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피아니스트 포스터

▲ 전장의 피아니스트 포스터 ⓒ JIFF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한데 붙여놓았을 때 드는 감상이 있다. 사막의 펭귄이라거나 북극의 코끼리, 겨울의 개나리와 한여름에 타는 스키 같은 것들. 그런 이질감이 가끔은 정신을 일깨우고 감정을 북돋는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도 가끔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화면에 담길 때가 있다. 전쟁영화에서 등장하는 피아노도 그와 같은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와 같은 기법을 즐겨 활용하는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피격당한 병사를 피아노 건반 위에 고꾸라지게 하고 <쉰들러리스트>에선 유대인 학살 장면 즈음에 독일군이 바흐를 연주하는 모습을 담는다.

아예 피아니스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전쟁영화도 있다.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로,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 분)이 2차 대전 중심에서 겪어낸 이야기를 절묘하게 담아냈다. 독일군의 폭격과 무너진 건물 사이로 울려퍼지는 스필만의 연주는 좀처럼 잊기 힘든 매혹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출품작인 <전장의 피아니스트>도 그와 같은 효과를 의도했을 것이다. 폐허가 된 마을, 끊임없이 이어지는 총격 사이로 희망이자 구원인 피아노 한 대를 놓아둔 것을 보면 말이다.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컷

▲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컷 ⓒ JIFF

 
ISIS가 장악한 도시, 피아노를 지키려는 청년

주인공은 20대 젊은 피아니스트 카림(아델 카람 분)이다. 시리아의 도시 세카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작은 카페에서 일하며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에겐 어머니가 마련해 연주하던 피아노 한 대가 있는데, 그에겐 그 피아노가 세카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사실상 무정부상태인 세카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 ISIS와 그에 저항하는 무장단체들이 반목을 거듭한다. 그마저도 ISIS의 위세가 강해 다른 단체는 대놓고 바깥을 나다니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둘 중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카림과 마을 사람들은 ISIS에게 압박을 받는데, 이런 상황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건 몹시 위험한 일이다. ISIS는 서양문화를 금지하는데, 피아노도 서양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카림에게 닥쳐오는 위험과 그 속에서도 피아노를 지키려는 그의 노력을 가까이서 보여준다. 카림은 피아노를 판 돈으로 유럽으로 밀항할 계획을 갖고 있지만, 정작 피아노 때문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ISIS의 총격으로 망가진 피아노를 고치려 목숨을 걸고 위험지대를 오가고, 그렇게 고친 피아노를 가지고 ISIS 두목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도 한다.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컷

▲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컷 ⓒ JIFF

 
총탄이 날아드는 전장 속 낙관주의를 비추다

영화는 카림이 여성민병대 대원과 우연히 만나 피아노를 고치기 위한 여정을 함께 하는 모습 등을 흥미진진하게 비춘다. ISIS에 저항한 이라크 쿠르드족 여성민병대 실화를 그린 <태양의 소녀들> 속 민병대원처럼 보이는 여성은 "여자에게 죽으면 천국에 못간다는 믿음이 우리의 무기"라는 유명한 말을 직접 건네기도 한다.

ISIS는 마을 사람들을 핍박하고,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암암리에 이들에 저항하는 무장단체를 조직해 활동하며, 또 그들 중 일부는 밀고자가 되어 ISIS에 정보를 실어나르고, 또 누군가는 아무 편도 들지 않고 제 일에만 열심이다. 영화는 카림의 행적을 따르는 한편에서 이들 모두의 상황을 골고루 조명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특히 영화가 인상적으로 비추는 건 카림이 일하는 카페 사장아저씨다. 그는 카림과 ISIS 조직 두목을 어린시절부터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로 그려지는데, 어떤 고난 앞에서도 늘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이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박살난 가게를 고쳐 다시 문을 여는데 열심인데, 도시가 마비돼 가게에 올 사람이 없음에도 그렇다.

그가 가게를 재개장한 날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순간으로, 예기치 않은 빗줄기가 쏟아지자 그는 "마침 준비한 비가 내리는군"하며 바깥 테이블에 놓여진 음식들을 가게 안으로 들어 옮긴다. 그의 낙관주의는 카림의 피아노가 그렇듯 영화 전반에 깔린 수많은 고난들과 맞물려 기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컷

▲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컷 ⓒ JIFF

 
전장에 피아노 한 대 던져놓는 것으론 부족하다

<전장의 피아니스트>를 연출한 레바논 출신 감독 지미 케이루즈는 할리우드의 오래된 클리셰가 서아시아의 비극을 부각시키는 효과적 수단이라 판단한 듯 싶다.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워낙 큰 성공을 거둔 탓에 전쟁과 피아노의 연결이 모두 그 아류로 여겨지기 쉬운 상황이 되었음에도 이 설정을 포기하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케이루즈의 뉴욕 콜롬비아 대학교 졸업작인 단편 <녹턴 인 블랙>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곤 하지만, 설정과 가능성을 보는 단편과 그보다 중한 것들을 담아야 하는 장편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는 못한 듯하다.

<전장의 피아니스트>는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을 엮어 감동을 구현하고자 한다. 전쟁과 피아니스트, 폭압과 낙관주의 따위의 것들을 함께 그려내 비극적 현실을 강조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러닝타임 내내 케이루즈의 역량은 설정이 주는 감상을 뛰어넘지 못한다. 영화 속 악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결말 역시 허망할 뿐이다. 영화 중반 등장하는 여성민병대원은 서아시아 바깥의 관객에게 흥미가 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별한 의미도 없다. ISIS에 대한 묘사 역시 기존 영화와 언론에서 비춰진 이미지를 재현할 뿐이다.

ISIS의 악행과 서아시아의 정세, 그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국과 러시아 등 외세의 역할은 지난 수년 간 급박하게 변해왔는데 케이루즈의 영화는 그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영화 속 카림의 피아노 연주가 민망하게 느껴지는 건 스필버그와 폴란스키보다도 서아시아 출신인 케이루즈의 고민이 훨씬 더 얕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장의 피아니스트 JIFF 지미 케이루즈 전주국제영화제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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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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