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수입되는 영화들이 원제목 그대로 개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과거에는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또는 외래어 표기를 자제하는 국가 정책에 따라 외화의 제목을 우리말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분노의 역류>나 <사랑과 영혼>같은 기가 막힌 우리말 제목들이 탄생하기도 했다(만약 이 영화들이 원제를 직역해 <역류>, <유령> 같은 밋밋한 제목으로 개봉했다면 지금과 같은 명작으로 기억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제목을 바꾸다 보니 웃지 못할 일들도 발생했다. 1993년에 수입된 영화 < Boxing Helena >는 한국에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라는 완전히 다른 제목으로 개봉됐다. 그런데 이듬해 맥 라이언 주연의 < When A Man Loves A Woman >이라는 영화가 수입됐고 국내에서는 <남자가 사랑할 때>로 목적어가 빠채 개봉됐다. 결국 <남자가 사랑할 때>는 맥 라이언의 전성기 시절 영화였음에도 서울 관객 14만 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반면에 의도치 않게 명제목으로 재탄생한 영화도 있다. 1993년 개봉한 빌 머레이 주연의 < Groundhog Day >는 사실 <성촉절(아기예수가 태어난 지 40일째 되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면 큰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브라질에서의 개봉명이 < The Black Hole of Love >였고 한국에서도 이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으로 개봉돼 오늘날까지도 많은 관객들에게 '루프물(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SF의 하위 장르)의 원조'로 기억되고 있다.
 
 <사랑의 블랙홀>은 빌 머레이가 코미디 이외의 장르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었다.

<사랑의 블랙홀>은 빌 머레이가 코미디 이외의 장르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었다. ⓒ 콜럼비아트라이스타(주)

 
코미디 배우는 연기를 못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자

1950년생으로 어느덧 칠순을 넘긴 노장 배우 빌 머레이는 코미디 배우의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로 머레이는 4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코미디쇼 SNL의 초대 멤버이기도 했고 배우로서 그의 첫 성공작 <고스트 버스터즈> 역시 SF와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코미디 영화였다. 이후에도 머레이는 <스크루지>, <고스트 버스터즈2>, <밥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등에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코미디 배우의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다.

그런 머레이에게 1993년에 개봉한 판타지 로맨스 <사랑의 블랙홀>은 연기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작품이다. 머레이는 <사랑의 블랙홀>에서 2월 2일이 반복되는 초현실적 경험을 하는 기상캐스터 필 코너를 연기했다. 특유의 코믹 요소는 물론이고 의외의 멜로 감성까지 뽐내며 열연을 펼친 머레이는 <사랑의 블랙홀>을 통해 완전한 코미디 장르의 영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증명했다.

웨스 앤더슨 감독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빌 머레이는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부터 <다즐링 주식회사>, <판타스틱 Mr.폭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앤더슨 감독이 연출한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했다. 2004년에는 머레이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골든글러브, 영국 아카데미, 전미 비평가 협회, 미국 배우 조합상 남우 주연상을 휩쓸었다(하지만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미스틱 리버>의 숀 펜이 수상했다).

좋은 작품이라면 주연과 조연, 심지어 단역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유쾌한 노배우 빌 머레이는 코미디언 출신 배우의 편견을 깨준 대표적인 인물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머레이는 2016년 <아이언맨>의 존 파브로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정글북>과 <코스트 버스터즈> 리부트에도 출연했다. 2019년에 개봉한 <좀비랜드: 더블 탭>에서는 전편에 이어 빌 머레이 본인을 연기하며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매일매일 같은 날이 반복된다면 과연 행복할까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에서 주인공 필은 아주 다양한 경험을 한다.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에서 주인공 필은 아주 다양한 경험을 한다. ⓒ 콜럼비아트라이스타(주)

 
노련한 기상캐스터 필(빌 머레이 분)은 매년 성촉절마다 반복되는 자신의 고향인 시골마을 출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진부한 성촉절 축제 리포팅을 마친 필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작은 마을을 벗어나고 싶지만 갑자기 내린 폭설로 인해 호텔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6시가 되자 또 다시 성촉절 아침이 반복되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사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판타지 로맨틱코미디 장르인 만큼 자세한 설명 없이 얼렁뚱땅 넘어간다).

필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처한 황당한 상황을 설명하지만 시간이 반복되는 사람은 필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믿어주지 않는다. 처음엔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필은 곧 '오늘만 사는 놈'의 장점을 깨닫게 된다. 도로를 폭주하다가 경찰에 검거돼 유치장에 갇혀도 아침 6시가 되면 성축절 축제가 열리는 마을의 호텔에서 눈을 뜬다는 걸 깨달은 순간 필에게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

필은 자신의 반복되는 하루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되고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한다. 여기에 매일매일 피아노 교습을 받으면서 엄청난 피아노 실력까지 갖추게 된다. 그리고 필이 리타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한 다음 날 필은 리타와 함께 역사적인 '2월 3일'을 맞는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오늘이 바로 내일이야"라는 필의 평범한 대사가 왜 <사랑의 블랙홀> 최고의 명대사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사랑의 블랙홀>을 연출한 해롤드 래미스 감독은 사실 감독보다는 각본가 겸 배우로 더 유명하다. 머레이의 출세작인 <고스트 버스터즈>의 각본에 참여하며 팀의 참모격인 이곤 스펭글러를 연기한 래미스 감독은 <러브 어페어>,<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감독으로는 <사랑의 블랙홀> 이후 2000년 로버트 드니로,빌리 크리스탈 주연의 <애널라이즈 디스>를 연출하며 호평을 받았다.

보험 설계사를 하는 동창을 매일매일 만난다면?
 
 필은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서 보험설계사가 된 옛 친구를 매일 만난다.

필은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서 보험설계사가 된 옛 친구를 매일 만난다. ⓒ 콜럼비아트라이스타(주)

 
오랜 시간 연락이 되지 않았던 친구에게 갑자기 연락이 와 필요 이상으로 친한 척을 한다면 크게 두 가지 경우를 의심해야 한다. 그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혹은 보험 설계사 일을 시작했을 경우다. 오랜만에 연락이 와 갑자기 청첩장을 내미는 친구도 대단히 얄밉지만 옛 친구들과 함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라도 있다. 하지만 나를 친구가 아닌 '호갱님'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보험설계사 친구는 그 느낌이 또 다르다.

그런 친구는 마치 내가 빨리 보험을 들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커다란 사고를 당할 것처럼, 그리고 당장 보험 가입서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마저 불행해질 것처럼 저주(?)를 퍼붓는다. 물론 얼마나 절박하면 그럴까도 싶지만 그런 친구를 위해 보험을 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사랑의 블랙홀>의 필에게는 매일 아침마다 만나는 고교 동창 네드 라이어슨이 이 조건에 완벽히 부합하는 친구였다.

네드는 필이 취재 현장으로 가는 길에 매일 아침 나타나 보험 가입을 권유한다. 가뜩이나 고향 마을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반갑지 않은 보험 설계사 동창을 매일 만난다는 것은 필에게 상당한 고역이다(참다 못한 필은 4일째 되는 날 네드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성촉절을 반복하며 마음이 착해진 필은 네드를 위해 모든 보험에 가입하며 네드에게 '생애 최고의 날'을 선물한다.

얄미운 연기로 <사랑의 블랙홀>에서 만만치 않은 존재감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네드 역의 스티븐 토보로스키는 동유럽 느낌의 이름을 가진 미국 텍사스 출신의 배우다.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은 많지 않지만 <델마와 루이스>와 <원초적 본능>, <메멘토>, <시간 여행자의 아내> 등 다수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빌 머레이와는 2004년 <가필드>를 통해 11년 만에 재회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사랑의 블랙홀 빌 머레이 해롤드 래미스 감독 앤디 맥도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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