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과 하얀 방-공작원들의 고백' 편의 한 장면.

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과 하얀 방-공작원들의 고백' 편의 한 장면. ⓒ MBC

 
어느 날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감사실로 오란 연락이었다. 불려간 곳은 평범한 회의실이었다. 하얀색 벽이 인상적이었다. 놀랍게도 문고리 같은 걸 잡아당기니 벽이 열리고, 작은 하얀 방이 또 있었다.

너무 비좁아 들어가기도 힘든 방엔 초등학생들이 쓰는 책상 2개와 의자가 하나 있었다. 겨우 비집고 들어가 앉으니 하얀 벽만 보였다. 그 방으로 3일을 출퇴근했다. 일종의 고문이었다. 단순한 회사 내 괴롭힘일 수 없었다. 그 회사가 바로 국정원이었기 때문이다. 전 국정원 해외공작관인 제보자가 기억하는 '하얀방 고문'의 실체는 이랬다.

"(방안에) 그림이 진짜 이상했어요. 왜냐하면 동양화 수묵화였는데 액자가 서양화 액자인 거예요. 그림도 굉장히 황당한 게 강가에 작은 나룻배 하나가 떠 있어요. 나머지는 여백하고 잔물결이 이는 건데, 하얀 벽을 계속 보고 있으면서 시간 감각, 공간 감각이 없어져요. 그러니까 내가 어디 있는지 잘 몰라요.

근데 유일하게 하얀 벽을 안 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옆에 있는 하얀 수묵화를 보는 것인데 계속 보고 있으면 흔들려요. 배가 강물에서 진짜로 흔들흔들 움직이는 것처럼 잔물결이 이는 게 느껴지면서 몸이 둥둥 떠서 흔들리는 느낌까지 드는 거예요. 지금도 그거는 생각만 해도 그거는 막 공포예요, 저는." (전 국정원 해외공작관 A씨)


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 하얀 방과 고문 - 공작관들의 고백' 편의 제보자는 일본에서 일 잘하던 해외정보관이었다. 일본 지역 영사관이나 대사관 직원, 그러니까 외무 공무원 신분으로 국정원 임무를 같이 수행하던 그는 왜 미국 CIA에서나 활용하는 신종 고문이라는 '백색고문'을 국정원으로부터 받게 됐을까. 이게 다 MB 정부 국정원의 '댓글 공작'에 이은 대선 개입 공작(부정 선거 의혹)에 공개 반발한 대가였다.

25년차 베테랑을 괴롭힌 백색고문

"이런 이야기를 공적으로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떨리고 두렵죠. 저도 떨리고 두렵고. 그런 조직을 나중에 누군가가 되돌아봤을 때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냐고 물었을 때 저는 한 줄 남기고 싶었어요. '저항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치개입에 반대하다가 고난의 길을 겪는 분도 있었고 저처럼 역사적인 죄가 될 수 있는 사항에 반대하고 저항한 사람이 있었다는 한 줄." (전 국정원 해외공작관 A씨)

카메라 앞에 선 A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입술이 떨렸다. 그럴 만 했다. 조직의 공작에 반발한 대가는 혹독했다. 온갖 미행과 사찰은 기본이었다. 가족들까지 시달려야 했다. 의문의 차량이 교통사고를 냈고, 거주 아파트 내에서 대낮에 A씨를 향해 돌진하는 차량도 있었으며, 집안에 침입하려던 국정원 직원을 막으려다 아내가 다치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들어 '자살당했다'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줄줄이 의문의 죽음을 맞았던 국정원 직원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시작은 '하얀방 고문'이었다고 했다. 사흘 간 오래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감사를 받았다. 감사의 근거는 더 황당했다.
 
 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과 하얀 방-공작원들의 고백' 편의 한 장면.

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과 하얀 방-공작원들의 고백' 편의 한 장면. ⓒ MBC

 
공작 대상(협조망)에게 사준 커피 값이 문제라고 했다. 3만원(3천 엔) 넘게 지출한 게 문제라고 했다. 물품 등을 사취한 게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국정원에 25년 간 근무한 A씨가 받을 만한 추궁이라고 보기엔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3일간 갇혀있었더니 익숙하던 회사 내 공간 자체가 헷갈릴 정도였다. 그 '하얀방 고문' 이후 훗날 해리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 지난 2015년 10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A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너무 몸이 안 좋아지고 심장이 뛰고 그래서 눈을 감았어요. 그랬더니 눈을 뜨고 똑바로 보라고. 자세를 똑바로 하지 않으면 감사를 거부한 것으로 처리하겠다고... 그때부터 호소를 했죠. 지금 내가 상태가 너무 안 좋다. 좀 쉬게 하든가 화장실을 보내달라 했더니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내가 두려운 것이 이대로 계속 가면 내 의지가 사라져서 (그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거예요. 잊혀지지 않는 게 '3시간 버틴 사람 없어' 그 얘기는 기억해요."

국정원이 간첩도 아닌 25년 차 베테랑 직원을 고문한 이유는, 일종의 괘씸죄였다. '박근혜 정권' 이병기 국정원장 앞에서 구두보고를 하며 국정원 공작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공작이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것이었길래 국정원은 사람을 이렇게 고문하고 회사에서 쫓아(직권 면직 처분)냈을까.

'댓글 공작'을 넘어서

2012년 18대 대선에서 국정원이 벌인 '부정 선거' 공작은 댓글 공작만이 아니었다. 당시 '원세훈 국정원'이 주목한 것은 해외동포들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재외국민투표였다. 2009년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서 정치적 성향이 가늠이 안 되는 200~300만 표가 새로 생겨난 것이다.

정권 재창출이 목표였던 이명박 정권과 원세훈 국정원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재외 동포들이 종북 좌파 후보에게 투표하면 국정원이 사라진다!' 원세훈 원장의 지시가 떨어졌고, 공작이 시작됐다. A씨의 설명이다.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신원조사 과정을 거쳐야 돼요. 그런데 그 신원조사 과정이 보안업무 규정에 따라서 국가정보원이 관여할 수 있게 돼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신원조사 과정을 통해서 여권을 취득하기 곤란하게 하면 선거권을 가진 재외국민임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는 거죠."

국정원 입장에서 60만 동포가 살고 투표소가 가까운 일본은 특히 관심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강제징용과 제주4.3,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본으로 건너간 동포의 숫자가 많았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 이래 일본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온 것 또한 과거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안기부)였다. 이래저래 걱정이던 국정원은 이들 일본 동포들이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공작'에 들어갔다. 영사관의 여권 발급 업무까지 관여했다.

"소위 말해서 모든 게 좌파 척결 국정원의 업무는 좌파 척결이에요. 북한 관련 업무가 아니고 북한도 좌파, 야당도 좌파, 국정원에 있는 호남 출신 직원들도 좌파, 저희들도 해외에 나가서 하는 것이 좌파 척결이 주 임무였습니다(...).

(좌파성향의) 동포들은 여권을 받아서 투표를 하면 야당을 찍을 테니 여권을 없애서 투표를 못하게 하면 2표의 효과가 있다는 거죠. 플러스마이너스 계산을 하면 2표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 이상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지시가 내려옵니다."

 
해당 공작에 대한 부정적 보고서를 올렸다가 국정원으로부터 간첩으로 몰리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까지 됐던 전 국정원 해외공작관 B씨의 증언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공작이 동원됐다. 북한 조총련계가 선거에 개입한다는 (국정원발로 의심되는) 보도가 터졌다.

이를 빌미로 일본 동포들에 대한 사상 검증이 만연했다. 이어 영사관에서 동포들에 대한 여권 발급을 늦추거나 거부하는 방식으로 투표에 참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상 및 활동 검증부터 심리적 압박까지 공작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게 진짜 말이 안 되는 게 나는 재일교포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활동해왔고 그렇게 살아왔고 나한테는 한국이 정다운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고 그런데 나의 개인적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단지 조선적 하나를 가지고 나를 위협으로 낙인찍고 편견을 갖는 거죠. 그게 나는 너무나도 억울하거든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이 사람은 나를 그렇게 본다. 그래서 진짜로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될지 '내 뇌 속을 보여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재일동포 3세 변호사)
 
 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과 하얀 방-공작원들의 고백' 편의 한 장면.

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과 하얀 방-공작원들의 고백' 편의 한 장면. ⓒ MBC

 
과거 부친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양친이 모두 조선학교(우리학교) 설립에 힘을 쏟았다는 재일동포 김미리씨. 그는 영사관이 조선학교 (후원) 활동을 문제 삼자 거세게 항의했다고 한다. 무상화 대상 제외 등 아베 정권 들어 갖은 차별을 받은 그 조선학교 말이다.

"내용증명이란 것이 일본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데 법적 수단에 있어서 증거가 된다. 법적 수단의 증거, 이거 뭡니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어요? 법을 어겼나요. 아니죠. 그냥 여권 얻기 위해서 신청을 했고 무슨 법을 어겼나요. 우리가 어긴 것이 아니라 그때 나온 분이 어긴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나요." (김미리씨)

여권법의 근거규정이 불분명하자 시행령을 고치는 꼼수를 쓰면서까지 재외동포들의 투표권과 인권을 제한한 이명박 정권과 원세훈 국정원. 이들의 공작은 분명 '성공적'이었다. 갖가지 압박과 제한, 모멸을 받은 일본 동포들의 당시 여권 신청 건수와 재발급 건수는 급감했다.

그리고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108만 표 차이로 이겼다. 원세훈 국정원의 이러한 해외 대선 개입 공작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 의문이다. 

국정원의 흑역사
 
 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과 하얀 방-공작원들의 고백' 편의 한 장면.

지난 1일 방송된 MBC < PD수첩 > '국정원과 하얀 방-공작원들의 고백' 편의 한 장면. ⓒ MBC

 
"비용을 지불한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이 안 됐지만 확실히 보수 성향으로 보이는 동포들을 버스를 이용해서 투표장으로 안내한다든가 투표 정보를 굉장히 적극적으로 전달한다든가 그런 부분은 저희가 이미 취재가 끝났습니다. 후속으로 나올 수도 있고.

그런데 후속에는 완전히 또 다른 제보 내용이 있습니다. 그 부분이 약간 극우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거든요. 굉장히 충격적이어서, 어떻게 보면 저는 이게 더 충격적이어서 꼭 다뤄야 될 것 같습니다. 저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고 특히 그 여권 제한받으신 중에는 독립운동의 후손이신 분도 계시고. 이건 정말 너무 심하지 않나."


3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MBC 장호기 PD는 후속 보도를 예고하며 연신 취재 중 받은 충격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댓글 공작도 모자라 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대선 개입 공작을 펼친 꼼꼼하게 세밀한 국정원의 악행이 일본에서 그쳤을 리 만무하다. 200~300만에 달했다는 해외 동포들 중 또 어느 국가가 이런 공작의 대상이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분명한 피해자가 남았다. 여권 제한으로 인해 고국에 오고 싶어도 상당 기간 올 수 없었던, 투표권까지 제한 받았던 해외 동포들 말이다. B씨는 2~3만의 일본 동포가 직접 공작의 대상이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2012년 해당 공작에 이의를 제기하고 중단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썼다 간첩 누명을 쓰고선 비밀누설혐의로 해임됐다. 국정원에 반기를 드는 일은 흔치 않을뿐더러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이 사망을 한 사건들이 굉장히 많이 발생했죠. 대부분 자살 사건이었고, 그런데 그분들이 사망했을 때 특징을 보면 국정원에 중요한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그 실무책임자였던 한 분이 괴로움에 못 이겨서 자살을 한 것으로 다 흘러갔거든요. 실제로 제보자 같은 경우에도 그런 국정원 내부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국정원에 대해서 반기를 든다는 것에 생명의 위협을 많이 느꼈어요." (김용민 의원, 당시 A씨 변호인)

고문까지 당한 A씨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직권면직 처분 취소 청구에 나섰다. 1심 재판부는 기각 처분을 내렸다. 고문 사실을 비롯해 강압적인 감사에 대한 별도의 심리 없이 국정원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국정원은 현재 고문을 비롯한 A씨 관련 사실을 부인 중이다.

'댓글 공작'을 지시한 이명박씨와 원세훈 전 원장은 수감 중이다. 그와 별개로 국정원이 남긴 '흑역사'는 이렇게 피해자들에 의해 하나 둘 밝혀지며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 PD수첩 > 방영 다음날(2일) 국정원은 창설 60주년을 맞아 엠블럼(문장)을 '청룡과 백호'에서 '별 모양 나침반' 디자인으로 교체했다고 밝혔다. 물론, 방송 내용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PD수첩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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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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