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 전주국제영화제

 
01.
어느 회사 소유의 폐공장 건물.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퇴사 직전에 내몰린 직원들을 대상으로 역량향상교육이 실시될 장소다. 이곳으로 차를 몰고 들어오는 이윤지(구자은 분) 대리. 그녀도 이번 교육 대상 중 하나다. 이번 구조조정으로 해고 위기에 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육 자체는 그리 별 다를 게 없다. 교육 운영 매니저라는 직책으로 있는 채영(문혜인 분)의 지시에 따라 시간에 맞춰 온라인 수업을 받고 그 내용에 대한 테스트를 매일 받으면 된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들이 구조조정을 당한 것도 모자라 이런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에 반감을 갖고 있는 십 여명의 교육생들이다. 그들은 다 쓰러져 가는 폐건물에 자신들을 모아놓고 이런 교육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멸감을 줘 하루 빨리 내쫓겠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인다.

비협조적이고 냉소적으로 구는 것은 기본. 매니저라고 소개하는 채영이 자신들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기에 대놓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심지어 채영이 회사에서 직접 파견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밝혀진다. 영화과 출신에 단편 시나리오나 겨우 완성하면서 생활비가 필요해 단순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들에 대한 이런 처우에 윤지는 특히 더 크게 반발한다. 물론 그 중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하려는 이들도 몇몇 보이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과장 진급 1순위에 회사의 에이스로 인정받다가 단숨에 구조조정 대상자가 된 윤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렇지 못한 상태다. 더불어, 그들의 뒤에서는 노조의 입김도 어느 정도 힘을 받고 있는 듯하다. 최소한의 믿을 구석인 셈. 윤지는 첫날 오후에 치러진 테스트 답안지를 공란으로 내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사람 귀한 줄 모르는 회사. 얼마나 잘 되나 볼 것입니다. 평생 저주하겠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재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항의의 뜻을 강력하게 전달한 셈이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2.
김창범 감독의 연출작 <역량향상교육>은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막다른 길에 내몰린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량 향상 교육의 우수생으로 뽑혀 복직하고자 하는 이들의 간절함을 이용한 회사의 교묘한 술수를 보여주는 한편, 상황이 전개되면 될수록 주체인 회사가 아닌 직원들 사이에서 불화와 논쟁을 발생시키는 시스템적인 모순에 대해 그려낸다. 특히, 동일한 상황에서 대체하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표현과 어쩌면 동일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비정규직 매니저와 교육생 사이의 사건과 갈등들은 영화의 서스펜스와 디테일을 한껏 끌어올리는 요소다.

특히 이 작품은 짧은 러닝 타임 내에서도 세 번의 극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노조의 단톡방에 올라온 글 하나와 채영의 시나리오 원고, 그리고 김 부장(임호준 분) 아내의 등장이다. 그때마다 제시하는 첨예한 갈등 상황과 그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에 맞게 돌변하는 인물들의 태도를 풀어내는 방식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특히, 이렇게 쌓인 갈등의 요소들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또다른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열린 결말을 차용하고 있음에도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만큼은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3.
윤지의 답안지가 제출되고 얼마 되지 않아 교육 대상자들 사이에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한다. 노조 단톡방에 올라온 글 하나. 이번 역량향상교육의 대상자들 가운데 성적 1등은 희망 시 본사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현장에 모인 이들 가운데 이와 같은 특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돌변한다. 복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기게 되자 윤지 역시 조금 전 자신의 성급했던 행동을 크게 후회한다.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벌써 구조조정을 당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업계 전체에 퍼졌다는 소문도 들려오기 때문이다. 경력직으로 회사를 옮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다음 날부터 상황을 전복시켜보려는 윤지의 처절한 노력이 시작된다. 수업 계획서를 만드는 것은 물론, 전날과 달리 누구보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그녀. 심지어는 앞자리에 있던 김 부장에게 자신의 회사 복귀를 위해 시험을 망쳐 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까지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역시 회사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아니, 그는 1등을 구제해 주겠다는 회사의 방침이 전해지기 전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교육에 참여해 온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리 없다. 매니저에 대한 태도도 돌변한다. 채영이 교육생들의 언행을 모두 기록하고 있고, 이 또한 평가 점수가 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가능성이 전혀 없던 상황에서 제한적인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바뀐다. 어떻게 보면, 이 폐건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량향상교육은 말이 교육이지 기존에 그들이 다니던 회사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직원들의 고과 평가를 하고 줄을 세워서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선 사람을 다음 계층으로 진급시키는 상황과 지금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니, 되려 지금의 상황이 더욱 절실하다. 가장 꼭대기, 1등에 서지 않으면 복직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회사는 그들의 절실함을 이용한 셈이다. 한 명을 구제하겠다는 그 간단한 방법으로 해고 직전에 놓인 직원들의 비난을 회사가 아닌 옆자리 동료에게로 돌려 놓은 것이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4.
여기에 한 번의 전복이 더 발생한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주차 수업 미수료를 이유로 경고장을 받게 된 윤지는 빈정이 상해 채영과 감정 싸움을 한다. 자신의 유력한 경쟁자로 여겨졌던 김 부장은 경고장을 받지 않았기에 마음이 더욱 급하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채영의 시나리오다. 단순히 직원들을 관리 감독하는 아르바이트생이라 여겨졌던 그녀가 이 폐건물에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을 소재로 제목 미정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것을 윤지가 알게 된 것이다. 순간 수치스러움을 느끼지만 윤지는 이 상황을 빌미로 채영에게 모종의 거래를 제안한다. 자신이 이 교육에서 1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채영이 원고를 계속해서 쓸 수 있도록 눈감아 주겠다는 것.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손을 잡는다. 영화과를 나와 장편 시나리오는 커녕 단편 시나리오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채영과 대학 졸업 후 24살부터 거의 10년을 일한 직장에서 내쫓기게 생긴 윤지의 입장에서 이 거래는 나쁠 것이 없으니 말이다. 윤지는 채영이 시나리오를 조금 더 풍부하게 쓸 수 있도록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고, 채영은 윤지를 위해 그녀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김 부장의 답안지를 틀리게 고쳐 그 역시 경고장을 받도록 손을 쓴다.

여기에서는 처음부터 깨져버린 불균형, 그러니까 첫날의 테스트 이후에 교육 우수자에 대한 베네핏이 발표되면서 윤지와 김부장의 성적이 크게 달라진 것이 두 번째 전복의 진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전력이었던 김부장의 성적을 윤지가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런 그녀 앞에 채영의 비밀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다. 실제로, 윤지가 채영의 비밀을 알게 된 배경 역시 어떻게든 김부장과 자신의 격차를 좁히기 위한 부정행위였다. 그러니까, 영화가 처음의 전복에서 경쟁의 시작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경쟁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05.
세 번째 전복은 두 사람의 거래가 이렇게 잘 유지되던 중에 발생하게 된다. 교육이 한창이던 때, 한 여자가 김 부장을 찾아오면서부터다. 김 부장의 아내다. 김 부장은 이 교육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회사에서 처한 상황을 집에 알리지 않은 듯하다. 이내 상황을 이해한 김 부장의 아내는 다른 교육생들을 향해 짙은 호소를 한다. 특히 그의 경쟁자인 윤지에게 곧 대학에 입학할 두 아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양보해 달라며 무릎까지 꿇고 빈다. 당연히, 윤지는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이 어떻게 지금 이 상황까지 끌고 왔는데.

김 부장의 아내는 아무런 소득 없이 자리를 떠나지만, 그녀의 짙은 호소는 채영의 마음을 흔들고 두 여자의 비밀스런 거래에 균열을 일으키고 만다. 한 가정의 생계를 빼앗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으니 이제라도 그만두자는 채영과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다 알고 시작한 것은 아니니 이미 지나간 일은 덮고 가자는 윤지다. 그녀는 그제서야 처절한 사람들을 이런 곳에 모아 놓고 그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냐며 반문하지만, 이미 많이 늦었다. 그런 물음은 애초에 처음부터 가졌어야 했고, 지금까지의 갈등과 반목은 처음부터 회사를 향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영화는 마지막의 전복에서 애초에 이 경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역량향상교육>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6.
영화의 마지막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폐건물에는 재입사에 가장 절실했던 두 사람 윤지와 김 부장만이 남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예전보다 훨씬 돈독해 보이고 서로를 위하는 듯하다. 윤지와 채영의 비밀스런 거래도 이제는 사라진 듯 보인다. 관객들이 세 번의 전복을 통해 느껴온 부분들을 영화 속 이들도 마찬가지로 느낀 것 같다.

애초에 잘못된 경쟁에 내몰려 잘못된 방법으로 살아남으려고 했던 이들. 그들의 잘못된 경쟁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잘못된 방법으로 서로를 이기려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교육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역량향상교육 문혜인 김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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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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