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파이의 아내> 메인포스터

영화 <스파이의 아내> 메인포스터 ⓒ 엠앤엠 인터내셔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1940년, 고베의 한 명주실 검사소에서 명주실을 매입하러 왔던 한 영국 상인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끌려 나간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외쳐보지만 각진 제복만큼이나 단호한 태도로 그를 압송하는 헌병대.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 분)는 한 달 전 그 헌병대로 전근 온 분대장이다. 그는 상인을 심문한 끝에 실마리를 찾은 듯, 후쿠하라 물산을 운영하고 있는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 분)를 찾아간다. 유사쿠의 아내인 사토코(아오이 유우 분)와 어릴 적 친구 사이인 타이지는 예의 인사를 건네는 듯 하면서도 그 상인이 스파이라고 넌지시 운을 띄운다. 단호하게 그럴 리 없다는 태도의 유사쿠는 두 사람이 그저 친한 친구라고 대답한다.

한편, 사토코는 남편을 도와 회사의 일을 돕고 있는 그의 조카 후미오(반도 료타 분)와 영상을 하나 촬영 중이다. 장난스럽게 찍은 이 영상으로 작은 상영회까지 열고 파티를 즐기는 그녀와 친구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940년을 생각하면 매우 평화로운 일상이다. 국가에서는 전 국민에게 유카타를 입으라는 명령까지 내리지만 이처럼 부유한 무역상인 유사쿠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사업을 핑계로 조카와 함께 만주까지 방문할 계획까지 세운다.

당시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은 세균 무기를 활용해 생체 실험을 자행하고 있었고, 만주를 방문한 유사쿠와 후미오는 이 만행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이 사실을 해외에 알리고자 결심하고, 정보를 제공한 여성과 함께 귀국한다.

02.
일본의 대표적인 거장 중 하나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 <스파이의 아내>는 연합국의 스파이가 되려는 남편의 계획을 알게 된 한 여인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의 결심을 따르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독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전운이 감도는 시기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한 여인의 사랑을 밀어 넣는다.

1983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그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현대인들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헤쳐 온 인물이다. 다소 극단에 치우치는 모더니즘적 성향이 대중성과는 거리가 생길 수 밖에 없도록 했지만, 자신만의 상상력을 기괴한 표현력으로 재현해내는 능력만큼은 모두에게 인정 받았다.

그 동안의 작품들이 호러, 스릴러 장르에 치우쳐 있었던 것과 달리 이번 작품 <스파이의 아내>는 시대극을 바탕으로 멜로드라마를 덧입힌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 특유의 서스펜스와 절제된 편집은 되려, 진의를 놓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의심과 불안 속에서 더욱 빛난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 엠앤엠 인터내셔널


03.
영화는 초반부터 잔잔하지만 탄탄하고 밀도 있게 스토리를 쌓아 올린다. 유사쿠 부부 내외가 무역업으로 축적한 부를 통해 전쟁을 앞둔 국가의 명령도 일부 흘려 들을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 첫 번째다. 남편인 유사쿠가 취미 생활로 영화를 찍고 그 작품에 아내인 사토코가 출연할 수 있을 정도, 또 그 영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상영회를 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여유다.

이들 가족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물리적 여유는 전쟁을 앞둔 시기에 영화 속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 바탕이라 할 수 있다. 사토코가 아무런 걱정없이 남편만 바라보며 지낼 수 있는 이유이자, 무역 사업 차라는 명목을 빌미로 유사쿠가 만주로 향할 수 있는 이유다. 이후, 심증은 가지만 정확한 물증없이 유사쿠를 어찌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파생된다. 남편 유사쿠가 세상의 전부인 사토코의 이야기와, 유사쿠가 나아가려는 더 큰 세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두 사람을 예의주시하는 타이지의 이야기까지.

04.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은 역시 사토코다. 남편인 유사쿠가 사건을 전개시켜 나가는 역할을 한다면, 사토코는 그 흐름 속에서 운전대를 잡고 흐름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외면적으로만 보면, 그녀는 수동적이기만 한 인물이다. 시대의 상황에 따라 바깥에서 사업하는 남편을 내조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그 시절의 표본과도 같다. 심리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남편의 곁에 함께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크게 전환된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처음 두 번, 헌병대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바뀌는 복장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그녀가 처음 헌병대를 방문하게 되는 일은 유사쿠가 만주에서 돌아오면서 함께 온 히로코(현리 분)라는 여자가 타치바나 여관에서 사망한 사건으로 타이지가 호출하면서다. 그는 유사쿠와 히로코의 관계를 심문하면서 당국이 사토코의 가족을 지켜보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때 히로코의 복장은 양복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국가가 기모노 제한령을 선언했다는 것을 히로코가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전의 장면에서 타이지가 사토코의 저택 내부를 둘러보며 모두가 서양식인 것이 국가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며 경고했다는 점이다. 사토코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복장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녀의 남편 유사쿠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헌병대를 방문할 때는 복장이 바뀌게 된다. 기모노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남편의 행적에 대한 의심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 이후였고, 유사쿠가 가진 진실에 대해 모두 알게 된 이후다. 무엇보다도 타이지의 호출로 헌병대를 찾았던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직접 방문했다. 손에는 남편이 세상에 폭로하려고 했던 만주 관동군의 진실이 담긴 책과 필름을 들고 말이다. 이번에도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복장에는 어떤 다짐이 담겨 있는 셈이다. 자신의 남편을 반드시 지켜내고 말겠다는 종류의 다짐.

이 두 장면을 기점으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토코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느냐 취하지 않느냐의 여부에 따라서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 엠앤엠 인터내셔널


05.
영화의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면, 공식적으로 알려진 시놉시스나 소개글에서는 유사쿠가 '사업 차 만주를 찾았다가 만행의 현장을 목격하고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정황 상, 유사쿠는 그 이전부터 연합국의 스파이가 되고자, 혹은 이미 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이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 자가 아니라, 만국 공통의 정의에 선언한 코스모 폴리탄이라는 것의 시작점에 대한 이야기다.

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후반부의 내용에서 중요하게 활용되는 영상이다. 정황상, 만주로 떠나기 전부터 유사쿠가 만주에서 촬영해서 돌아올 어떤 충격적인 자료, 즉 국가를 자극할 수 있을 만큼 보안과 직결될 자료를 감추기 위해 아내 사토코를 이용한 것이라고 봐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굳이 벌금 200엔까지 내가며 풀어줬던 영국 상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결국, 그 대목에서 했던 사토코의 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당신은 항상 저보다 멀리 바라보니, 제가 바보 같아서 싫네요.'

진실을 알고 싶다며 찾아온 사토코에게 아내의 안온함을 지키기 위해 남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며 악을 지르던 후미오의 모습도, 이제 자신에 대해 잘 모르겠으니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는 아내에게 거짓말은 할 수 없으니 침묵하는 것이라 묻지 말아달라고 말하던 유사쿠의 모습도 모두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한 가지, 모든 사실을 알고 제 발로 헌병대에까지 찾아가던 사토코의 모습에는 유사쿠도 조금 놀랐을 법하다. 그래서 하나의 함정을 더 파고, 그녀를 이 일 깊숙하게 끌어들인다.

06.
'상관없어요. 당신이 스파이라면 나는 스파이의 아내가 될게요.'

그런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어쨌거나 과거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스파이의 아내로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여인의 삶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남편 유사쿠가 어떤 대의를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사토코는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없어 자신의 인생마저 함께 내던지고 만 것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선택에 대한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은 남편이 자신에게 남기고 간 필름 한 통으로 모두 설명된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의 생이 끝나느냐 아니냐, 자신이 헌병에게 발각되느냐 아니냐가 아닌, 남편이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 갈 마음이 있었을까? 하는 의심. 처음, 그가 숨겼던 사실에 대한 의심이 싹텄을 때와 유사한 상황이다. 그의 사랑이 그 곳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더 이상 그와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절망.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영화 <스파이의 아내> 스틸컷 ⓒ 엠앤엠 인터내셔널

 
꿈에서 깨어난 그녀 앞에는 이제 전쟁의 패망만이 남은 국가의 잔혹한 현실 밖에 남지 않았다. 혼자서는 한번도 감당해 보지 않은 어두운 현실 앞에 사토코는 어두운 해변을 미친듯이 달리고 바다를 향해 절규를 내뱉는다. 시대가 감추려고 했던 사실과 그 사실을 폭로하고자 했던 이들 사이에서 순진한 마음 하나로 애처롭게 버티고 서 있던 한 여인의 마지막 모습이다.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다고 말했던 날, 차라리 남편의 수족을 모두 끊어서라도 그 계획을 주저앉혔더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글쎄, 그 일조차 어떻게 되었을 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 그녀의 지금 모습만큼이나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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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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