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사극 <달이 뜨는 강> 최근 방영분은 공주(김소현 분)가 결혼 문제로 평강태왕(김법래 분)과 갈등을 빚는 장면을 보여줬다. 평강태왕은 허울뿐인 부마 선발대회를 통해 계루부 귀족인 고건(이지훈 분)을 사위로 맞아하려 했다.
 
하지만, 공주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온달과 이미 결혼했다며 국혼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공주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대신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KBS2 사극 <달이 뜨는 강> 한 장면.

KBS2 사극 <달이 뜨는 강> 한 장면. ⓒ KBS2

  
 KBS2 사극 <달이 뜨는 강> 한 장면.

KBS2 사극 <달이 뜨는 강> 한 장면. ⓒ KBS2

 
한편, 온달(나인우 분)은 허위 신분을 만들어 부마대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고건의 폭로로 정체가 밝혀졌고, 그때 마침 자신과의 결혼을 선언한 공주와 함께 궁을 나가 산골 집으로 돌아갔다. 공주와 온달은 '결혼한 척만 하자'고 약속한 채 산골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에 따르면, 16세 된 공주는 자신을 귀족 가문에 시집보내려 하는 아버지에 맞서 자기 의지를 피력했다.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하셔놓고 이제 와서 식언을 하시느냐'며 태왕에게 대들었다.
 
이 때문에 궁에서 쫓겨난 공주는 귀금속 수십 개를 팔목에 차고 생면부지의 온달 집으로 찾아간다. 그런 뒤 온달 모자를 설득해 그 집에서 살게 된다. <달이 뜨는 강>에서 보여준 위의 장면들은 공주가 결혼 문제로 쫓겨난 뒤 온달을 찾아간다는 점에서만 <삼국사기> 온달열전과 일치한다.

오늘날 봐도 파격적인 공주의 결혼
 

공주의 결혼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봐도 파격적이다. 평민과 왕족의 결혼은 현대 세계에서도 흥미를 끄는 뉴스다. 이런 결혼은 '가문 대 가문의 결혼'이라는 색채가 강했던 고대의 결혼 풍습 하에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파격적인 뉴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가문은 주로 혈연 공동체이지만, 옛날의 가문은 그것에 더해 경제 공동체나 정치 공동체의 성격도 겸했다. '가문 대 가문의 결혼'이라고 할 때의 가문은 그런 의미의 집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문 대 가문의 결혼'은 상당 규모의 노비나 토지 혹은 사회적 명성을 보유한 집안끼리의 결혼이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볼 때 온달은 가문이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온달과 결혼하겠다며 궁을 박차고 나왔으니, 당시 사람들한테는 공주의 행동이 '파격적'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지배층이 가문 대 가문의 결혼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형사취수라는 제도에서도 느낄 수 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맞이한다는 이 풍습은 유가족의 생계를 보호하기 위한 복지정책적 관점이나 가문 재산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한 경제적 고려 같은 것들도 담고 있었지만, '결혼은 집안 대 집안이 하는 것'이라는 당시의 관념도 반영한 것이었다.
 
북중국과 남중국이 남북조시대를 이뤘던 시기의 남중국 역사(420~589년)를 다룬 <남사>의 동이열전 고구려 편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한다(兄死妻嫂)"고 설명한다. 남중국 왕조 중 하나인 양나라(502~557년)의 역사를 정리한 <양서>의 동이열전 고구려 편에도 똑같은 문장이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서기 197년에 고국천태왕이 사망하자 둘째동생 고연우가 형수인 우씨 왕후와 결혼하고 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고연우는 산상태왕으로 불린다. 이 역시 형사취수 사례에 포함된다.
 
'형사취수' 풍습, 다른 민족에게서도 발견

이 풍습은 우리 민족뿐 아니라 다른 많은 민족들에서도 발견된다. 일례로 <삼국지> 동이열전 부여 편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데, 이는 흉노의 풍속과 같다"고 말했다. 지금의 몽골초원을 지배했던 이 유목민족도 동일한 풍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돌궐족으로도 불리는 투르크족(튀르크족) 역시 그랬다.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쓴 <처음 읽는 터키사>는 이동식 주택인 게르를 중심으로 영위된 투르크족의 풍습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자식이 커서 결혼을 하면 부모는 자식에게 게르를 지어주고 가축 등 재산을 물려주었다"고 한 뒤 이렇게 말한다.
 
"게르를 가진 가장은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말타기·활쏘기·씨름 등을 익혔다. 결혼은 일부일처가 원칙이되, 만일 형제가 죽으면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해서 형제의 가족을 책임졌다."
 
고대 인도에서도 동일한 장면이 확인된다. 인도철학자인 김형준 박사의 <이야기 인도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리아족은 비아리아족과의 결혼을 금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점차 혼혈이 심해졌다. 과부의 재혼이 허락되었으며, 남편과 함께 부인이 따라 죽는 사티(sati) 제도는 아직 관습화되지 않았다. 과부의 재혼은 죽은 형의 동생과 주로 행해지는 형사취수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이처럼 광범위했던 형사취수는 꼭 형수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항렬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홀로 된 여성이 조카나 전처자식과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큰어머니나 숙모, 새어머니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2018년에 <동북아 역사논총> 제60호에 실린 역사학자 김지희의 논문 '고구려 혼인 습속의 계층성과 그 배경'은 흉노족 풍속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형수뿐만 아니라 생모를 제외한 후모(後母) 그리고 제수 역시 잠재적 혼인 대상이었음이 확인된다"고 말한다.
 
형사취수로 대표되는 그런 형태의 결혼들은 위에 언급된 복지정책적 혹은 경제적 고려 등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문 대 가문의 결혼'이 강조된 고대 사회의 필요성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고대의 결혼 제도와 관련해 위 논문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을 넘어선 가문 간의 결합이며 이는 고대 사회에서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며 "고대 사회에서는 엄격한 계급내혼(階級內婚)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왕실에서는 귀족 내에서도 왕실과 혼인할 수 있었던 특정 세력 범위를 정하기도 하였다"고 한 뒤, 1978년 국내에 소개된 에네스트 슈스키(Ernest L. Schusky) 및 T. 패트릭 컬버트(T. Patrick Culbert)의 <인류학개론>을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취수혼은 원래의 혼인으로 결성된 동맹관계가 배우자가 사망함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것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배우자를 제공한 집단이 그 개인이 사망하더라도 동맹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대체 배우자를 제시한다는 것에서 취수혼적 결합의 내재적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양쪽 가문의 결혼동맹이 한쪽 배우자의 사망으로 인해 파기될 경우, 두 집안 사이에서 갈등이나 대립이 조성될 수도 있었다. 형수취수혼은 이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양쪽 가문의 동맹을 보증하는 기능이 이 제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발상까지 당연시됐을 정도로 고대 사회에서는 '가문 대 가문의 결혼'이 중시됐다. 그런 시절에 평강태왕의 공주는 평양성 시내에서 구걸하던 온달과의 결혼을 선택했다. '가문 대 가문의 결혼'이 아님은 물론이고 '가문 대 개인의 결혼'도 아닌 '개인 대 개인의 결혼'을 과감히 택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와 당시 민중은 공주를 응원하겠지만, 그 시절 왕실과 귀족들로서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너는 결코 내 딸이 될 수 없다"며 "네가 갈 데로 가라"고 공주를 내쫓은 평강태왕의 분노는 그 시대 관념으로 보면 합당한 측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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