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기획실모임 대표 시절 이춘연 대표(왼쪽 두번재)

한국영화기획실모임 대표 시절 이춘연 대표(왼쪽 두번재) ⓒ 권영락 제공

 
고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은 긴 시간 한국영화의 든든한 맏형으로 통했다. 그를 한국영화의 대부이자 큰 별로 자타가 인정하는 이유는 1980년 이후 전개된 한국영화의 개혁 과정에서 전면에 섰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 전두환의 광주학살 이후 태동한 한국 영화운동이 충무로라는 제도권과 대립하다가 이후 시간이 흘러 충무로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이춘연 이사장의 역량이 크게 작용했다.
 
이춘연 이사장은 1970년대 초반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연극은 그의 전부와 다름없었다. 끊임없이 연극을 만들었고, 공연에 나섰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을 한 것은 아니고 1970년대는 방학 때 워크숍을 했는데, 나는 그렇게 안 하고 방학 때도 연극을 만들어서 소극장과 다방 등을 돌며 공연을 하러 다녔다.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문화운동을 한 셈이다. 이때 공연한 작품들이 <빠담빠담빠담>, <햄릿>,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이었다."
 
대학 졸업 후인 1976년 극단 동인무대 창립 공연작이었던 <문밖에서>를 연출했고, 같은 해 현대극단이 창단됐을 때는 연극 기획 및 배우로도 활동했다. 

충무로 2.0 시대를 열다

연극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가 영화 쪽으로 넘어오게 된 것은 1983년이었다. 현대극단에서 제작사인 화천공사로 넘어오면서 영화 기획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처음 기획한 영화가 이장호 감독의 <과부춤>과 <바보선언>이었다.
 
<과부춤>은 <꼬방동네 사람들>과 <어둠의 자식들>이 영화화 된 이철용의 소설이 원작이었고, <바보선언>은 1980년 군사독재의 실상을 비판하는 영화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장호 감독이 구성을 거꾸로 해서 다양한 풍자와 상징을 담아 만든 영화였다.
 
1985년 이춘연은 1년 5개월의 화천공사 생활을 끝내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문인 김유진 김덕남 등과 함께 대진엔터프라이즈를 창립한다. 박정희 군사독재 이후 막혔던 영화사 설립이 수십 년만에 풀린 것이다. 이때 함께 창립작품으로 만든 영화가 김유진 감독이 연출한 <영웅연가>였다. 충무로 2.0 시대의 시작이었다. 
 
1987년에는 황기성사단의 기획제작 상무를 맡아 <접시꽃 당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성공시대>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등을 만들었다. 하나같이 주제의식이 선명하고 당대 사회상을 그려낸 영화들이었다.
 
 2000년 권영락(좌측 두번째), 안동규(우측 끝) 등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이춘연 대표

2000년 권영락(좌측 두번째), 안동규(우측 끝) 등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이춘연 대표 ⓒ 이춘연 제공

 
치밀한 준비를 통해 영화를 사전에 기획해 만드는 것이 생소했고, 전문인력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잇달아 화제작을 만들어낸 그의 역량은 도드라졌다. 199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대는 바로 이 기획영화가 바탕이었다. 영화운동에서 쌓인 젊은 영화인들의 열정이 충무로의 기획과 결합하며 한국영화의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춘연 이사장은 1990년대 언론 인터뷰에서 "영화를 기획할 때 가장 고려할 사항은 관객의 흐름이다"라며 "관객의 취향을 무시하거나 잘못 짚으면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때 그와 함께하기 시작한 영화인들이 권영락(씨네락픽쳐스 대표), 안동규(영화세상 대표), 신철(신씨네 대표), 유인택(예술의 전당 대표), 심재명(명필름 대표) 등이었다. 대학 시절 영화운동에 나섰던 이들을 중심으로 영화 기획자들의 친목모임이었던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을 정식단체로 만들어 1991년 발족한다. 이춘연은 대표로 추대됐다.
 
한국영화의 보스

연극배우로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듯, 이춘연은 영화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언변과 분위기를 이끄는 능력이 남달랐다. 친절함과 따뜻함은 많은 후배들이 그를 맏형이자 대부처럼 생각하며 따르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영화인들을 아우르고 다독이는 부드러운 성품에 보스로서의 기질과 자질이 충분했기에 시간이 갈수록 한국영화에서 그의 위상은 자연스럽게 커져 나갔다.
 
영화계의 개혁을 바라는 젊은 후배들의 열망을 담아내면서도 기존 충무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영화인들과도 교류했기에 양쪽을 아우르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한국영화가 세대교체 과정에서 신구세대 간 갈등을 겪을 때도 무난한 성품으로 양쪽의 소통을 연결하면서도, 한국영화 개혁에는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2000년 기존 충무로의 영화인협회(한국영화인총연합)를 불신한 젊은 영화인들이 영화인회의를 만들 때 이사장을 맡았고, 이후 영화단체연대회의 등을 이끌며 1980년 영화운동진영이 충무로의 주류로 세대교체를 이루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2016년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춘연 이사장(왼쪽)

지난 2016년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춘연 이사장(왼쪽) ⓒ 성하훈


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만들어 대표를 맡기도 했으나, 한 직능단체의 대표라기보다는 전체 영화인들의 큰 형님으로 역할이 더 적합했다. 국내 주요 영화제와 영상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의 손이 안 거친 곳이 없었고, 국내 영화계의 현안에도 막후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역할을 기울였다.
 
지난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는 영화인들과 함께 광화문에 나와 촛불을 들며 큰형으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이듬해 밝혀졌지만 그 역시 다른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함께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였다. 국가정보원이 좌성향 영화인으로 분류한 명단에 이춘연은 영화인회의 이사장으로 올라 있었다.
  
신인 등용문 <여고괴담>

이춘연 이사장의 영화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은 '여고괴담' 시리즈를 통해 발휘됐다. 1998년 시작된 여고괴담 시리즈는 20년 넘게 이어오며 신인 감독과 신인 여배우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김태용, 민규동, 최익환 감독과 김규리, 서지혜, 김옥빈, 박한별, 송지효, 조안, 오연서, 손은서 배우 등이 <여고괴담>을 거치면서 스타로 부상했다.
 
이춘연 대표는 지난해 9월 인터뷰에서 <여고괴담>의 시작에 대해 "일본 영화연감에 <학교괴담> 1~3편 개봉 소식이 소개됐고, 당시 한 감독이 일본 신주쿠에 영화를 보러 갔다 와서는 학생들이 바글바글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관심을 갖게 됐다"며 제작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오기민 프로듀서가 <여고괴담> 시나리오를 썼으나 일본 것을 베낀 것 아니냐? 오해를 받았다. '아니다'라고 했음에도 여기저기서 퇴짜를 맞아 2년 반을 돌아다녔던 거다. 시나리오를 보고 당시 영화잡지에 게재되는 제작 진행 상황에 올렸더니 이를 보고 시네마서비스 강우석 대표가 바로 전화가 왔다. 그래서 계약서를 썼다. 아주 간단하게 썼는데 내용이 '1. 강우석이 돈을 댄다. 2. 이춘연이 제작한다' 였다."
 
 <여고괴담1>의 한 장면

<여고괴담1>의 한 장면 ⓒ 씨네2000

 
<여고괴담>이 신인배우의 등용문 역할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귀신으로 누구나 아는 배우가 나오면 관객들은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며 "누군지 모르는 신인이 나와야 영화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매번 신인배우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충무로의 선배로서 진보적 한국 영화운동을 끌어주며 충무로의 개혁을 주도했던  발자취는 이제는 한국영화사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대중과의 호흡을 중시하며 한국영화 2.0 시대를 열었던 노력은 봉준호와 윤여정의 아카데미상으로 이어진 밑거름이기도 했다. 
이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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