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작가 시점'은 늘 카메라 뒤에 서 있지만 방송국 구석구석을 누비는 방송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너를 만났다 시즌 1 스튜디오 모습

너를 만났다 시즌 1 스튜디오 모습 ⓒ 최미혜 작가

 
"아빠는 엄마 그림자라도 보고 싶다고. 멀리서라도."

아내를 잃고 다섯 아이를 홀로 키우는 중년의 남자가 눈물을 보인다. 지난 1월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시즌 2 '로망스'편 김정수씨 얘기다. 화면 속 수더분한 정수씨를 응시하던 시청자들은 어느새 먹먹함에 젖어든다. 저 그리움을, 사무치는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까.

<너를 만났다>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상실보다는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 2020년 2월에 방영된 첫 방송은 일곱 살에 난치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이야기였다. 방송분 가운데서도 VR(가상 현실)로 하늘나라에 있는 딸과 엄마가 재회하던 장면은 2021년 6월 현재 유튜브에서 무려 2744만 뷰를 기록 중이다. 제작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올해 시즌 2 '로망스' 편을 통해 사별한 아내와 김정수씨의 이야기를 선보였다.

한편 시즌2 마지막 편인 '용균이를 만났다'는 앞선 두 이야기와 결이 달랐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난 고 김용균씨와 시민들의 만남을 준비한 것이다. 제작진은 어느 정도 성공이 예견된 다큐멘터리에서 한발 나아가 VR저널리즘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도를 선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세간에 잘 노출되지 않은 작가의 시선이 궁금했다. 지난달 26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너를 만났다> 최미혜 작가를 만났다.

하루도 되지 않아 만뷰 넘긴 33초짜리 예고편
 
'너를 만났다' 최미혜 작가  MBC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의 최미혜 작가.

▲ '너를 만났다' 최미혜 작가 MBC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의 최미혜 작가. ⓒ 이정민


최 작가는 자신을 '아날로그 세대'라고 정의했다. 게임도 하지 않는 그가 어떻게 VR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게 됐을까.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종우 PD에게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세상을 떠난 딸과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를 가상 현실 속에서 만나게 해 보자"는 거였다. 뼛속까지 문과인 최 작가는 VR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그의 생이 이 프로그램을 거부할 수 없게 이끌었다.

최 작가는 9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었다. 홀로 남매를 키우며 헌신하던 어머니는 최 작가가 34살 되던 해, 환갑을 두 달 앞두고 갑작스러운 병마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족의 그림자라도 보고 싶다'는 출연자의 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했다. 그 역시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보고 싶었으니까.

그는 20년 넘게 '다큐쟁이'로 살았지만 VR과 휴먼 다큐멘터리를 접목한 프로그램은 처음이었다. 국내에서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형식이었기에 마땅히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도 없었다. VR 구현에만 억대가 넘는 제작비가 들었고 기술적으로 넘어야 할 산도 높았다. 다행히 기획자인 김종우 PD가 전자공학과 출신이라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에, 최 작가는 VR이라는 그릇에 넣을 내용을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너를 만났다> 시즌 1 첫 녹화 당일에도 시행착오가 많았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아이 엄마인 체험자가 그린 스튜디오에서 HMD(head mounted display)를 착용하면 엄마의 시선에 VR이 플레이 된다. 제작진은 스튜디오에 마련된 모니터를 통해서만 VR과 체험자가 합성된 화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린 스튜디오에 홀로 선 엄마가 아이를 안고 싶어서 손을 허우적대는 모습이 그렇게 크게 다가올 줄 몰랐다.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인 거다. 스튜디오에 카메라, 오디오, 조명 등 대략 60여 명 정도의 스태프가 들어오는데, 순간 거의 모두가 반응을 했다. 저 역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게 아니라 헉 하고 오열이 터질 것 같았다. 녹화되는 오디오에 울음소리가 들어갈까 봐 입을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나름 방송을 오래 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런 이들이 스튜디오에서 녹화 중에 이렇게 반응하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방송 직전 공개된 33초짜리 예고는 만 하루도 되지 않아 만 뷰를 넘겼다. 시즌1을 끝내고 나니 PD에게 BBC를 비롯한 해외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이어졌다. VR 휴먼 다큐멘터리가 세계 최초의 시도라고 했다. 제작진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추모관에 운명처럼 나타난 출연자
 
 너를 만났다 시즌 1 예고 이미지

너를 만났다 시즌 1 예고 이미지 ⓒ MBC

 
시즌 1이 성공을 거두면서 출연자 섭외는 좀 수월해지지 않았냐고 질문을 던지자 최 작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청자는 많아졌지만 실제 촬영으로 이어지기가 어려웠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촬영에 동의해야 하고 6개월여의 시간 동안 카메라로 일상을 찍을 수 있어야 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고인을 가상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느냐였다.

VR 제작을 위해서는 다양한 표정이 담긴 여러 각도의 사진, 음성, 영상들이 필요했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가족들이 흔치 않았다. 최 작가는 섭외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특히나 이 프로그램은 아이템의 운이 있는 것 같다. 운명처럼 저희에게 온다"고.

실제로 시즌 2 '로망스' 편 체험자와의 만남은 추모공원에서 시작됐다. 최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신 추모관에서 고 성지혜씨와 그의 가족사진을 보고 이끌렸다. <너를 만났다> 제작진은 추모공원을 통해 김정수씨 가족의 의사를 물었고, 그는 이 연결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아내가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작가님을 보낸 것 같다"고.

실제로 김정수씨는 출연을 반대하는 사춘기 딸아이들을 설득해가면서까지 의지를 불태웠다. 그런 정수씨의 마음을 알기에 제작진 역시 조심스러웠다. 6개월 간 촬영하면서 아빠와 다섯 아이들의 일상에 대한 개입을 최대한 줄이고 관찰자가 됐다. 엄마의 빈 자리에도 불구하고 남은 가족의 삶은 계속되니까. 걷잡을 수 없이 슬픈 순간도, 슬픔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부러 웃는 모습도,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도 다 삶이니까. 제작진의 노력을 알아봐 준 것일까. 처음엔 출연을 반대하던 아이 둘도 점차 마음을 열었다.

"감동적이었던 게 이 가족은 VR 체험을 앞두고 '엄마가 온다'고 표현을 한다. '엄마가 오는 날', '엄마가 올 때', '우리 엄마가 오면요. 이런 모습으로 왔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말하더라. 그게 제작진에게는 굉장히 감동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가족들을 위해 우리도 정말 잘 만들고 싶었다."

이 '잘 만들고 싶은 마음'에 제작진은 애가 닳았다. PD도, 작가도, AD도, 그래픽 팀도 각자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제작진은 김정수씨와 아내, 다섯 아이들이 10년 가까이 산, 추억이 가장 많이 깃든 집을 구현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아파트 구조와 가구 배치, 온 가족의 손때 가득한 물건 등 VR로 구현 가능한 모든 사물을 재질까지 따져가며 만들어냈다. 그런 디테일들이 높은 몰입도를 낳았다. VR 체험 당일, 김정수씨의 체험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우리 집이다!" 외쳤다.

김씨는 VR 체험 내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3년 간 억눌러왔던 그리움이 터져 나온 것일까. 가상 현실 속의 아내일지라도, 멀리서 그림자라도 보고 싶다던 그는 손을 떨며 아내의 얼굴선을 어루만졌다. 체험이 끝난 뒤 우는 아빠에게 "딸기 코 됐다"며 농담을 건네던 네 딸들 역시 아빠의 품에 안겨 그동안 참아왔던 그리움을 표현했다. 그런데, 엄마에 대한 기억이 가장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막내가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아빠 품에 안겨 우는 둘째 누나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괜찮아"라고 위로한 뒤 천진난만하게 스튜디오를 뛰어다녔다.

"휴먼 다큐도 오래 했고 가족도 잃어보았기 때문에 '상실'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었는데 다 착각이었구나 싶더라. 내가 아는 건 극히 지엽적인 것이고 삶에 모르는 영역이 정말 많구나 하는 걸 느꼈다."

쉬운 길 택하고 싶지 않아...방송 이후 더 활발해진 출연진
 
'너를 만났다' 최미혜 작가  MBC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의 최미혜 작가.

▲ '너를 만났다' 최미혜 작가 MBC VR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의 최미혜 작가. ⓒ 이정민


출연자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VR로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방송이 나간 뒤 일부 시청자들은 "체험을 할 때 출연자의 감정 해소를 위해 인형을 가져다 놓거나 사람을 세워 둘 순 없느냐"고 묻기도 했지만 제작진은 의견이 조금 달랐다. 세상을 떠난 가족을 '가상' 현실로 만나는 것이지 '가짜'인 대역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최 작가는 "VR 세트장에 인형이나 타인을 세우는 건 오히려 쉬운 방법"이라며 "출연자들의 감정이나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깊이 고민해서 세운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너를 만났다> 시즌 1과 2 방송 후, 세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달리, 출연자들의 만족도는 높다고 한다. 시즌 1의 엄마 출연자는 방송 이후에 유튜브와 브런치 등을 통해 세상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시즌 2 출연자 김정수씨는 "방송 볼 때 가족 모두 슬픔보다는 웃으며 즐겁게 시청했다"며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제작진에게 근황을 전했다. 누구보다 출연자들의 근황을 걱정하던 최 작가에게는 가장 안심되는 소식이었다.

"(출연자들에게)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슬픈 동시에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드리고 싶다. 특히 아이들에게 우리 방송이 아픔을 주는 자료가 아니라 엄마를 기억하는 추억으로 남았으면 한다. 나중에 이 친구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영상을 보여주며 '외할머니가 이런 분이었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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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작가시점 너를만났다 VR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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