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9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조작된 살인의 밤, 연필과 빗 그리고 야간비행' 편의 한 장면

지난 4월 29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조작된 살인의 밤, 연필과 빗 그리고 야간비행' 편의 한 장면 ⓒ SBS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법조인들 중 다수가 '가장 가치를 두는 헌법 조항'으로 헌법 제10조를 꼽았다. 법에는 문외한이었던 나로서는 헌법 1조가 아닌 10조가 뽑혔다는 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저 조항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학창시절에 시험 문제로 나올까 줄기차게 외워대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얼마 전 한 방송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에서 방송된 정원섭씨의 이야기는 한 국민이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하고, 공권력이 그것을 짓밟았을 때 인간이 얼마나 처절히 고통 받고 처참히 무너진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어느 영화보다 충격적이고 가슴 저리게 슬픈 이야기는 1972년 시작됐다.
 
1972년 춘천에서 초등학교 5학년 소녀가 논둑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단 10일 안에 범인을 검거하라는 내무부 장관의 '시한부 검거령'이 내려진 이후 경찰들은 강간살인범으로 지목한 정원섭씨에게 일명 '비행기를 태운다'는 모진 고문을 하고, '내가 죽였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낸다. 경찰에 의해 바뀌치기 된 증거와 경찰이 어린 소녀들을 감금하고 협박해 만들어낸 거짓 증언은 정씨를 짐승만도 못한 강간살인범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재판에서 정씨는 재판과정 중 수차례 무죄를 주장했지만 검찰과 재판부는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무기징역을 받게 된다. 강간살인범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정씨의 집안은 한순간 풍비박산이 나고, 가족들은 쫓기듯 살던 동네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 힘겨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는 15년 2개월의 수감생활 끝에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그 이후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1999년 재심을 신청했으나 재판부는 재심 청구를 기각했고 무심한 시간은 그렇게 또 흘러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재심권고 결정 후 재심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것은 2008년이었다.
 
정원섭씨가 범죄자의 누명을 벗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36년이었다. 그가 억울한 옥살이의 대가로 국가로부터 받은 형사보상금은 9억 6천만 원, 그것도 4번에 나눠 분할지급을 받아야했다.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1심에서 26억 원의 배상 판결이 났지만, 항소심을 진행하던 중 손해배상 소멸시효가 3년에서 갑자기 6개월로 줄어들어 재판부는 배상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지난 4월 29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조작된 살인의 밤, 연필과 빗 그리고 야간비행' 편의 한 장면

지난 4월 29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조작된 살인의 밤, 연필과 빗 그리고 야간비행' 편의 한 장면 ⓒ SBS

 
조작된 살인의 밤의 피해자는 청년에서 그렇게 중년이, 어느덧 백발의 노년이 되었지만 국가로부터 단 한 푼의 배상금도 받지 못했다. 그날 이후 정원섭씨의 인생 중 오롯이 본인의 인생을 산 날이 단 하루라도 있었을까? 철저하게 유린되고 짓밟힌 50년의 시간은 아무리 많은 배상금을 받아도 메울 수는 없다. 그 상처가 아물 수도, 그 기억이 사라질 리도 없다. 하물며 단 한 푼도 배상할 수 없다는 국가에게 그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정원섭씨를 고문하고 증거를 조작했던 경찰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모르쇠로 일관했고, 7년의 공소시효가 이미 끝나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당시 정원섭 씨 사건과 관계되어 있던 경찰, 검찰, 재판부의 어느 누구도 정원섭씨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지 않았다.
 
정원섭씨는 뇌출혈과 치매로 기억을 점점 잊어 오늘 먹은 저녁 메뉴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고문당하던 그날의 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배상금을 받지 못한다는 판결을 차마 전하지 못해, 오매불망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정원섭씨는 결국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한 채 향년 87세의 나이로 지난 3월 영면에 드셨다.
 
1972년에도 헌법 제10조는 존재했고, 정씨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잔인한 폭력과 인권 탄압이 도사리던 끔찍한 그 시절에 정원섭씨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지옥을 살아야했다. 공권력이 만들어낸 폭력과 거짓의 피해자였던 그는 처절하게 살아갔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우리는 그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할아버지의 손이라도 한 번 잡아드리고 위로를 해주는 이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덜해지셨을까?
 
방송이 끝나고 나서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화가 났다, 마음이 아팠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 긴 세월을 어찌 사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그 분의 인생을 생각하니 숙연해지고 결국은 멍해져버렸다. 50년의 시간 동안,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사셨겠구나, 그저 짐작만 들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사과를 하지 않아,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무엇도 안 되는 나이지만 죄송하다는 말이 눈물을 비집고 새어나온다.
 
결국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고 떠나신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부디 그에게 고통을 떠안긴 이들의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이 있었으면 한다.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그의 인권에 대한 국가의 진정한 위로와 배상도 있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정원섭 할아버지가 평안한 곳에서 영면하시길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지난 4월 29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조작된 살인의 밤, 연필과 빗 그리고 야간비행' 편의 한 장면

지난 4월 29일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조작된 살인의 밤, 연필과 빗 그리고 야간비행' 편의 한 장면 ⓒ SBS


 
꼬꼬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정원섭 조작된 살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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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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