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스포츠를 매우 좋아하는 나라다. 코로나19 이전엔 1년에 700만명이 넘는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고 4년에 한 번 월드컵 시즌이 되면 온 나라가 축구 열기로 물든다. 뿐만 아니라 인구가 5000만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반도국에서 4대 구기종목(야구, 축구, 농구, 배구)의 프로리그가 매우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한국은 하계 올림픽에서도 최근 3회 연속 10위 안에 랭크(금메달 우선 기준)될 정도로 스포츠 강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토록 스포츠를 좋아하는 나라인 대한민국에서도 유독 스포츠 영화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야구를 소재로 한 <글러브>가 180만, <퍼펙트게임>이 150만에 그쳤고 <슈퍼스타 감사용>과 야구 선수가 주인공인 멜로 영화 <아는 여자>는 100만 고지를 넘지 못했다. 축구를 소재로 했던 <맨발의 꿈>과 <교도소월드컵> 같은 영화는 성적을 이야기하기가 다소 민망할 정도다.

반면에 비인기 종목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의외의 히트작들이 꽤 많다. 스키점프를 소재로 한 <국가대표>가 800만 관객을 모았고 핸드볼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400만 관객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비인기종목을 소재로 만든 영화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또 한 편 있다. 바로 직장인 프로레슬러의 이야기를 다루며 서울에서만 78만 관객을 동원했던 대한민국 최고 흥행배우 송강호의 본격적인 주연 데뷔작 <반칙왕>이다.  
 
 <반칙왕>은 화려한 볼거리보다 레슬러들의 애환에 집중한 영화다.

<반칙왕>은 화려한 볼거리보다 레슬러들의 애환에 집중한 영화다. ⓒ 시네마서비스

 
<쉬리> 흑역사 날리고 '송강호 시대' 활짝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송강호는 1996년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같은 해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에서는 건달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1997년 <넘버3>의 불사파 두목 조필을 통해 전국에 '무대뽀 정신'과 '헝그리 정신' 열풍을 몰고 왔다.

김지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조용한 가족>에서 박인환-나문희 부부의 장남으로 능청스런 연기를 선보인 송강호는 1999년 <넘버3>에 함께 출연했던 한석규, 최민식과 함께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 <쉬리>에 캐스팅됐다. <쉬리>는 전국 620만 관객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거뒀지만 영화의 흥행과 별개로 송강호는 데뷔 후 처음으로 연기력 논란에 시달렸다. 생활 연기에 특화된 송강호에게 엘리트 요원 이장길은 '맞지 않는 옷'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송강호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던 김지운 감독은 송강호를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 <반칙왕>에 캐스팅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서 영화를 이끌어야 하는 단독 주연이었다. 하지만 송강호는 <반칙왕>에서 레슬링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소시민 연기를 멋지게 소화했고 관객들은 송강호의 연기를 의심했던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했다. 그리고 송강호는 <반칙왕>에 이어 <공동경비구역JSA>까지 히트시키며 최고의 흥행배우로 우뚝 섰다.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영화계는 송강호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봉준호 감독과 만난 <살인의 추억>과 <괴물>, <설국열차>는 평단과 관객 모두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상대적으로 흥행성적이 아쉬웠던 <우아한 세계>와 <밀양>, <박쥐> 등에서도 송강호의 연기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송강호는 4편의 천 만 영화(<괴물>, <변호인>,<택시운전사>,<기생충>)를 보유한 최고의 티켓파워를 가진 배우가 됐다.

지난 2019년 <기생충>을 통해 자신의 네 번째 천만 영화를 만든 송강호는 한재림 감독의 항공재난영화 <비상선언>과 여자 배구단 감독을 맡은 < 1승 >, 한일합작 영화 <브로커> 등에 출연할 예정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원톱배우' 송강호의 유일한 걸림돌은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한 극장가의 침체뿐이다.

'세상의 헤드록'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시민 레슬러
 
 임대호(왼쪽)는 복면을 쓰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지만 돌아온 것은 "술 마셨냐?"는 핀잔 뿐이었다.

임대호(왼쪽)는 복면을 쓰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지만 돌아온 것은 "술 마셨냐?"는 핀잔 뿐이었다. ⓒ 시네마서비스

 
아침 잠이 많아서인지 동작이 느려서인지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는 은행직원 임대호(송강호 분)는 언제나 부지점장(송영창 분)의 헤드록에 시달린다. 대호는 우연히 찾은 프로레슬링 체육관에서 헤드록 푸는 방법을 배우려 하지만 관장(장항선 분)은 냉정하게 대호를 돌려 보낸다. 그리고 그날 밤 대호는 부지점장에게 헤드록을 당하는 악몽을 꾼다(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친구는 "무조건 다리를 쭉 뻗어서 팍 차라"는 도움 안 되는 조언만 한다).

관장은 체육관 존립을 위해 반칙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 현실에서 대호의 입부를 허락한다. 하지만 관장에게 화려한 기술을 배울 거라는 기대와 달리 민영(고 장진영 분)은 대호에게 기초적인 체력 훈련만 시킨다. 아쉬운 대로 도장 선배 태백산(박상면 분)에게 코브라트위스트를 배우지만 태백산은 기술을 가르치다가 역으로 자신이 기술에 걸려 버린다.

대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훈련에 열중한 끝에 팀 동료인 오대산(이원종 분)을 상대로 데뷔전을 치른다. 마스크를 쓰고 자신감을 찾은 대호는 동네 깡패들을 혼내주고 짝사랑하던 직장동료(김가연 분)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는 고백을 받아주긴커녕 대호가 술에 취한 줄로 착각하고 만다. 평소 부지점장에게 시달리던 자신을 위로해주던 친구 두식(정웅인 분)마저 회사를 그만둔다.

대호는 유비호(김수로 분)의 일본 진출 전초전으로 치러진 경기에서 메인이벤트 태그매치에 참가한다. 당초 신호가 떨어지면 유비호의 기술을 맞고 패하는 각본이었지만 대호는 각본을 어기며 경기를 이어갔고 이에 흥분한 유비호는 대호의 복면을 벗긴다. 이후 경기는 난장판이 되고 대호와 유비호는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수플렉스를 주고받으며 더블KO를 당한다. 비록 승리는 못했지만 대호는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성취감을 얻었다.

<반칙왕>은 평범한 은행 직원이 프로레슬러가 된다는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놀랍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은행직원 출신 레슬러 백종호 선수가 그 주인공으로 그는 영화 속 임대호처럼 실제로 은행에 다니면서 레슬링을 연마했다. 전설적인 레슬러 고 김일 선생의 제자였던 백종호 선수는 27년 동안 100전이 넘는 경기를 치르다가 지난 2004년 현역에서 은퇴했다(실제 그의 링네임은 '반칙왕'이 아닌 '외로운 늑대'였다).

단 30분 출연으로 엄청난 존재감 뽐낸 김수로
 
 김수로(왼쪽)와 송강호는 <박칙왕>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레슬링 기술들을 대역 없이 소화했다.

김수로(왼쪽)와 송강호는 <박칙왕>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레슬링 기술들을 대역 없이 소화했다. ⓒ 시네마서비스

 
혹자들은 프로레슬링을 스포츠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프로레슬링을 평가절하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각본' 때문이다. 정해진 합에 따라 경기를 운영하고 경기에 들어갈 때 이미 승패가 정해진 프로 레슬링은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스포츠의 기본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종목이다. 하지만 그들이 링 위에서 구사하는 위험천만한 기술들은 모두 '진짜'이기 때문에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절대 따라해선 안 된다.

<반칙왕>에서는 그런 프로레슬러들의 애환이 잘 담겨 있다. 특히 링 위에서 진짜 포크를 들고 원수처럼 싸우던 대호와 오대산이 경기가 끝난 후 대기실에서 약을 발라주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장면에서는 레슬러들의 우정과 애환을 느낄 수 있다. 레슬러로 변신한 배우들부터 노지심, 안재홍 등 실제 프로레슬러까지 출연하는 영화 <반칙왕>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캐릭터는 역시 유비호 역의 김수로였다.

전체 러닝타임 112분 중 후반 30분에만 짧게 등장하고 대사보다 고함 소리가 더 많을 정도로 역할은 작지만 유비호는 실제 레슬러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기술로 '최종보스'의 위용을 마음껏 뽐냈다. 실제로 김수로는 유비호가 극중에서 구사하는 하이 크로스바디, 백 수플렉스, 스피닝 힐킥, 파워밤, 슈팅스타 프레스(물론 이건 와이어를 사용했겠지만) 등 WWE에서나 볼 법한 고난이도의 기술들을 다채롭게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김수로는 이 기술들을 연마하기 위해 하루에 10시간씩 프로레슬링 훈련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는 <반칙왕>의 유비호 캐릭터로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후 2001년 판타지 학원 액션물 <화산고>와 패러디 영화 <재밌는 영화>에 연이어 캐스팅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더욱 넓혔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반칙왕 송강호 김지운 감독 김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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