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추첨한 963회 로또 복권의 1등 당첨금은 14억7600만 원이었다. 세금을 제외한 실수령액만 해도 10억 원을 훌쩍 넘는다. 흔히 말하는 '인생역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평범한 서민들이 상상하기 힘든 거액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2등과 3등 당첨금은 각각 5400만 원과 110만원 선으로 뚝 떨어진다. 분명 적은 돈은 아니지만 5400만 원으로는 서울에서 전세 집 한 칸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1등에게만 모든 혜택이 집중돼 있는 것은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KBO리그에서는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팀에게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이 주어지고 그 아래 순위에 머문 팀들은 와일드카드 결정전부터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로 이어지는 치열한 단기전을 치러야 한다. 포스트시즌의 힘든 과정을 거친 선수들은 체력적으로 지치거나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한국시리즈에 오르기 때문에 휴식을 취한 1위 팀이 크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 사회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기 때문에 억울하면 1등을 해야 한다. 그만큼 세상은 1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1등이 온갖 혜택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모두들 1등에 오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세상엔 1등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훨씬 많다. 송능한 감독의 데뷔작 <넘버3>는 폭력조직 도강파를 중심으로 넘버1이 되기 위해 허우적대는 다양한 인간상들을 통해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유쾌한 코믹 풍자극이다.
 
 <넘버3>는 멀티플렉스 극장이 없던 시절임에도 서울에서만 3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넘버3>는 멀티플렉스 극장이 없던 시절임에도 서울에서만 3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 시네마서비스

 
천재감독 송능한

서울대 영화 동아리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한 송능한 감독은 졸업 후 <칠수와 만수>의 박광수 감독,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의 김동빈 감독 등과 함께 서울영화집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드라마 <겨울 나그네>와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태백산맥>의 각본을 쓸 정도로 뛰어난 글 솜씨를 발휘하던 송 감독은 1997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맡은 <넘버3>를 선보였다.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이미연 등 지금은 다시 모으기 힘든 스타배우들이 총출동했던 이 작품은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현실을 풍자한 코믹한 이야기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넘버3>는 2000년대 초반 봇물처럼 쏟아진 조폭 코미디의 원조로 꼽힌다.

당시 이 영화는 서울에서만 29만의 관객을 동원했고 비속어와 욕설이 난무한 '19금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예능에서 패러디로 널리 쓰였다. 송 감독은 <넘버3>를 통해 청룡영화제 신인 감독상과 각본상,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을 휩쓸었고 충무로는 탁월한 글 솜씨에 재기 발랄한 연출력까지 갖춘 신인 감독의 등장에 열광했다. 하지만 송능한 감독은 충무로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1999년 신작 <세기말>을 공개했다.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영화로 김갑수, 이재은, 차승원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영화 제목에 충실하기 위해 새천년을 20일 앞둔 1999년 12월11일에 개봉했다. 하지만 <넘버3>의 유머와 위트를 쏙 뺀 <세기말>은 관객들의 공감을 사지 못했고 서울관객 3만9000명을 모으는데 그쳤다.

이후 송능한 감독은 <세기말>을 끝으로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2001년 귀국해 신작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2004년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 카메오 출연 이후 영화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는 단 두 편의 영화만을 남긴 채 충무로에서 홀연히 사라졌지만 <넘버3>에서 보여줬던 유머코드는 2000년대 초반 수많은 코미디 영화들을 통해 변주, 재생산됐다.

주인공만 8명,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향연
 
 <넘버3>의 조필 앞에서는 잠시 임춘애와 현정화를 착각해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넘버3>의 조필 앞에서는 잠시 임춘애와 현정화를 착각해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 시네마서비스

 
대부분의 영화들은 주인공이 특정 사건을 만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 구조를 이룬다. 하지만 <넘버3>는 '사건'이 아닌 '인물'에 집중하는 영화다. 도강파 넘버1을 노리는 서태주(한석규 분)와 욕을 입에 물고 사는 열혈 검사 마동팔(최민식 분), 불사파 두목 조필(송강호 분) 등 무려 8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서로 엮이면서 갖가지 코믹한 상황들을 연출한다. 인물이 지나치게 많아 집중하기 다소 어려운 면도 있지만 그것조차 <넘버3>가 가진 매력이다.

<넘버3>는 보스를 살려 도강파의 넘버3(본인은 스스로 넘버2인 줄 알지만)가 된 서태주가 넘버1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기본틀을 이룬다. 건달이라는 게 원래 놀고 먹는 직업인데 태주는 하루 평균 12시간 반을 일하며 조직을 다지고 구역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신사적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태주와 달리 조직 내 경쟁자 재철(박상면 분)은 수 틀리면 언제나 재떨이를 사용해 일을 처리하며 태주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전문킬러로 일하다가 한계를 느낀 조필은 불사파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산에서 개구리와 뱀을 잡아 먹으면서 수련을 하던 불사파 조직원들은 좁은 여관방에서 자장면으로 연명하며 일거리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조필이 조직원들을 앉혀 놓고 '헝그리 정신'과 '무대뽀 정신'에 대해 설교하는 장면은 <넘버3>뿐만 아니라 1990년대 한국 영화에서 가장 코믹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조필을 연기했던 송강호는 <넘버3>를 통해 '인생역전'을 이뤄냈다.

가는 곳마다 조직을 폐허로 만드는 '핵폭탄 검사' 마동팔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자신은 폭력조직에게 공포의 대상이면서도 정작 9살짜리 아들은 학교 일진들에게 돈을 빼앗긴다. 뇌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자기 아버지 믿고 설치는 아들, 그 아들 믿고 설치는 친구, 그리고 세상에 땀 흘려 일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진짜 깡패로 여긴다(이 장면은 최민식의 욕이 섞인 열연을 직접 봐야 그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서태주를 제외한 <넘버3>의 주요 인물들은 한국 조폭과 일본 야쿠자의 거래 현장이었던 룸살롱에서 만난다. 재철이 랭보(박광정 분)를 겨냥해 던진 재떨이가 일본 귀빈에게 맞으며 한-일 조폭들의 전쟁이 시작되고 마동팔은 경찰특공대를 동원해 혼돈의 상황을 정리한다. 강도식(안석환 분)을 암살하러 갔던 조필은 주방 환풍구를 통해 탈출에 성공하고 자수를 선택한 서태주는 "너나 나나, 마동팔이, 세상도 인간도 다 넘버3야"라며 허탈한 미소를 짓는다.

독립 투사의 후손 재떨이와 터치가 다른 시인 랭보
 
 <넘버3>에서 독특한 시인 랭보를 연기했던 고 박광정은 지난 2008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넘버3>에서 독특한 시인 랭보를 연기했던 고 박광정은 지난 2008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시네마서비스

 
도강파 보스 강도식이 부하의 배신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이 쿠테타를 진압한 인물은 바로 재철이다. 강도식의 '히든카드'로 불리는 재철은 재떨이를 연장 대신 사용하고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인터넷이 '국제경찰'인 줄 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 던질 때 그 도시락 들고 있었던 독립 운동가의 피를 이어받아 애국심이 매우 뛰어나다.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귀빈에게 재떨이를 사용하려 했을 정도로 다혈질이기도 하다.

재철을 연기한 배우 박상면은 <넘버3> 이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반칙왕> 등 여러 영화에서 주로 코믹한 배역을 맡으며 얼굴을 알렸다. 특히 1999년 드라마 <왕초>에서는 까마귀(이혜영 분)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내는 하마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 <조폭마누라>에서는 신은경의 소심한 남편을 연기했고 12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는 7번방 방장 소양호(오달수 분)의 라이벌로 출연했다. 

<넘버3>에서 두 여성 캐릭터 현지(이미연 분)와 지나(방은희 분)는 시집 '장판지의 꽃'의 판매량이 기대에 미치지 않아 아르바이트로 시를 가르치는 고독한 시인 랭보에게 푹 빠졌다. 현지의 말에 따르면 랭보는 시적인 터치를 통해 자신이 전혀 모르던 세상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현지에게 시를 가르치던 랭보는 곧 지나와 다른 공부(?)를 하게 되는데 지나는 보충수업을 제안할 만큼 랭보의 지도방식(?)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랭보를 연기한 고 박광정은 <넘버3> 출연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송강호나 박상면에 비해 얼굴이 많이 알려진 배우였다. TV나 영화에서는 주로 코믹한 감초 연기를 많이 보여줬지만 연극 연출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어 1993년 연극 <마술기계>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신인 연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광정은 지난 2008년 3월 폐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다가 같은 해 12월 향년 47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넘버3 송능한 감독 한석규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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