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순자 역을 맡은 배우 윤여정이 26일(한국시간) 오전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미나리> 순자 역을 맡은 배우 윤여정이 26일(한국시간) 오전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고 있다. ⓒ ABC 화면 캡처

 
"드디어 만났군요. 브래드. 우리가 털사에서 촬영을 할 때 어디에 있었어요?"
- 윤여정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소감 중)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의 주인공은 <미나리>의 윤여정이었다. 브래드 피트의 호명과 함께 무대에 오른 윤여정은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에도 유머 감각만큼은 여전했다. 자신의 두 아들에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다'라며 어깨를 으쓱대기도 했고, 동갑내기(1947년생)인 배우 글렌 클로즈 등 함께 후보에 오른 배우들을 향해 '우리는 각자의 작품에서 승리자이며 경쟁은 성립될 수 없다'며 품격 있는 존중을 표했다.

우리가 잘 아는 거인, 윤여정
 

수상 소감을 마무리한 이름은 고 김기영 감독(1919 ~ 1998)이었다. 김 감독은 올해 개봉 50주년을 맞은 윤여정의 영화 데뷔작 <화녀>(1971)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봉준호 감독과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존경을 받을만큼 혁신적인 기법과 미장셴으로 상징되는 존재다.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은 나의 첫 감독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기뻐했을 것"이라며 거장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윤여정은 가늠할 수 없는 확장성을 가진 배우다. 1966년 데뷔 이후 50년이 넘게 다양한 여성의 얼굴을 연기했다. 그는 여성 중견 배우에게 요구되는 전형성을 피하고, 생동하는 캐릭터를 만들고자 씨름했다. 우리는 그 모습에 익숙하다.

최근 5년 동안의 활약만을 놓고 보아도 그렇다. <죽여주는 여자>(2016)에 등장하는 성판매 노인 소영, <계춘 할망>(2016)에서 헌신적인 모성애를 보여주는 '할망',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에서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 '복실'. 이들은 서로 겹치는 구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나리>의 순자 역시 윤여정의 방식으로 창출해낸 결과물이다.

수상 소감에서 윤여정은 자신이 아카데미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말했다. 자신은 지구 반대편 변방에서 TV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관전자였으며, '미국인들이 한국에 호의를 갖고 있는 것 같다'며 자세를 한껏 낮추기도 했다. 그러나 윤여정의 수상은 비영어권 배우, 아시아 여성이 갖는 소수적 상징성을 떠나, 배우의 무게에 걸맞은 명예다.
 
클로이 자오, 시대를 관조하는 샛별
 
 < 노매드랜드 >의 주연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왼쪽)과 감독 클로이 자오(오른쪽)

< 노매드랜드 >의 주연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왼쪽)과 감독 클로이 자오(오른쪽)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은 많은 사람들의 예측대로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가 수상했다. 중국 출신의 1982년생 젊은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감독상을 수상한 비백인 여성으로 기록되었다. 이 영화의 주연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 역시 <파고>(1996)와 <쓰리 빌보드>(2017)에 이어 세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노매드랜드>는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삶의 터전을 잃고 미국을 떠도는 '노매드(유랑자)'들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담은 작품이다. 상실을 뒤로 하고 캠핑카에 몸을 맡긴 펀(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황량한 길 위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유랑자들을 만난다.
 
"살다 보면 그것을 믿기 어려운 순간도 있지만, 제가 만난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 선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클로이 자오 감독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소감 중)

성선설을 떠올리게 하는 클로이 자오의 수상 소감이 보여주듯, 펀이 만나는 유랑자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삶을 위로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클로이 자오는 희망과 회복을 믿었다. 유랑자들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여건은 결코 녹록지 않으나, 희망을 놓지 않도록 만드는 인간적 연대에 주목했다.

<노매드랜드>의 작품상 수상이 확정되었을 때, 이 영화에 출연했던 스왱키 등 실제 유랑자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 것은 올해의 명장면이었다. 스크린 속 연대는 스크린 바깥에서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편 고 채드윅 보스먼의 몫으로 점쳐졌던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에서 치매 노인의 공포를 연기한 안소니 홉킨스에게 돌아갔다. 남우조연상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대니얼 칼루야가 수상했다. <소울>은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음악상(트렌트 레즈너, 애티커스 로즈, 존 바티스트)을 챙겼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편집상, 음향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올랐다.
 
무지갯빛 시상식이 될 수 있게
 
미 아카데미상 시상식 레드카펫 밟는 배우 윤여정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리는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배우 윤여정(74)이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가 출연한 영화 '미나리'는 이번 시상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 미 아카데미상 시상식 레드카펫 밟는 배우 윤여정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리는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 배우 윤여정(74)이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윤여정은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가 출연한 영화 '미나리'는 이번 시상식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 EPA/연합뉴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아시아 영화인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윤여정은 아시아 영화의 약진과 할리우드의 다양성 확대에 대한 질문을 받자 '무지개의 일곱가지 색깔처럼, 여러가지 색깔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처럼 다양성은 올해에도 아카데미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미국의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가 '화이트 그래미'라는 오명으로 얼룩진 것처럼, 아카데미 역시 오랫동안 '백인 남성을 대변하는 잔치'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LA 타임스의 조사에 따르면 아카데미의 시상을 결정하는 AMPAS의 회원 중 백인은 91%, 남성은 76%였다. 특히 2015년, 2016년에는 남녀 주조연상 후보에서 유색 인종의 이름을 아예 찾아볼 수 없었고, 스파이크 리 감독 등의 인사들이 'Oscars So 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운동에 동참하며 항의했다. 그 다음 해 흑인 퀴어의 사랑을 다룬 <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연출)가 작품상을 수상했지만, 진정성에 대한 의심을 받았다. 이들은 수년에 걸쳐 여성 회원, 아시아 회원의 비율을 크게 늘렸고 지난 9월, 아카데미를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포용성'에 대한 네 가지 기준을 신설하면서 변화의 의지를 드러냈다.

아카데미는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상징하는 무대다. 그 무대에서 '쿠키를 만들 줄 모르는 한국 할머니',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붕괴를 그린 중국 여성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중국 바이러스'라는 말이 나왔고, 코로나 19 이후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는 가시화되었다. 그렇기에, 이 풍경의 무게는 더욱 크다. 누군가는 아카데미가 '로컬 잔치'라는 봉준호 감독의 발언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이 있다면, '미국적인 가치'에 대한 정의가 이렇게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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