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스팸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스팸 전화가 처음 도입(?)된 시기엔 전화로 인터넷 가입이나 휴대폰 교체, 대출을 권유하는 사례 등이 가장 많았다. 물론 스팸 전화로 인해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겼다는 사실이나 내 번호가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계약을 따내려 노력하는 마케터들의 정성에는 묘한 연민이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런 '생계형' 스팸 전화는 그나마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다짜고짜 돈을 요구하는 '보이스 피싱'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검찰이나 경찰, 금융기관 등을 사칭해 그럴싸한 이유로 거액의 송금을 요구한다. 상황을 급박하게 몰아가 상대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보이스 피싱을 소재로 한 모 개그코너처럼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단순한 스팸이나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전화에서 나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들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뿐 아니라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나를 지켜 보고 있고 내 작은 행동 하나하나를 파악하고 있으며 심지어 나를 총으로 위협까지 하고 있다면 이는 더 이상 '장난'이 아니다. 고 조엘 슈마허 감독이 연출한 <폰 부스>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받은 한 통의 전화를 통해 인생의 위기를 겪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폰부스>는 1300만 달러의 제작비로 1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올린 가성비가 높은 영화다.

<폰부스>는 1300만 달러의 제작비로 1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올린 가성비가 높은 영화다. ⓒ 20세기폭스코리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기복의 아이콘(?)' 조엘 슈마허

나이를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경력이 많은 고령의 감독들에게 의례적으로 '거장'이라는 호칭을 붙여주는 경우가 많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영화를 만든 공로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시장이 넓고 그만큼 많은 영화인들을 거느린 할리우드에서는 거장이란 호칭을 쉽게 주지 않는다. 작년 6월 만8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엘 슈마허 감독 역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음에도 특유의 기복 때문에 생전에 좀처럼 거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슈마허 감독은 디자인 전공자이자 미술감독 출신답게 비주얼을 중요시하면서도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평균 이상으로 만들어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들을 보면 흡혈귀 호러 영화 <로스트 보이>를 비롯해 멜로드라마 <사랑을 위하여>, 로맨틱코미디 <밀애>, 법정 드라마 <의뢰인>과 <타임 투 킬>, 뮤지컬 영화 <오페라의 유령> 등 특정 색깔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1995년과 1997년에는 팀 버튼 감독이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했던 배트맨 시리즈를 이어받아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을 연출했다. 결과적으로 두 편의 배트맨 시리즈는 슈마허 감독에게 '기복 심한 감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배트맨 포에버>는 시리즈 자체의 명성 덕분에 흥행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배트맨과 로빈>은 '배트맨 시리즈 최악의 망작'이라 불리며 흥행에서도 크게 실패했다. 

이렇게 기복 심한 감독으로 낙인 찍힌 슈마허 감독도 2002년 13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든 심리 스릴러 <폰 부스>에서는 긴장감 넘치는 연출을 통해 호평을 받았다. <폰부스>는 흥행에서도 북미 4600만 달러, 세계적으로 9700만 달러의 성적을 기록하며 투자대비 높은 효과를 누렸다. 국내에서는 2003년 6월에 개봉해 전국 17만 관객을 모으며 큰 재미를 보진 못했다(당시 비슷한 취향의 관객들은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에 몰렸다). 

슈마허 감독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오페라의 유령>과 짐 캐리의 스릴러 도전으로 화제가 된 <넘버23>이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하면서 흥행 감독으로서의 명성에 금이 갔다. 슈마허 감독은 2009년 마이클 패스밴더와 헨리 카빌이 출연한 <타운크릭>, 프랑스와의 합작영화 <트웰브>, 니콜라스 케이지와 니콜 키드먼 주연의 <트레스패스>등을 연출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고 작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전화 한 번 받았다가 인생을 통째로 복습한 스투
 
 <폰부스>를 사실상 홀로 이끌었던 콜린 패럴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폰부스>를 사실상 홀로 이끌었던 콜린 패럴은 현재까지도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20세기폭스코리아

 
<폰부스>의 시나리오는 할리우드에서 배우, 작가, 감독으로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래리 코헨이 썼다. 코헨은 젊은 시절 고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과 친분이 있었는데 히치콕 감독은 1970년대 어느 날 코헨에게 "공중전화 박스 같은 작은 공간에서만 영화를 찍을 순 없을까"는 질문을 던졌다. 코헨은 <폰부스>를 통해 히치콕의 물음에 30년 만에 대답을 보낸 셈이다(2010년에는 전화 박스보다 더 좁은 관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베리드>도 나왔다).

잘 나가는 미디어 에이전트 스투 세퍼드(콜린 파렐 분)는 평범하고 활기찬 일상을 보내던 중 공중전화에서 의문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처음엔 시답잖은 장난전화라고 생각했지만 정체불명의 남자는 어디선가 스투를 지켜 보고 있었고 "또 한 번 전화를 끊으면 네 목숨도 끊어진다"며 스투를 협박했다. 실제로 전화박스를 전세 내던 스투에게 거친 행동을 보이던 매춘부 포주가 그 남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스투는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게 된다.

매춘부 포주의 죽음으로 스투가 있는 전화박스 부근은 살해현장이 되고 경찰까지 출동했다. 설상가상으로 뉴스를 보고 스투를 걱정한 아내 켈리(라다 미첼 분)와 각 방송국의 취재진까지 현장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여전히 멀리서 스투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는 스투에게 양심선언을 하라고 강요한다. 목숨을 담보로 인질극을 벌이면서 원하는 게 돈도 자유도 아닌 양심선언이라니. 스투에게는 가장 황당한 협박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스튜는 현장에 모인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허세를 위해 비싼 옷을 입고 다녔다는 점,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에게 열정페이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킨 점, 아내에게 잘못한 점 등을 고백했다. 이 장면에서 당시 크게 유명하지 않았던 콜린 퍼렐의 열연이 돋보인다. 결국 저격수는 스투에게 고무탄환을 쏜 후 구급차에 누워 있는 그에게 "앞으론 착하게 살아. 그렇지 않으면 내 전화를 받게 될 거야"는 말을 남기고 현장을 빠져 나간다.

<폰부스>는 좁은 공간과 적은 인원과 제작비로도 얼마든지 영화적 긴장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수작이다. 다만 주인공과 범인의 인과관계가 모호해 결말이 다소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 <폰부스>의 아쉬움이다. 범인은 스투에게 그저 '착하게 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주변인물까지 철저히 뒷조사를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범인은 평소 할 일이 없어 한 가지 일에 심하게 집착하는 '편집증 환자'일 확률이 매우 높다.

범인의 목소리 연기를 멋지게 해낸 키퍼 서덜랜드
 
 '수리 어머니' 케이티 홈즈는 <폰부스>에서 콜린 패럴의 불륜녀 역으로 짧게 출연한다.

'수리 어머니' 케이티 홈즈는 <폰부스>에서 콜린 패럴의 불륜녀 역으로 짧게 출연한다. ⓒ 20세기폭스코리아

 
<폰부스>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13년에 개봉해 550만 관객을 모았던 한국영화 <더 테러 : 라이브> 역시 주인공 하정우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전화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다룬 영화다. <더 테러 : 라이브>에서도 범인의 목소리 연기를 했던 배우 김대명이 목소리만으로 관객들과 하정우에게 상당한 공포감을 줬다. 당시 이름조차 낯설었던 배우 김대명은 훗날 <미생>과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더 테러 : 라이브>가 낯선 목소리가 주는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 알려지지 않은 배우를 범인목소리로 캐스팅했다면 <폰부스>에서는 주인공을 연기한 콜린 파렐보다 더 유명한 배우가 범인 목소리를 연기했다. 바로 도널드 서덜랜드의 아들이자 드라마 <24>의 상징 같은 배우 키퍼 서덜랜드다. 키퍼 서덜랜드가 <폰부스>에서 얼굴이 등장하는 시간은 1분 여에 불과하지만 그는 영화 내내 진중하면서도 위압적인 목소리로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키퍼 서덜랜드는 <라스트 보이>, <유혹의 선>, <타임 투 킬> 등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맡으면서 조엘 슈마허 감독과는 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슈마허 감독의 2010년작 <트웰브>에서도 조연으로 얼굴을 비춘 바 있다. 하지만 키퍼 서덜랜드의 대표작은 역시 드라마 <24> 시리즈로 서덜랜드는 2001년부터 2014년까지 9번의 시즌에 빠짐없이 출연했기. 2009년에는 에미상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폰부스>에는 떠오르는 신예였던 콜린 파렐과 경찰 역의 포레스트 휘테커 외에도 영화 팬들에게 낯 익은 얼굴이 한 명 등장한다. 바로 톰 크루즈의 전 아내이자 수리 크루즈의 엄마 케이티 홈즈다. 홈즈는 <폰부스>에서 스투가 유혹하려고 했던 상대 팸 역으로 짧게 출연했다. 홈즈는 2005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에서 여주인공 레이첼 도스를 연기했지만 <다크나이트>에서는 매기 질렌할로 교체됐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폰 부스 조엘 슈마허 감독 콜린 파렐 키퍼 서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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