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기자말]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 전주국제영화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고교야구 봉황대기 결승전. 2아웃 만루 상황. 우승을 목전에 둔 중요한 상황에서 광호(정재광 분)가 타석에 들어선다. 긴장되는 상황. 상대편 투수가 던진 공이 광호가 휘두른 배트에 맞아 내야를 가로질러 수비수 사이를 지나고, 광호의 이 안타로 팀은 우승을 차지한다. 고교 야구부 유망주로 평가받던 그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하고 다가올 프로팀 신인 드래프트에서 선발될 가능성을 높이는 한 방이다. 그렇지 않아도 신인 드래프트 선발에 대한 꿈이 컸던 광호는 더욱 큰 기대를 갖게 된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끼기 시작한 건 그 이후였다. 신인 드래프트를 코 앞에 두고 감독이 수원을 연고로 하고 있는 프로팀에 신고선수(정식 드래프트에서 선발되지 못할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일종의 연습생)로 먼저 입단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먼저 해 온 것이다. 고교 시절 내내 유망주로 평가 받아왔고 얼마 전 큰 대회에서 주목할만한 성적까지 거둔 광호의 입장에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 제안.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줄곧 꿈꿔왔던 정식 드래프트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광호는 정식 드래프트에서 이름이 호명되지 못하며 떨어지고 만다.
 
이정곤 감독의 영화 <낫아웃>은 자신의 꿈이었던 프로 신인 드래프트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게 된 유망주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당연히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탈락을 하게 된 이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음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목표를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을 결코 순수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대신, 부정하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꺾이고만 자신의 욕망을 다시 세우기 위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낫아웃>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낫아웃>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2.
'자존심을 세우고 싶으면 자존심만 세우던가 아니면 말이나 잘 듣던가'
 
순수하게 운동만 열심히 하고 성적을 잘 내면 좋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광호가 부딪히게 되는 것은 역시 어른들의 사정이다. 한 번이라도 더 타석에 많이 서고, 유망한 학교에 추천을 받고, 또 프로팀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한 더러운 어른들의 사정. 그래도 실력이 있었기에 경기에는 자주 나갈 수 있었지만,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그 사정을 외면한 채로는 아무래도 쉽지가 않다. 이렇게 되고 보니 광호의 입장에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증거도 없지만 자신이 드래프트에서 떨어지게 된 것, 드래프트에 참가도 하기 전에 신고선수에 대한 제안을 받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래프트에 떨어졌으니, 대학에라도 진학해 대학 졸업 후에 다시 한 번 신인드래프트로 참가하겠다는 계획도 비슷한 사정 앞에 부딪힌다. 함께 운동했던 동기들이 이미 내정이 되어 있는 상황. 친구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는 경쟁이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감독 역시 공정하게 경쟁을 하면 그 친구들보다 광호가 입학하게 될 것이라 인정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니까, 어제 경기에서 발생한 낫아웃 상황에 죽기살기로 뛰어 세이프 된 것으로 혼난 것은 일도 아닌 셈이다. 어른들에게는 상대 팀에게 일부러 져줘야 하는 날이 있고, 실력으로 공정한 경쟁을 해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물론, 광호도 알고 있다. 이 모든 문제가 돈 때문이라는 것을.
 
03.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이런 일은 광호의 주변을 맴돌았고, 그때마다 원망은 아버지를 향했다. 다 쓰러져가는 국숫집 하나를 겨우 운영하면서 자신의 뒷바라지도 제대로 못해주는 아버지. 초등학생 때 처음 야구장에 데리고 간 것도 아버지였고, 집에서 매일 야구만 틀어놓고 관심을 끌었던 것도 아버지였기에 그 원망은 더했다. 자신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실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손바닥 마디마다 배트로 인한 굳은살이 깊게 자리잡을 정도였고, 실력은 남들보다 좋았으면 좋았지 아쉬운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학교에 찾아와 감독과 면담을 하는 아버지가 짜증이 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망의 대상은 그저 원망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더 이상 미워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그런 대상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받는 것대로 화가 난다. 물론,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돌이킬 수 없기에.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기에 광호는 자신의 대학 진학을 위해 가게를 팔라고 아버지를 종용한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화풀이 대상이 필요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감독은 5000만 원을 원하고 있으니까.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낫아웃>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낫아웃>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4.
민철을 만나는 건 그 즈음의 일이다. 자신이라도 돈을 모아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광호는 어린 시절 함께 야구를 했던 그를 찾아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부탁한다. 지금부터 광호에게 앞뒤를 가릴 여유는 없다. 민철이 소개해 준 일은 가짜 휘발유를 만들어 파는 것. 처음에는 휘발유를 만드는 일만 배우지만,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이야기에 직접 배달까지 나서서 한다. 돈을 벌어 감독에게 가져다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런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프로 무대는 고사하고 퇴출이 될 수도 있는 상황. 광호는 야구를 하기 위해서 야구를 등지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에 가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지점에서도 광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감독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감독과 상의 없이 지원할 수 있는 대학 모두에 지원서를 넣고, 대학 입단 테스트를 두고 실시한 내부 홍백전 경기에서는 같은 대학 경쟁자였던 성태에게 부상을 입힌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길을 모색해보지만, 현실은 더 가혹해진다. 동료들의 차가운 멸시를 받으면서도 테스트를 받으러 간 대학에서 절대 잡을 수 없는 쪽으로만 공이 날아오며 광호를 떨어뜨리겠다는 노골적인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이제 광호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말했던 제한 시간 내에 하루 빨리 돈을 마련해 가져다 주는 것. 그것만이 자신이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위해 광호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05.
영화의 중간쯤에 보면, 광호와 함께 야구를 하다 먼저 그만 둔 민철이 의외로 개운한 표정으로 야구를 그만두면 행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금은 인생을 걸고 내일이 없을 것처럼 굴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게 아닐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제 모든 것을 놓고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의 시선에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비슷한 길을 걸어왔더라도 이제 필드를 떠난 사람의 마음은 아직 그 곳에 묶여있는 사람의 마음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광호는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눈치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해본 자신의 야구 인생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고 대답한다. 그런 마음이기에 광호는 자신 앞에 놓인 부정한 장애물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방법이 그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하더라도, 일단 부수고 나아가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속 광호의 행동들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구석은 조금도 없지만, 이해는 해 볼 여지가 생긴다. 실력이라도 없었으면 벌써 포기라도 했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광호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보통 이런 작품들의 경우에 주인공의 험난한 여정과 그 의지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그래도 영화의 마지막에 제자리로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광호의 모습에는 마음이 조금 움직이기도 한다. 비록 감독의 뒷거래로 인한 부정한 경기이기는 했으나, 그런 경기에서도 낫아웃 상황을 포기하지 않고 1루로 전력을 다해 뛰어가던 모습. 그 결과로 감독에게 혼이 나기는 했으나 그 순간만큼은 공정한 경쟁과 스포츠의 진짜 정신을 실현해내던 광호의 모습이라면 언젠가는 결국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낫아웃 이정곤 정재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