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방송돼 시청률 19.6%를 기록하며 젊은 시청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4회를 보면 쌍문동 패거리들이 서울대생 보라(류혜영 분)에게 수학과외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덕선이(혜리 분)의 수학 참고서는 앞면만 너덜너덜할 뿐 금방 새 책처럼 깨끗해진다. 이에 정환(류준열 분)은 "집합만 봤구만"이라며 핀잔을 주고 덕선은 질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대답한다. "집합은 내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잘해".

신원호 감독은 대놓고 웃으라며 이 장면에서 염소 울음 소리까지 넣었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마음껏 웃을 수 없었다. 덕선이의 수학 참고서는 학창시절 나의 것을 보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고교시절 전형적인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였다. 당시 수학에 대한 내 지론은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어"였다(하지만 세월이 흘러 보니 사칙연산을 알아도 먹고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 같은 수포자들이 보기에 수학에 대해 천부적인 감각을 가진 MIT공대의 청소부 윌 헌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굿 윌 헌팅>은 상당히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마치 영화 장르가 '수학'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 나와 비슷한 생각 때문에 <굿 윌 헌팅> 관람을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다. <굿 윌 헌팅>은 결코 딱딱한 수학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국내에서 1998년에 개봉했던 <굿 윌 헌팅>은 18년이 지난 2016년에 재개봉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에서 1998년에 개봉했던 <굿 윌 헌팅>은 18년이 지난 2016년에 재개봉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주)영화사 오원

 
아카데미 각본상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절친'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중견배우들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리플리>, <오션스> 시리즈, <본> 시리즈, <마션> 등 많은 영화를 통해 독창적인 연기영역을 구축한 맷 데이먼은 안정된 연기와 지적인 이미지, 그리고 흥행력까지 갖춘 보기 드문 '토털 패키지형 배우'다. 국내에서는 2014년 천만 관객을 동원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에서 만 박사 역으로 출연했다.

벤 애플렉은 192cm의 큰 신장과 훤칠한 외모로 젊은 시절엔 <아마겟돈>, <진주만>처럼 주로 스케일이 큰 상업 영화에 출연하며 미남스타로 이름을 알렸다. 2000년대 초·중반 <데어 데블>을 비롯해 몇몇 작품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슬럼프를 겪었던 벤 애플렉은 연출 데뷔작인 <가라,아이야,가라>가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2012년 감독과 주연을 겸한 <아르고>를 통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편집상을 휩쓸었다.

겉보기엔 썩 어울릴 거 같지 않은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은 사실 유년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족보를 따져 보면 먼 친척관계라고 한다. 두 사람은 배우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던 1990년대 중반, 머리를 맞대고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그들의 각본은 영화로 제작돼 1997년 연말에 개봉했다. 북미에서만 1억3800만 달러, 세계적으로는 2억2500만 달러의 높은 흥행성적을 올린 영화 <굿 윌 헌팅>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듬 해 벌어졌다.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은 <굿 윌 헌팅>을 통해 1998년 골든 글러브와 아카데미, 그리고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윌 헌팅을 연기한 맷 데이먼은 제48회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과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유망주상까지 독식하며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배우로 떠올랐다(벤 애플릭은 <굿 윌 헌팅>에서 윌 헌팅의 친구 처키 설리반을 연기했다). 

<굿 윌 헌팅> 이후 <체이싱 아미>라는 영화에서 또 한 번 호흡을 맞췄던 맷 데이먼과 벤 애플릭은 2004년 <저지 걸>에서 주연과 우정출연으로 재회한 후 10년 넘게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했다. 2019년 <포드 V 페라리>에 출연했던 맷 데이먼과 <저스티스 리그>에서 배트맨을 연기한 벤 애플릭은 올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더 라스트 듀얼>에 함께 출연하며 또 한 번 환상의 호흡을 뽐낼 예정이다.

윌과 관객들을 울린 한마디 "네 잘못이 아니야"
 
 영화계의 풋내기였던 맷 데이먼(아래)과 벤 애플릭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영화계의 풋내기였던 맷 데이먼(아래)과 벤 애플릭은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 (주)영화사 오원

 
저명한 수학자이자 명문 MIT공대의 수학 교수 제랄드 램보(스텔란 스카스가드 분)는 복도 칠판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적어놓고 학생들에게 문제를 풀면 엄청난 혜택이 올 거라고 제안한다(내심 이 문제를 풀 학생은 없을 거라는 우월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성적으로 MIT 공대에 입학한 엘리트 학생들이 아닌 강의실의 복도를 청소하던 입이 거친 젊은 인부 윌 헌팅(맷 데이먼 분)이 이 어려운 문제를 대뜸 풀어 버렸다.

윌은 누구보다 비상한 머리와 천재적인 수학적 감각을 가졌지만 친구들과 술에 취해 노는 게 더 재미 있는 폐쇄적인 성격의 청년이다. 그래도 하버드 대학 근처의 술집에서 친구 처키(벤 애플렉 분)가 하버드 생들의 지식 자랑에 말려 난감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멋지게 등장해 하버드생들이 인용했던 책의 제목과 내용을 읊어주며 가볍게 '역관광'을 시킨다(그냥 말싸움뿐이지만 그 어떤 액션 못지 않게 신나고 통쾌한 장면이다).

하지만 윌은 거리에서 패싸움을 하다가 경찰에 잡혀 가고 일주일에 두 번씩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풀려난다. 세상에 대한 경계심으로 많은 정신과 의사들을 질리게 만든 윌은 램보 교수의 친구인 숀 맥과이어 교수(로빈 윌리엄스 분)를 만나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몇 일 동안 묵언수행만 하던 두 사람은 시시한 농담으로 대화를 시작하다가 점점 진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한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윌이 숀 교수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다가 폭력적인 양부를 떠올리며 어린 아이처럼 겁에 질린다. 그러자 손 교수는 윌에게 다가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 준다. 두 사람이 의사와 환자, 선생과 학생이 아닌 진정한 소울메이트로서 서로 마음으로 교감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윌이 숀 교수를 끌어안고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을 때 남몰래 눈물을 훔친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윌이 처키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나누던 대화도 친구 사이의 우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명장면이다. 처키는 대단한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스스로 새장 안에 갇히려 하는 윌을 향해 "20년 후에도 이렇게 한심하게 살고 있다면 널 죽여버릴 거야"라며 진심 어린 충고를 해준다. 그리고 처키의 충고처럼 윌은 라스트신에서 고향을 떠난다. 하지만 윌의 친구들은 아무도 슬퍼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의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멘토 혹은 스승 전문 배우 고 로빈 윌리엄스 
 
 숀 교수가 겁에 질린 윌 헌팅을 위로하는 장면은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킨 <굿 윌 헌팅> 최고의 명장면이다.

숀 교수가 겁에 질린 윌 헌팅을 위로하는 장면은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킨 <굿 윌 헌팅> 최고의 명장면이다. ⓒ (주)영화사 오원

 
엄격하기로 유명한 명문 엘튼 고등학교의 영어교사(미국이니까 국어 선생님인가) 존 키팅은 학생들에게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자리에서 책상에 올라 "Oh, Captain, My Captain"을 외치며 키팅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다. 바로 그 유명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을 연기한 고 로빈 윌리엄스는 선한 인상과 편안한 연기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배우다. 물론 <후크>,<미세스 다웃파이어>,<쥬만지> 등 가벼운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지만 국내에서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영향으로 선생님 이미지가 강하다. 로빈 윌리엄스는 <굿 윌 헌팅>에서도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학대 당한 과거로 인해 마음을 열지 못하는 윌의 상담 선생님으로 출연했다.

물론 두 사람이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폐쇄적인 성격의 윌은 숀 교수의 허물을 들춰내기 위해 노력하고 급기야 사별한 숀 교수의 부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꺼낸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숀 교수는 윌의 목을 잡으며 불같이 화를 내지만 곧 윌이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어린 청년임을 인지하고 화를 푼다. 그리고 윌과 솔직한 대화들을 주고 받고 조금씩 윌의 상처를 보듬어 주면서 두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굿모닝 베트남>, <죽은 시인의 사회>, <미세스 다웃 파이어> 등 화려한 필모그라피를 자랑하면서도 유독 아카데미와 인연이 없었던 로빈 윌리엄스는 <굿 윌 헌팅>을 통해 199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많은 관객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선사하던 로빈 윌리엄스는 극심한 우울장애에 시달리다가 2014년 8월 안타깝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단순 우울증이 아닌 노인성 치매에 의한 환각이 원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굿 윌 헌팅 맷 데이먼 벤 애플릭 로빈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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