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첫 방송을 탄 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는 역모 사건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한 바우(정일우 분)의 이야기다. 바우가 생계를 위해 보쌈꾼 생활을 하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소재다.
 
제1회 방송이 3분쯤 경과한 대목에서, 바우가 부잣집에 들어가 돌싱녀를 납치하는 장면이 나왔다. 남성으로부터 청탁을 받은 바우는 여성을 납치하고자 침투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납치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그 집에는 중년 여성이 있었다. 한밤중인데도 그는 곱게 단장하고 있었다. 복면을 한 바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자루를 꺼내들자, 그 여성은 "이보시게! 이보시게, 잠시만!"이라며 꽃신과 보따리를 챙겨들었다. 바우는 "아주 목욕재계를 하고 기다렸구나"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성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바우는 여성을 포대로 씌웠다. 여성을 등에 맨 바우는 조수인 춘배(이준혁 분)와 함께 순라꾼(순찰하며 돌아다니는 말단 관리)들을 피해 남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젊은 선비가 혼례식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과부와 선비는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맞절을 올리며 미래를 약속했다.
 
 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 MBN

 
 
 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 MBN

 
방송 후반부에서는 보쌈 사건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건일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 바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납치한 여성이 광해군의 딸인 수경 옹주(권유리 분)였던 것이다. 결혼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채 과부가 된 이 옹주가 뜻밖의 보쌈을 당하는 일로부터 드라마 스토리가 본격화됐다.
 
바우와 춘배 같은 보쌈꾼들은 한밤중에 불법을 저지르다 보니 순라꾼들을 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됐다. 걸리면 혹독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위의 중년 여성 사례처럼 자발적 보쌈인 경우에는 보쌈을 청탁한 남성과 실행한 보쌈꾼뿐 아니라 보쌈을 당해준 여성까지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효종 임금 때인 1653년 제주에 표착해 13년간 조선 문화를 체험한 헨드릭 하멜의 글에도 담겼다. <하멜 표류기>의 일부분인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 이런 대목이 있다.
 
"간통을 하거나 기혼 부인을 납치한 자는 그 여인과 함께 발가벗기거나 때로는 얇은 속옷만 입히고 얼굴에다 석회를 칠한 채로 온 마을을 돌아다니게 한다. 두 사람의 귀는 화살로 연결시킨다. 이들의 등에는 작은 짐을 메는데, 형리가 그 징을 두드리며 '저들은 간통한 자들이다'라고 외치고 다닌다. 그렇게 온 마을을 끌려 다닌 뒤에 볼기를 50 내지 60대 맞는다."
 
위 내용은 하멜이 봤거나 들은 것에 기초한다. 모든 경우에 다 이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조선시대 형법전 중 하나인 <대명률직해>는 "화간(和姦)이면 곤장 80대이고 유부녀이면 곤장 90대"라고 규정했다. 부부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성적 접촉을 하면 곤장 80대를 치지만, 그중 한쪽이 유부녀이면 곤장 90대를 쳤던 것이다.
 
만약 성관계를 목적으로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가면 곤장 100대라고 규정했다. 보쌈꾼과 비슷한 범죄자에게는 가중 처벌을 가했던 것이다. 이 같은 법률 규정과 비교할 때, <하멜 표류기> 내용은 곤장 횟수는 적지만 훨씬 가혹하고 치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
 
 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MBN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 MBN

 
중요한 것은, 보쌈 사실이 발각되면 그 정도로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는 점이다.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바우와 춘배는 다소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보쌈 일을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약탈혼으로 규정되는 그 같은 보쌈 풍습은 아바스 왕조(압바스 왕조, 750~1258)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천일야화>에도 등장한다. <아라비안 나이트>로도 불리는 이 책에는 약탈혼을 당해 25년간 지하궁전에 감금된 여성이 등장한다. '흑단의 섬'으로 불리는 왕국에서 공주로 태어났다가 보쌈을 당한 이 여성은 이렇게 회고했다.
 
"부왕께서는 저와 사촌이었던 왕자를 제 배우자로 선택해주셨습니다. 신혼 첫날밤, 궁정과 '흑단의 섬' 수도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싸여 있었고 신부인 저는 신랑에게 인도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떤 정령이 나타나 저를 납치해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기절하여 의식을 잃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이 지하궁전에 잡혀와 있었지요. 처음에 저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그 흉측한 정령과 함께 사는 것도 견딜 만하게 되더라고요."

 
정령이 공주를 보쌈했다는 내용의 비현실적인 스토리이기는 하지만, 보쌈을 통한 약탈혼 풍습이 아바스 왕조 치하의 이슬람인들에게도 알려져 있었기에 이것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쌈 풍습은 현대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현대 세계에서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40여 국가를 여행하다가 2000년경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와 접한 키르기스스탄에 정착한 전상중씨가 <샘터> 2005년 7월호에 기고한 '[해외통신] 사랑한다면 납치해줘 - 키르기스스탄 유목민의 보쌈 결혼'에 이런 대목이 있다.
 
"키르키즈어로 '알라 카추(여자를 훔쳐라)' 즉 납치혼 또는 약탈혼으로도 불리는 이 결혼 풍습은 12세기 유목민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구소련 때부터 법으로는 금지돼 있지만, 대부분의 키르키스인들은 이런 행위를 위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처벌되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보쌈은 '강제연행'보다는 '유인' 형식으로 많이 벌어진다고 한다. "대부분 '잠깐 차나 마시며 얘기 좀 나누자' 또는 '파티에 가자'고 유인하는 방식으로 보쌈해 간다"고 위 글은 말한다.
 
방식 역시 과거와 현저히 다르다고 한다. "과거에는 흰색의 큰 자루에 여자를 넣거나 유목민답게 말에 태워 보쌈을 했지만, 요즘은 주로 자동차를 이용하여 납치한다"고 위 기고문은 말한다.
 
<보쌈 - 운명을 훔치다>도 그렇고 <하멜 표류기>도 그렇고 <천일화야>도 그렇고 전상중 기고문도 그렇고, 보쌈을 다룬 글이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것은 여성을 납치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었다.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남성을 보쌈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지리에 어두운 상태에서 객지를 여행하는 남성들이 그런 일을 당하는 일들이 있었다. 특히, 과거시험에 응시하고자 한양을 방문한 선비들이 그런 위험에 노출되곤 했다. 과거시험 시즌이 되면 수험생들뿐 아니라 바우나 춘배 같은 보쌈꾼들도 덩달아 바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보쌈에 대한 공포심이 지방 수험생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존재했다고 한다.
 
2019년에 <비교민속학> 제69집에 실린 민속학자 이영수의 논문 '보쌈 구전설화 연구'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1926년의 일본어 논문인 '조선 원시 제민족의 혼인(朝鮮原始諸民族の婚姻)'을 근거로 하는 설명이다.
 
"과거가 시행되면 지방에서 많은 미혼의 양반 자제들이 서울로 모여들기 때문에 이 틈을 타서 총각보쌈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지방에서 과거에 응시하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를 보러 가기 전에 먼저 점복자에게 점을 치고, 만약 보쌈과 같은 것에 걸릴 점괘라도 나오면 상경을 단념하였다고 한다."

총각보쌈의 목적 중 하나는 처녀의 액운을 막는 데 있었다. 과부가 될 팔자라는 점괘를 받은 처녀의 부모들이 이런 일을 자행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자기 딸이 과부가 되는 일을 막고자 낯선 총각을 보쌈해 모의결혼을 시킴으로써, 미래의 진짜 사위가 받게 될 '일찍 죽을 운명'을 낯선 총각에게 떠넘기기 위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두면 처녀가 진짜로 결혼할 신랑이 일찍 죽지 않게 되리라는 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과부 보쌈이나 처녀 보쌈은 과부나 처녀와 결혼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총각 보쌈은 총각과 결혼할 목적뿐 아니라 총각을 죽일 목적으로도 이루어졌다. 보쌈은 주로 여성을 상대로 일어났지만, 이것이 남성을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훨씬 심각한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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