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리코는 독특한 나라다. 중남미에 있는 이 나라는 완전한 독립국이 아닌 미국의 자치령이다. 국민들이 직접 투표해 뽑은 지사가 실질적인 통치를 하지만 명목상 국가원수는 미국 대통령, 현재는 조 바이든이다.

완전독립에 대한 주장과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자는 주장 모두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어느 하나 아주 강경하지는 않다. 영어보단 스페인어가 익숙한데,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문화와 야구,농구 등 미국 스포츠가 가까이서 소비된다.

태어나면 미국 시민권을 갖게 되고, 미국 하원에 발언권은 있지만 투표권은 없는 의원까지 보낸다.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도 꾸준히 받고 있으니, 미국의 2등시민이자 푸에르토리코의 1등시민으로 살길 원하는 이들이 적지는 않다.

척박한 토양과 별 볼일 없는 자원에도 뛰어난 풍광으로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 여러 기업들은 푸에르토리코에 공장을 운영하며 각종 지원을 받기도 한다. 특출난 기술이 없음에도 전자와 제약이 주요 산업인 건 그 때문이다.
 
어처구니 없는 포스터

▲ 어처구니 없는 포스터 ⓒ 블루필름웍스

 
만나본 적 없을 푸에르토리코 영화

독특한 상황에 있는 푸에르토리코는 저만의 문화가 크게 발전하진 못했다. 영상과 음악, 문학적 요소가 두루 섞인 영화산업 역시 미국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푸에르토리코 영화산업은 사실상 미국에 종속돼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미스타드>, 디즈니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등 이국적 풍광의 바다가 필요한 영화 여럿이 행정편의와 저렴한 인건비 등의 이유로 푸에르토리코에서 촬영됐다.

영국과 미국, 스페인 자본이 푸에르토리코에서 싼 가격에 로케이션 촬영을 하기도 하는데, 한국영화 <콜>로 리메이크된 <더 콜러>가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 중에선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이들 영화를 푸에르토리코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의 자연이 등장하고,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여럿 출연하기도 하지만 푸에르토리코 영화인이 영화 제작 전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 없는 스틸컷

▲ 어처구니 없는 스틸컷 ⓒ 블루필름웍스

 
삼촌의 죽음을 알려선 안 된다

그렇기에 한국 대부분의 영화팬은 푸에르토리코 영화를 본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꽤나 왕성한 영화팬조차 푸에르토리코 영화 한 편을 보기가 어렵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홍콩, 독일, 스페인, 러시아, 이란, 나이지리아 등 몇 개 국가를 제외하면 한국에 수입되는 영화를 만드는 나라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에르토리코는 남은 국가 중에서도 영화산업이 자리를 잡지 못한 곳이다.

그런 푸에르토리코 영화가 한국에 개봉했다. 일종의 블랙코미디를 표방했는데, 실수로 일어난 사고를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주인공의 분투기가 줄거리다.

주인공은 의족이나 의수 등 보형장구를 제작하는 곳에서 일하는 남성이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독거미에 삼촌이 물려 죽은 사실을 알고 이를 알리지 않고 해결하기 위해 좌충우돌한다. 사체를 처리하고 싶지만 과거의 트라우마로 시도조차 못한다. 마침 가게 주변에선 좀비영화 촬영이 시작되고 제작진은 그의 가게에서 보형물을 빌리려 한다.

영화 스태프 중엔 주인공을 마음에 들어하는 여성도 있다. 남자의 급박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주변인들은 거듭 가게를 찾아와 긴박한 상황을 자아낸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촌이 죽을 당시 화상채팅을 하던 여성은 멀리서 삼촌의 생사를 찾아 가게를 방문한다.
 
어처구니 없는 스틸컷

▲ 어처구니 없는 스틸컷 ⓒ 블루필름웍스

 
한국 관객 눈높이엔 역부족, 하지만

현지 영화인들이 직접 만든 <어처구니 없는>은 자타공인 영화선진국에서 평생을 보낸 한국 관객들의 수준에는 도달하기 역부족이다. 감춰야 할 비밀과 그 비밀을 위협하는 시도들에 영화적 서스펜스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영화에 비해 나은 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듬어지지 않은 시나리오엔 구멍이 많고 캐릭터의 감정선이나 배우들의 연기도 실망스런 수준이다.

미국과 영국, 스페인 영화의 현지 스태프로 적잖은 경험을 쌓았을 푸에르토리코 제작진에게 그나마 강점은 기술이다. 한 눈에 들어오는 영화의 때깔, 소리녹음, 촬영 등은 할리우드나 한국 영화와 비교해도 아주 못한 수준은 아니다. 기술이 발전할 수록 승부를 가르는 건 사람과 콘텐츠에 있음을 낯선 푸에르토리코 영화가 입증하고 있다.

영화를 본 평론가와 기자, 영화팬들이 혹평을 쏟아내고 있지만 <어처구니 없는>의 가치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수준 높은 영화를 본다는 건 발전한 나라의 영화를 본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에 그렇다.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발전하지 않은, 미숙한, 주류와 동떨어진 영화에도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개중엔 영화에 열의를 가진 이들도 없지 않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어떤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을까. 이 영화 한 편으로 푸에르토리코 영화산업의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보지 않은 것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리라 믿는다.

블루필름웍스가 이 영화를 골라 멀리 한국까지 수입해 개봉하기를 결정한 것에도 어떤 이유가 있지는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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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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