 이끌었던 순간은 유상철 축구인생의 대표적인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그 유명한 히딩크 감독의 '어퍼컷 세리머니'의 탄생도 바로 이 장면에서 유래했다. 히딩크 감독은 훗날 자서전과 인터뷰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유상철을 두고 '자신의 말을 안 들었던 선수'라고 회상하며 코뼈가 부러진 유상철을 하프타임 때 교체하려고 했는데 본인이 계속 뛰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막을 수 없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히기도 했다.
 
 지난 10월 27일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작전 지시하는 유상철 감독.

2019년 10월 27일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작전 지시하는 유상철 감독의 모습 ⓒ 연합뉴스

 
이처럼 흠 잡을 데 없어보이는 유상철이지만 정작 현역 시절에 대중들의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다. 1990년대에 활약했던 국가대표 축구스타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유상철도 일부 팬들의 지나친 비난과 폄하에 시달려야했다. 그의 약점이자 시대의 한계이기도 하던 기술 부족과 부정확한 슈팅으로 인하여 '홈런왕'이라는 굴욕적인 별칭을 얻기도 했으나, 단지 여러 포지션을 넘나든다는 이유로 '축알못'들에게 '색깔이 없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훗날 재평가받은 부분이지만 유상철의 진정한 가치는 개인기보다는 전술적인 면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직접 공을 가지고 주도하기 보다는, 위치선정-공간활용-몸싸움-연계플레이 등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이 훨씬 뛰어난 선수였다. 공을 다루는 플레이 위주로만 축구를 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뭘 잘하는지 선뜻 눈에 띄지 않지만 감독이나 동료 선수들 입장에서는 누구보다 중요한 선수였다. 최고의 선수들만 모이는 국가대표팀에서도 유상철은 은퇴할 때까지 어떤 감독을 만나더라도 부동의 핵심선수로 중용됐다는 사실이 그의 대체불가한 가치를 증명한다.

이러한 유상철의 전술적 진가가 마침내 빛을 발한 무대가 바로 '2002 한일월드컵'이다. 그는 한국이 치른 7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출장하여 4강 신화에 기여하며 대회 베스트11에까지 선정됐다. 3-4-3 포메이션을 구사했던 히딩크호에서 유상철은 김남일과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중원의 '더블 볼란치'를 형성하며 강력한 수비축구의 한축을 담당했다.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는 황선홍의 선제골로 1-0으로 앞서가던 후반 그림같은 중거리 슈팅으로 추가골을 작렬하며 한국의 월드컵 본선 역사상 첫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유상철의 진가가 빛난 역대 최고 경기는 바로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었다. 그는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장했지만 한국이 이탈리아에 0-1로 끌려가자 히딩크 감독이 후반 공격 강화를 위하여 수비수들을 잇달아 교체하고 공격수들을 투입하면서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센터백까지 내려갔다. 유상철이나 박지성같이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한국은 추가 실점을 하지 않았고 설기현의 동점골과 안정환의 골든골에 힘입어 연장접전 끝에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유상철이 없었다면 이탈리아전의 파격적인 승부수는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히딩크 감독이 왜 부임 당시부터 꾸준히 멀티플레이어의 가치를 강조했는지 확인한 명장면이기도 했다.

훌륭한 축구인생을 보낸 유상철이지만 본인도 인정했듯이 좀 더 젊은 나이에 큰 무대로 진출하여 선수로서 더 대성할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신화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할 무렵 그는 이미 30대를 넘긴 나이였고, 유럽명문 바르셀로나와의 이적설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결국 후배들처럼 유럽진출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후 2006 독일월드컵 출전도 기대됐으나 본선을 불과 3개월 앞두고 부상 악화로 돌연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유상철은 은퇴한 이후 2009년 춘천기계공고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에 입문하여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했다. 이때 KBS 유소년 축구 육성 프로젝트인 <날아라 슛돌이>의 감독을 맡아 훗날 한국축구의 유망주로 성장하게될 이강인을 지도하며 그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기도 했다.

유상철은 프로무대에서는 대전 시티즌-전남 드래곤즈 등의 감독을 역임했으나 저조한 성적과 구단의 지원 부족으로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울산대학교 감독 시절에는 준우승만 4번 달성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9년 5월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욘 안데르센 전 감독의 후임으로 인천 유나이티드의 9대 감독에 선임되며 소방수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러나 유상철 감독은 인천 사령탑으로 부임한 지 약 5개월 만에 돌연 췌장임 투병소식이 알려지며 축구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건강에 대한 우려속에서도 팀에 대한 책임감으로 시즌이 끝날 때까지 감독직을 완주했고 당시 강등위기에 빠져있던 인천을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인천에서의 2019년은 유상철이 축구인으로서 남긴 마지막 업적이자 그의 지도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됐다.

경남 FC와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0-0 무승부로 인천의 극적인 1부 리그 잔류를 확정한 순간, 인천 선수단은 유상철 감독을 얼싸안고 헹가래를 치며 기쁨을 나눴다. 인천 서포터스는 유 감독의 쾌유를 기원하며 '마지막 약속도 꼭 지켜 줘'라는 걸개를 내걸었다. 지켜보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장면이었다.

유 감독은 시즌이 끝난 후 인천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명예 감독으로 남으며 투병에 전념해왔다. 회복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그는 힘겨운 항암치료를 견디면서도 건강이 많이 호전된 모습을 보였고 방송과 유투브 등에 출연하여 축구인-팬들과의 소통을 이어가기도 했다. 지난 시즌 인천이 또 다시 강등위기에 놓이자 감독직 복귀에 의지를 보이는 등 인천과 축구에 대한 변함 없는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 감독의 투병 소식이 알려진 이후 많은 이들이 보여준 반응은 축구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 유상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국내의 수많은 축구 팬들과 축구계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유 감독이 J리그 시절에 활약했던 요코하마 팬들까지 '할 수 있다. 상철이형'이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일관계가 경색되어 민감해있던 시점, 그것도 팀을 떠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선수의 투병소식에 일본 팬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매너는 축구에는 국경도 편견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며 깊은 감동을 남겼다. 또한 유상철이 걸어온 삶과 축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단지 성공(Success)을 넘어서 존중(Respcet)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장면이었다.

안타깝게도 유상철은 건강하게 팬들에게 돌아오겠다는 마지막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신은 조금 일찍 유상철을 천국으로 데려갔다. 지난 2019년 작고한 핌 베어벡 전 한국대표팀 감독에 이어 또 한 명의 2002 영웅이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됐다.

이별을 받아들여야하는 순간은 언제나 힘들다. 하지만 육신은 떠났을지라도, 전설은 사리지지 않는다. 유상철이 평생 축구에 바친 아름다운 열정, 투지, 노력은 이제 영원한 역사가 되어 팬들의 가슴 속에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우리가 유상철의 이름과 추억을 가슴속에 간직하는 한 그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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