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편집자말]
나는 여전히 생생히 기억한다. tvN <나빌레라> 첫 회 심덕출 할아버지(박인환)의 칠순 잔치 장면을. 그 날 덕출이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끈 후 가족들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할아버지 무슨 소원 비셨어요?" (은호)
"첫째는 자식 하는 일 다 잘되고 건강한 거. 둘째는 자식들에게 짐 안 되게 건강하게 살다 가는 거. 은호야 우리 나이 되면은 그거 밖에는 바라는 거 없어." (해남)
 

덕출이 자신의 소원을 말할 겨를도 없이 해남(나문희)은 질문을 가로채 이렇게 말하고, 다른 가족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큰 아들 성산(정해균)의 훈수가 시작되고, 언성이 조금씩 높아진다. 결국 성산은 "가족이니까"라며 큰소리를 내고 성관(조복래)은 "지긋지긋하다 심성산 가족주의"라는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떠버린다.
 
이 가족이 등장한 첫 장면은 성관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듯 한국식 가족주의, 그러니까 가족 구성원을 역할로만 인식하고 구성원 각자보다는 가족 전체를 우선하는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처럼 가족주의라는 기치 아래 나보다는 우리였던 덕출 할아버지 가족.

하지만 마지막 회에서 이 가족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덕출의 인생을 힘껏 응원한다. 또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시작한다. 마침내 이들 우리가 아닌 너와 내가 함께 사는 공동체, 그러니까 가족 구성원들의 각자의 인생을 응원해주면서 함께 하는 진정한 가족이 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나는 이 역시 심덕출 할아버지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1회 덕출의 생일을 축하하며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 화목해 보이지만 서로에 대한 간섭과 통제에 곧 언성이 높아진다.

1회 덕출의 생일을 축하하며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 화목해 보이지만 서로에 대한 간섭과 통제에 곧 언성이 높아진다. ⓒ tvN

 
내가 나를 존중한다
 
아마도 그 시작은 3회가 끝날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 덕출은 열심히 발레를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했었다. 발레를 배우러 가는 걸 들킬까 봐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서고 아내 해남 몰래 발레복을 빨아 넌다. 혹여나 발레 연습하는 모습을 누가 볼까봐 한밤중에 마당에 나와 비밀스럽게 연습을 한다. 그러다 마침내 해남한테 들키고 마는데 해남은 "자식들에게 민폐 끼치지 말아요. 그냥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동네 산책이나 하면서 그렇게 곱게 늙으라구요!"(3회)라며 화를 낸다.
 
덕출은 이런 해남의 반응에 실망하면서도 채록(송강)에게 "지금은 집 사람이 싫어하는데 솔직히 반대하는 건 별로 안 무서워"라며 의지를 불태우지만 여전히 가족들 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이때 채록은 제안한다. "정면돌파"하자고. 채록은 덕출이 발레 연습하는 사진을 찍어 가족들에게 전송하고, 덕출은 마침내 가족들에게 선언한다.

"나 발레한다!"
 
그러자 가족들은 덕출이 발레를 하는 것을 주제로 가족회의를 연다. 발레를 덕출이라는 한 사람의 일이 아닌, 정상적인 가정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받아들인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덕출의 발레가 가족의 망신이 될까 두렵고("남들이 알면 뭐라 하겠어요?") 일반적인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벗어난 아버지를 수용하지 못한다("어르신들은 산에 다녀야 해요"). 개인의 삶보다 가족 안에서의 역할과 가족의 체면이 우선이라는 가족주의적 사고를 잘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덕출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코 발레를 포기하지 않는다. 가족의 반대에 잠시 망설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발레를 묵묵히 계속 해나간다. 나는 이것이 자기 존중의 태도였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시선에 기대지 않고 나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켜가는 태도는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덕출의 자기존중과 이에 기반해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와 말들은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각자의 이야기를 되살리다
  
 성산은 덕출이 선물한 야구글러브를 보며 장남과 가장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해낸다.

성산은 덕출이 선물한 야구글러브를 보며 장남과 가장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해낸다. ⓒ tvN

 
먼저, 변화한 것은 덕출과 오랜 시간 가장 가까이서 지내온 아내 해남이다. 4회 발레복을 입고 있는 덕출의 모습을 본 성산은 "발레보다 자식이 중요하냐"며 덕출에게 선을 넘은 분노를 터뜨린다. 이 장면을 목격한 해남은 가장,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덕출이 살아온 과정을 떠올린다. 덕출이 지닌 고유한 삶의 이야기를 상기할 수 있었던 해남은 덕출을 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이렇게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 그러니까 그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 사람을 역할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한다. 덕출이 가족들의 반대에서 자기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덕출과 해남의 태도는 서서히 다른 가족들에게도 스며들어 각자의 이야기를 써가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대기업 입사만을 노렸던 은호(홍승희)는 아버지 성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찾아 나서고, 애란(신은정) 역시 오랫동안 수행해 온 엄마와 아내로서의 삶에서 빠져나와 일을 통해 자기를 실현해간다. 성숙(김수진)은 오랫동안 애써온 임신을 포기하는데, 이는 남들처럼 아이 낳고 살고자 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한계를 수용하며 보다 고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도 볼 수 있다.
 
의사의 길을 그만두었던 성관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상태에서도 '자기대상'을 포기하지 않는 덕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의사라는 직업의 의미를 찾는다. 아마도 성관이 의사를 그만두었던 것은 원하는 것이 있기보다는 의사로서 느끼는 회의감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을 테다. 때문에 성관은 병원을 그만 둔 뒤에도 이렇다 할 길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덕출을 보며 그는 시간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고, 의사가 삶에 시간을 더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간파하고 복귀를 결정한다. 의사로서 소명을 찾은 성관은 분명 전과는 다른 자세로 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완고하게 가족주의를 실천했던 성산도 마침내 변화한다. 11회 성산은 회사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덕출은 성산에게 야구글러브를 선물한다. 성산은 덕출이 선물한 야구글러브를 통해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기억해 낸다. 가장 혹은 장남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본 성산은 아내 애란의 응원에 힘입어 회사에 사표를 낸다. 그는 어릴 적 꿈에 조금 더 가까운 야구단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시간을 공유하며 서로를 기억해주는 가족
  
 덕출과 채록은 마침내 함께 날아오른다.

덕출과 채록은 마침내 함께 날아오른다. ⓒ tvN

 
이렇게 심덕출 할아버지의 가족은 우리라는 한 덩어리에서 벗어나 너와 나가 됐다. 그리고 12회 덕출의 공연을 관람하며 마음 힘껏 한 사람으로서의 덕출을 응원한다. 또한 덕출의 모습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을 것이다. 성산은 공연을 본 후 딸 은호에게 "너도 니가 좋은 거 해. 니가 행복한 거"라고 말해준다. 이는 덕출의 모습을 통해 자기존중을 일깨운 가족들이 타인존중으로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드라마는 마지막 회 가족 안에서의 역할이 아닌 각자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가족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각자의 삶을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며 때로는 그냥 지켜봐주는 가족들의 모습은 첫 회 "가족이니까"라며 서로 구속했던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보였다. 이렇게 덕출 할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족들 각자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너와 내가 모두 존중받고 서로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진정한 가족의 모습을 탄생시켰다.
 
드라마의 말미. 3년이 지난 후 알츠하이머 증세가 더욱 심해진 덕출의 모습이 그려진다. 덕출은 해남과 옆집으로 이사 온 딸 성숙의 돌봄을 받으며 지낸다. 덕출은 "내 살 곳은 내가 정한다"며 요양원 입소를 희망했었지만, 아마도 가족의 간곡한 부탁에 그리하지는 못했던 듯 싶다. 하지만, 덕출을 돌보는 가족의 모습은 그다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는 가족주의 안에서의 의무가 아닌 한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으로서 행한 돌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날아오른 채록이 귀국했을 때 이들은 마치 가족을 맞이하는 것처럼 한 자리에 모인다. 우리로서의 가족이 중요했더라면, 가족 안에서의 역할이 없는 채록을 이처럼 환대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나의 개별성을 회복한 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시간에 함께한 채록을 가족으로 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이는 가족주의에서 벗어났을 때 더욱 개방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 이는 채록의 반복된 대사에 그 답이 있었던 것 같다. 채록은 덕출의 알츠하이머를 알게 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할아버지 괜찮아요. 제가 할아버지를 기억하면 돼요"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런 게 가족 아닐까.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시간에 함께 하며 그 모습을 기억해주는 것. 이럴 때 가족은 서로가 써내려가는 이야기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알게 해준 심덕출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나빌레라 송강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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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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