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국민드라마 <대장금>에서 수라간 최고상궁 정상궁(고 여운계 분)에게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한 것이온데 왜 홍시 맛이 나냐고 물으시면…"이라고 해맑게 이야기하던 어린 장금이의 총명함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당시 어린 금영 역의 이세영 등 다른 아역배우들에 비해 경력이 길지 않았던 조정은은 <대장금>에서의 야무진 연기를 통해 아역배우의 위상을 한껏 끌어 올렸다. 

최근엔 아역배우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아역배우의 쌍두마차로 활동했던 김유정과 김소현은 이제 성인배우로 드라마나 영화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성장했다. 김향기는 지난 2019년 <증인>으로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과 한국평론가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 < 7번방의 선물 > 갈소원, <왔다, 장보리>의 김지영, <소원> <반도> <안녕?나야!>의 이레 등이 있으니 대한민국 아역계의 미래는 무척 밝다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도 셜리 템플, 주디 갈랜드, 조디 포스터, 드류 베리모어, 커스틴 던스트, 앨런 페이지, 맥켄지 포이 등 인상적인 아역배우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깊이 박혀 있는 할리우드 아역배우는 아마 따로 있을 것이다. 빨려 들어갈 거 같은 깊은 눈망울과 귀여우면서도 슬픈 목소리로 줄기차게 "대디~"를 찾던 영화 <아이 엠 샘>의 다코타 패닝이 그 주인공이다. 
 
 22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아이 엠 샘>은 세계적으로 970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22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아이 엠 샘>은 세계적으로 970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강렬한 존재감 과시한 다코타패닝

잉글랜드계 미국인으로 1994년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다코타 패닝은 5살 때 수천대일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광고모델로 발탁됐다. 그리고 6살 때 의학드라마 < ER >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다코타 패닝이 출연했던 < CSI 과학수사대 시즌1 >에서는 패닝이 출연한 에피소드가 시리즈 전체에서 베스트 에피소드에 선정될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북미에서는 2001년 연말, 국내에서는 2002년 10월에 개봉한 영화 <아이 엠 샘>은 다코타 패닝이 본격적으로 세계 관객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작품이다. 정신질환으로 지능이 7살에 멈춘 아빠 샘(숀 펜 분)과 어른스러우면서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 루시(다코타 패닝 분)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룬 <아이 엠 샘>은 세계적으로 1억 달러에 가까운 흥행성적을 올렸다.

숀 펜은 <아이 엠 샘>을 통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또 한 명의 아카데미 수상자 미셀 파이퍼가 샘의 변호사 리타로 출연하지만 영화 <아이 엠 샘>의 최고 수혜자는 단연 다코타 패닝이었다. 패닝은 <아이 엠 샘>을 통해 전미영화 비평가협회와 라스베거스 영화 비평가협회 아역상, 새틀라이드 어워드 신인탤런트상, 영 아티스트 어워드 최우수 연기상을 휩쓸며 최고의 아역 배우로 떠올랐다.

이후 다코타 패닝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거장들과 함께 영화를 찍으며 성장했다. <맨 온 파이어>에서는 덴젤 워싱턴, <숨바꼭질>에서는 로버트 드니로, <우주전쟁>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그리고 톰 크루즈와 함께 작업했다. 그리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편에 걸쳐 개봉해 세계적으로 무려 33억41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트와일라잇>시리즈에서 볼투리가의 뱀파이어 제인 역으로 연기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스케일이 큰 영화뿐 아니라 실험적인 저 예산 영화 출연도 마다하지 않는 다코타 패닝은 사실 <트와일라잇> 시리즈 이후로는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다(사실 <트와일라잇>에서도 분량이 많지 않은 조연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며 착실히 자신의 경력을 넓히고 있는 다코타 패닝은 지난 2019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대통령 암살미수범 스퀴키 프롬을 연기하기도 했다.

아빠보다 똑똑해지는 걸 원치 않았던 루시
 
 샘의 친구들은 샘 못지 않게 루시를 친딸처럼 아낀다.

샘의 친구들은 샘 못지 않게 루시를 친딸처럼 아낀다. ⓒ 브에나비스타 코리아

 
7살 지능을 가진 정신 질환 장애인 샘은 집 없는 여성 노숙인이었던 레베카를 재워 주다가 딸 루시를 얻게 된다. 하지만 비정한 엄마 레베카는 샘과 루시를 버스 정류장에 버려두고 도망간다. 그 때부터 자신의 몸도 돌보기 힘든 아빠 샘의 '갓난아이 키우기 대작전'이 시작된다.

샘이 별 탈 없이 루시를 바른 아이로 키울 수 있었던 비결은 조금 부족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요일엔 같은 식당에서 팬케이크를 먹어야 하고 목요일엔 샘의 집에서 비디오 감상, 금요일엔 노래방엘 가야 하는 샘과 친구들은 루시의 신발을 고를 때도 함께 간다. 다 같이 돈을 모아 신발값을 계산하고 사은품으로 주는 풍선을 들고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에서는 루시를 친딸처럼 아끼는 친구들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샘이 우연히 경찰서에 가게 되면서 자신보다 똑똑한 딸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영특한 루시는 자신이 아빠보다 똑똑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시의 생일날, 깜짝파티를 하던 중 친구의 거짓말로 루시는 아빠와 떨어져 아동 복지과의 양육시설에 맡겨진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샘은 변호사 리타(미셀 파이퍼 분)를 찾아가고 자존심이 강한 리타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 샘의 무료 변론을 자청한다.

샘은 딱딱하다 못해 살벌한 법정에서도 증인 심문 도중 9살 지능의 어머니 밑에서 의사로 자란 증인을 안아주며 그녀의 바른 성장을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처음엔 샘을 귀찮아 하던 리타도 샘의 순수한 마음에 점점 동화되고 바람 난 남편과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아들에 대해 고백하며 샘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는다(물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식의 아침드라마 같은 막장 전개는 없다).

샘과 루시가 눈물이 뒤범벅된 감격적인 재회를 하면서 끝날 것 같았던 영화는 의외로 루시의 장난스런 축구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샘이 심판을 보고 샘의 친구들과 루시의 양부모, 그리고 리타와 그녀의 아들이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전하고 샘은 골을 넣은 루시를 안고 운동장을 질주한다.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장 일상적인 곳에 있다는 사실. 영화 <아이 엠 샘>이 132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들에게 가르쳐 준 당연한 진실이다.

루시의 행복을 바라는 착한 새엄마 랜디
 
 서로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샘과 루시는 그저 함께 살 수 있기만을 바랐다.

서로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샘과 루시는 그저 함께 살 수 있기만을 바랐다. ⓒ 브에나비스타 코리아

 
<아이 엠 샘>처럼 양육권을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양부모 역할을 하는 캐릭터는 주인공과 적대관계에 있는 악역의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가끔은 심한 구타나 학대를 통해 주인공의 분노를 사는 경우도 있다. <아이 엠 샘>에 등장하는 루시의 양어머니 랜디(로라 던 분)도 처음엔 전형적인 악역 양부모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랜디는 루시가 보고 싶어 방문 스케줄을 어기고 수시로 집에 찾아오는 샘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지만 냉정해 보이는 양부모 랜디 역시 루시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성이었다. 특히 루시가 자신이 꾸민 방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고 샘의 집으로 들락거리는 걸 보고는 루시를 안고 샘에게 찾아가 그동안 냉정하게 대한 것을 사과한다. 그리고 루시에게 언제나 엄마가 있길 원했다는 샘의 고백을 듣고 눈물을 글썽인다. 영화에 재판 결과는 나오지 않지만 루시를 위한 샘과 랜디의 마음은 서로 같았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양어머니 랜디를 연기한 로라 던은 다코타 패닝과 같은 아역배우 출신으로 <블루 벨벳>과 <광란의 사랑>, <넝쿨장미>, <저공비행> 등에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배우다. 2012년에는 기획, 각본, 주연을 맡은 드라마 <인라이튼드>를 통해 골든글러브 시상식 TV시리즈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로라 던은 <쥬라기 공원>과 <스타워즈:라스트제다이>처럼 스케일이 큰 영화에도 출연한 바 있다. 

<아이 엠 샘>에는 아기 루시 역으로 다코타 패닝의 친동생 엘 패닝이 출연했다. 엘 패닝은 <아이 엠 샘> 후에도 드라마 <테이큰(리암 니슨이 인신매매범을 학살하는 영화와는 제목만 같다)>에서도 언니의 아역으로 출연했고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언니와 함께 더빙에 참여했다. 2010년대 들어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말레퍼센트> 등에 출연하며 독자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엘 패닝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아이 앰 샘 다코타 패닝 숀 펜 미셸 파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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