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도 시대에 따라 유행이 돌고 도는 법이다. 1999년 <쉬리>라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대히트하자 <아유레디>, <에스터데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같이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들이 대거 제작됐다. <조폭 마누라>로 대표되는 조폭 코미디 열풍도 한동안 영화 시장을 지배했고 <왕의 남자>가 역대 최다 관객을 모으며 히트했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할리우드는 워낙 시장이 크다 보니까 작은 유행에 시장 전체가 영향을 받는 편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유행은 존재한다. 특히 80년대에는 <나이트 메어>와 < 13일의 금요일 >이 주도했던 '슬래셔 무비(살인마가 등장해 무차별 살인을 하는 영화)'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90년대 무분별한 자기복제 속에 빠르게 사장됐던 슬래셔 무비는 <나이트 메어>를 만들었던 고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1996년)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스크림>1편은 <할로윈2018>이 개봉하기 전까지 20년 넘게 역대 슬래셔 호러영화 흥행 1위 자리를 지켰다.

<스크림>1편은 <할로윈2018>이 개봉하기 전까지 20년 넘게 역대 슬래셔 호러영화 흥행 1위 자리를 지켰다. ⓒ 태원엔터테인먼트

 
사장되던 슬래셔 무비, 화려하게 부활하다

많은 관객들이 슬래셔 무비의 원조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를 꼽는다. 그리고 그 뒤를 1974년작 <텍사스 전기톱 학살>과 1978년작 <할로윈>이 이어 받았다. 하지만 군부독재 시대를 보내던 대한민국은 이런 슬래셔 무비들이 상영되기엔 환경이 너무나 척박했다. 따라서 국내 관객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슬래셔 무비는 제이슨이 등장하는 < 13일의 금요일 >과 프레디가 나오는 <나이트 메어>가 시작이었다.

1980년에 첫 선을 보인 < 13일의 금요일 >은 10년 동안 8편의 시리즈가 나왔고 <나이트 메어> 역시 6년 동안 5편이나 제작됐다(심지어 <13일의 금요일>은 4편의 부제가 '파이널 챕터'였는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버젓이 5편이 제작·개봉됐다). 하지만 처음엔 신선하던 슬래셔 무비들도 비슷한 장면과 패턴의 반복 속에 관객들의 눈에 금방 익숙해졌고 그 결과 90년대 들어 슬래셔 무비의 제작편수는 급격히 줄어 들었다.

그렇게 슬래셔 무비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가던 1996년, <나이트 메어>를 만든 웨스 크레이븐 감독이 신작 <스크림>을 들고 나왔다. <스크림>은 슬래셔 무비의 공식을 따라가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장르를 비틀면서 관객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주는데 성공했다. 1996년 연말에 개봉한 <스크림>은 북미에서만 1억 3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을 올리며 2018년 <할로윈> 리부트가 나올 때까지 20년 넘게 슬래셔 호러 무비 흥행 1위 자리를 지켰다.

국내에서는 북미에서 개봉한 지 2년도 더 지난 1999년 1월에 개봉했다. <스크림>은 공포영화의 성수기인 여름 시즌이 아니었음에도 서울에서만 36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스크림>의 흥행에 따른 효과로 국내에서도 한동안 슬래셔 무비의 제작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김규리, 하지원 주연의 <가위> 정도만 흥행에 성공했을 뿐 다른 한국형 슬래셔 무비들은 대부분 흥행에서 쓴 맛을 봤다.

5년 동안 세 편에 걸쳐 제작된 <스크림> 시리즈는 세계적으로 5억 달러가 넘는 흥행 성적을 올리며 투자대비 마진이 쏠쏠한 상품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11년 만에 제작된 <스크림4>는 세계적으로 9700만 달러의 수익에 그치며 아쉬움을 남겼다. '<스크림>의 아버지' 웨스 크레이븐 감독은 2015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그리워하는 <스크림>은 내년 1월 새 시리즈를 개봉할 예정이다.

굉장히 치밀하면서도 어딘가 어설픈 살인마
 
 <스크림>은 기존 호러 영화의 공식들을 뒤집고 변주하면서 새로운 공식과 재미를 만들었다.

<스크림>은 기존 호러 영화의 공식들을 뒤집고 변주하면서 새로운 공식과 재미를 만들었다. ⓒ 태원엔터테인먼트

 
잔인한 고어 영화를 어려워 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스크림>에 등장하는 고스트페이스의 살인행위가 다소 시시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네 가죽 뱃속을 보고 싶어"같은 잔인한 대사들을 내뱉는 것에 비하면 고스트페이스는 그저 칼을 들고 피해자에게 달려드는 식의 단순한 행동 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인이라면) 쉽게 볼 수 있는 '가벼운 슬래셔 무비'를 지향했던 것이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스크림>의 성공비결이었다.

<스크림>의 색깔은 드류 배리모어가 특별출연한 오프닝 장면에서 자세히 묘사된다. 단순한 장난전화라고 생각하며 낯선 남자의 말장난을 받아주던 케이시는 차츰 그가 하는 말들이 장난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묶여 있는 상태에서 살인마와 퀴즈 대결을 벌이다가 살해 당한다. 얼마든지 더 끔찍하고 무섭게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살해 당한 케이시가 나무에 걸린 장면 정도를 제외하면 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한 장면은 없다.

우스꽝스런 마스크를 쓰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달리 사실 범인은 상당한 지능범이다. 시드니(니브 캠벨 분)의 엄마를 살해해 놓고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몰았고 시드니와 아버지, 그리고 친구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도 시드니의 아버지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우려는 각본을 짜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살해 경험이 많은 전문 킬러가 아닌지라 과정은 언제나 조금씩 어설프다(처음 시드니를 습격했을 때도 시드니의 '업킥'에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스크림>에서는 공포 영화 마니아 랜디(제이미 캐네디 분)의 대사를 통해 공포영화의 법칙들이 공개된다. 여주인공은 남자와 잠자리를 갖지 말 것, 술과 마약을 하지 말 것, "곧 돌아올게"라고 말하지 말 것 등이다. 물론 이 법칙들도 제대로 지켜지진 않았는데 "곧 돌아올게"라고 말한 스튜어트(매튜 릴라드 분)가 칼에 찔려 죽는 반면에 남자(심지어 살인마)와 잠자리를 가진 시드니는 '속편에 나와야 하기 때문에' 살아 남았다.

<스크림>은 완성도가 높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슬래셔 무비의 공식을 비틀고 재창조해 또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영화. 실제로 2000년에는 이 작품을 패러디한 <무서운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는 <스크림> 외에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타이타닉>, <매트릭스>, <유주얼 서스펙트> 등 여러 영화를 패러디했다(<무서운 영화>는 <스크림>보다 높은 흥행 성적이 더 높았다).

열혈 가십기자가 된 <프렌즈>의 모니카
 
 4편까지 제작됐던 <스크림>은 오는 2022년 새로운 시리즈가 개봉할 예정이다.

4편까지 제작됐던 <스크림>은 오는 2022년 새로운 시리즈가 개봉할 예정이다. ⓒ 태원엔터테인먼트

 
<스크림>은 불과 1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다. 물론 25년 전 영화인 만큼 물가상승률을 계산해야 하지만 당시 최고 인기배우 짐 캐리 한 명의 출연료가 2000만 달러를 훌쩍 넘었던 것을 고려하면 <스크림>은 비교적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임에 분명하다. 당연히 A급 배우를 캐스팅하기는 쉽지 않았고 <스크림>은 개런티가 썩 높지 않은 신예나 덜 알려진 배우들을 캐스팅해 영화를 완성했다. 

캐나다 출신의 배우 니브 캠벨은 청순한 외모와 악바리 같은 근성의 여주인공 시드니 역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특히 되살아난 살인마의 머리에 총을 쏜 후 "내 영화에서는 아니야"라고 읊조리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쾌감을 주기 충분했다. 2011년에 개봉한 <스크림 4G>까지 <스크림>시리즈에 모두 출연한 니브 캠벨은 유명한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의 시즌 4,5에도 출연했다. 당연히 내년에 개봉하는 <스크림>의 새 시리즈에도 출연한다.

보안관 듀이 역의 데이빗 아퀘트는 주인공 시드니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용의선상에 일찍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저 여자의 칭찬에 약한 동네 바보 형이었고 고스트 페이스에게 당했음에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니브 캠벨과 마찬가지로 4편의 <스크림> 시리즈에 모두 출연한 아퀘트는 지난 2006년 영화 <트리퍼>의 제작·각본·주연·감독을 겸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배우다.

가십기자 최초로 퓰리처상을 노리던 게일 웨더스 역의 커트니 콕스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방송되며 큰 성공을 거둔 시트콤 <프렌즈>의 모니카 역으로 더욱 유명한 배우다. 짐 캐리의 출세작으로 유명한 <에이스 벤츄라>에서는 NFL 구단 마이애미 말린스의 구단 직원을 연기하기도 했다. <스크림>에서는 범인에게 총을 쏘며 시드니를 위기에서 구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콕스 역시 캠벨, 아퀘트와 함께 <스크림> 전 시리즈에 개근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스크림 고 웨스 크레이븐 니브 캠벨 커트니 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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