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 스틸컷

영화 <미나리> 스틸컷 ⓒ 판씨네마(주)

 
매주 토요일 장을 본다. 근처의 생협에서 달걀 한 줄과 도시락 반찬으로 쓸 소시지를 두 개 사면 혼자 사는 일주일의 먹거리로는 부족할 것이 없다. 욕심을 내서 채소를 사들여봤자 제때 먹지 못해서 버리는 경우가 많았으니, 평소라면 멈추지 않고 지나쳐야 하는 선반인데 오늘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냉기가 흐르는 야채 코너에는 제철이라며 멋들어지게 자라난 풍성한 미나리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언뜻 보아도 혼자서 먹기는 어려운 양이었지만 욕심을 냈다.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나는 지금 영화 <미나리> 후유증을 앓는 중이다. 

2020년 한 해 동안 팬들을 궁금하게 했던 <미나리>가 드디어 개봉했다. 미국의 유명한 독립영화 제작사인 플랜 B를 통해 제작된 <미나리>는 한국의 배우들이 여럿 등장하고, 대부분의 대사가 한국어로 진행되지만 엄연히 '미국 영화'이다.

나는 <미나리>를 두 번 보았다. 처음은 한국 영화로 두 번째는 미국 영화로의 관람이었다. 한국 영화로는 실망스럽고 전형적이었던 이야기를, 새로운 세계에 힘들게 정착해야 했던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읽으니 전혀 새로워졌다.

게다가, 두 번째의 관람은 포항의 영화모임인 '영화로 세상읽기'의 친구들과 함께였으니,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 더 풍성해졌다. 오늘은 그 날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옮겨보려 한다.  

전 세계 관객들이 안쓰러웠던 까닭
 
 영화 <미나리> 스틸컷

영화 <미나리> 스틸컷 ⓒ 판씨네마(주)

 
"윤여정 배우의 연기가 좋았던 거 맞아요?"

역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은 윤여정 배우의 연기였다. 나의 첫 번째 관람을 방해했던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는 연기는, 그녀가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인상적인 연기를 알고 있던 우리에겐 밋밋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그녀가 보여준 '순자'는 충분히 새로웠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여전히 그녀의 최고의 연기를 보지 못한 전 세계의 관객들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고생담 아닌가요?"

우리의 역사에는 이미 익숙한 가족의 이야기라서, 이것을 한국의 영화로 본다면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낯선 환경에 던져진 이민자로써 감당해야 했던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이야기는 새로워진다.

가장 한국적인 고난이, 이미 세계적으로도 받아들여지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현실이 놀랍지만, 인정해야 할 모양이다. 작년 이맘때 아카데미의 선택이 <기생충>이었던 것은 그저 일회성의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적인 이야기에 대한 자부심이어도 좋겠다는 중요한 상징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것이 더이상 변방의 컬트가 아닌, 모두가 인정하는 서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겠다, 놀랍지만! 
 
"폴에게 십자가의 고난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미나리>의 상황을 온전하게 미국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 인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윌 패튼이 연기한 폴이었다. 내쫓긴 청교도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인 미국에서 그들을 지탱한 것은 종교에 대한 신념이었고, 절실함 만큼이나 다양하게 변주된 신에 대한 태도는 미국이라는 신세계의 상징이었다.

폴은 제이콥네 가족이 터를 내린 땅에서 악몽을 보았고, 악몽을 쫓아내는 그만의 의식으로 제이콥네 가족을 받아들인다. 모두가 같이 이민자로써 출발한 땅에 찾아온 새로운 이민자를 대하는 그만의 방식이, 결국은 이민자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나리를 좋아하지 않아서인가, 그것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미나리는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식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영화를 같이 보았던 일행 중에서도 미나리의 생태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서,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얘기를 하시는 분도 있으셨다. 우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존재를 미국의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가 궁금해지면서, 이 영화는 한국의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이야기라는 것이 분명하게 다가왔다. 우리에게는 미나리였지만, 이탈리아의 이민자에겐 토마토였을지도, 아일랜드 이민자에겐 감자였을지도 모르는 상징은 분명히 미나리를 넘어선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다
 
 미나리

미나리 ⓒ 판씨네마

 
"감별되어야 했던 병아리들과 미나리를 통해 담아낸 우리네 삶의 모습이 좋았네요."

제이콥은 병아리 감별을 하며, '쓸모없는' 수평아리들을 소각로로 보낸다. 태어나자마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수평아리에 자신을 대입하며, 아들인 데이빗에게는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영화의 존재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좋은 곳'에 뿌리를 내린다. 할머니가 가져온 미나리가 드러난 위협이 더 이상 위험이 되지 않는 땅에서, 안전하게 뿌리를 내렸던 것처럼 말이다. 

"매우 전형적인 한국인 아버지의 모습을 미국인 배우가 연기한다는 게 신선했을까요?"

이번 아카데미에서 <미나리>는 배우 부분에서 두 개나 후보로 지명되었고, 제이콥을 연기한 스티븐 연은 아시아계로서는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가 되었다. 제이콥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제대로 세우려던 수많은 한국의 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것을 연기한 스티븐 연은 정작 미국인이다. 제이콥을 통해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던 것처럼, 그가 연기한 '보통의 한국 아버지'가 세계인들에게도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분 좋다. 

"결국은 살아남은 미나리가 그들에게 희망이었겠죠?"

할머니가 뿌려놓은 씨앗은 풍성하게 자라났다. 가끔 뱀이 지나갔을지도 모르고 몇 번이나 토네이도가 휩쓸었을 수도 있겠지만, 먹음직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를 한 채 커갔다. 할머니의 유산은 가족에게 전해졌고, 할머니 같지 않다며 외면하던 손자는 오랫동안 할머니가 가르쳐 준 것들을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영화를 함께 본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준 희망의 엔딩이라고 읽었다.

미국 이민 2세대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5살에 이민을 갔던 주연배우의 노력으로 영화화되었고, 아카데미 레이스를 통해 70년이 넘게 연기를 해 온 노배우가 얻어낸 성취는 감동적이다. <미나리>는 이번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하여 여섯 개 부분에 후보로 지명되었다. <기생충>의 성취가 일회성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까지 <미나리>가 보여준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이 되었지만, 4월의 시상식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련다.

풍성하게 한 단을 사들였던 미나리는, 우선 반을 덜어내어 전을 부쳤다. 기름을 가득 두른 팬에 올린 미나리는 향긋하게 익었고, 입안 가득 새로운 봄과 희망을 가져왔다. 제철의 미나리는 향이 진한 만큼이나, 부드럽고 아삭하다.

영화의 잔향이 진하게 남은 분들은, 얼른 미나리 전을 부쳐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향긋한 미나리 전 장을 보러 갔다가, 욕심을 내어 미나리 한 단을 사들였습니다. 물에 슥슥 씻어서 듬성듬성 썰어서는, 기름에 전을 부쳤어요. 정말 맛이 좋네요. 영화 <미나리>의 감동을 이렇게 달래보는 것은 어떨까요?

▲ 향긋한 미나리 전 장을 보러 갔다가, 욕심을 내어 미나리 한 단을 사들였습니다. 물에 슥슥 씻어서 듬성듬성 썰어서는, 기름에 전을 부쳤어요. 정말 맛이 좋네요. 영화 <미나리>의 감동을 이렇게 달래보는 것은 어떨까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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