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한 장면

<미나리> 한 장면 ⓒ 판시네마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영화 <미나리>를 보고 상영관을 나서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토록 잔잔하다 못해 조금은 지루한 영화가 어떻게 미국에서 호평을 받은 거지? 지난해 돌풍을 일으킨 <기생충>과 달리, 이 영화는 이민 온 한국 가족들의 아메리칸드림의 노정인 좌절과 재기를 담은 담담한 이야기인데, 대체 이 서사의 무엇이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일까?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봄 미나리가 제철인지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나물을 무쳤다. '<미나리>가 왜 히트한 걸까'라는 생각을 이어가던 차라, 나도 모르게 그만 영화 속 할머니처럼 "미나리 미나리 원더풀 원더풀"을 흥얼거렸다. 데친 미나리를 깨끗이 헹구어, 된장 간장 고춧가루 조금, 참기름은 나위 넣어 조물조물 무친 미나리는 정말 맛있었다. 진짜 원더풀이다. 할머니가 미국 냇가에 씨 뿌려 거둔 미나리도 이렇게 맛있었을까? 

결국 이 영화가 던진 강한 메시지
 
저녁 밥상에 오른 미나리를 보더니, 영화를 같이 본 식구들이 다 같이 합창이라도 하듯, "미나리 원더풀"을 흥얼대고는 깔깔댔다. 저녁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저마다 갈무리해둔 각자의 감상을 밥상에 꺼내 놓게 되었다. 어쩌다 외국 생활을 2년 넘게 한 딸애가 가장 많은 생각을 쏟아냈다. 수난의 이민 가족사를 보자니, 홀로 이방인으로 살았던 타국살이가 큰 감흥을 불러낸 모양이다. 딸애는 레이건 대통령 운운하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이주민의 설움이랄까, 고독이랄까 하는 관점에서 이입되는 면이 많은 듯했다.
 
"애들도 한 번쯤 아빠가 뭔가 해내는 걸 봐야 할 거 아니야. 난 잃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시작한 걸 끝내야 해"라며 자기 뜻을 고집하는 아버지 제이콥(스티븐 연)의 희망의 얼굴을 한 절망도, 남편의 독단에 지쳐 "더는 못하겠"다고 포기하려는 엄마 모니카(한예리)도, 그 사이에 끼어 눈치 보며 불안했을 아이들의 심정도 모두 공감된다고 했다.

한편, "인종 차별이 드러나지 않는 서사는 너무 나이브한데"라며, 오히려 제이콥이 미국인을 멍청하게 바라보는 자부(만)감이 어색하다는 평을 내놓았다. '상남자'인 남편은 "역시 가족밖에 없어. 나라도 저 아빠처럼 했을 거야"라며 가부장 아버지 제이콥에게 100% 공감하는 감상을 내놓았다. 한편 나는 좀 복잡해진 마음으로 가족 서사가 중심인 이 영화에, 가족인데 가족이 아닌 듯 한끝 비켜나 있는 할머니 순자(윤여정)가 가장 마음에 남았다.
 
미국 영화계에서 호평을 받으며 상을 이 정도 휩쓸었으면, 별점 다섯 개를 선뜻 주어야겠지만 내 평점은 이상하게도 후해지지 않았다. 제이콥의 아바타처럼 말하는 남편의 평을 듣자,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국 이 영화가 던진 강한 메시지는, 불운을 견디게 하는 건 역시 공고한 가족애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듯했고, 이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운명 공동체라 불리는 가족은 불운이든 행운이든 같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짊어짐'이 선택이 아니라 당연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도도히 내디딘 바다 건너 땅에서, 끝내 병아리 감별사로 가장의 이민사에 마침표를 찍고 싶지는 않았던 제이콥은 가족을 힘들게 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유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저 가장의 의지(고집)는 정말 가족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마침내 빡빡한 맞벌이로 어린 아이들의 돌봄에 공백이 생기자, 득달같이 불러들인 사람이 할머니였다는 데서는 서글픔과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모니카와 제이콥은 희망 없는 헬조선을 탈출해 "미국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고 다짐했지만, 약속을 지키는 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부푼 꿈을 꾸고 떠났지만, 한국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그런 것처럼, 기껏해야 3D 업종의 노동자로 과로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과로와 착취를 포장한 근면과 성실로 악착같이 버텨냈겠지만, 그들의 에너지는 뽑아 쓰는 곽 티슈처럼 점차 비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빠르게 소진되는 배터리 알람이 마지막 한 막대에서 간당간당하자, 그들이 SOS를 타전한 곳은 한국에서 혼자 살아가는 엄마였다. 어디선가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짠하고 등장하는 히어로 엄마 말이다.
 
엄마는 딸의 부름에 즉각 반응해 손주들은 먹지도 않을 고춧가루, 멸치, 한약재, 미나리 씨 등으로 꽉꽉 채운 여행 가방을 들고 낯선 땅에 나타났다. 딸의 식구 말고는 어딜 가도 말 한 마디 섞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을 밟기 위해, 좁은 이코노미석에 늙은 몸을 접고 왔을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나밖에 없는 딸과 할머니를 알아보지도 못할 손주들을 볼 마음에 설렜을까. 낡았어도 쓸고 닦아 반들반들 윤이 나던 집을 팔아 치우고, 가난하지만 손때 묻은 살림살이들을 내다 버리고선, 평생을 달랑 캐리어 하나에 넣어 온 엄마는 얼마나 많은 삶의 조각들을 폐기처분해야 했을까?
 
또 다른 할머니 이야기 
 
 영화 <미나리> 스틸

영화 <미나리> 스틸 ⓒ 판씨네마(주)

 
백수린 단편 소설 <흑설탕 캔디> 역시 낯선 땅으로 손주들을 돌보러 떠나야 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생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던 남편이 죽고 "이제야 겨우 자유의 몸이" 된 할머니는 비로소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려 했지만, 갑작스런 딸의 사망을 겪게 된다. 프랑스 주재원으로 떠나게 된 사위는 타국에서 홀로 어린아이들을 돌볼 자신이 없자 장모에게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읍소한다. 어린 두 손주를 외면할 수 없던 할머니는 이제 움트려 했던 새로운 삶을 다시 땅속에 묻고, 아무 연고도 없는 먼 땅으로 사위 손주들과 함께 떠난다.
 
낯선 땅에 이주한 어린 손주들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빛의 속도로 불어를 취득해갔고, 그만큼 한국어는 멀어져 갔다. 소원해진 것은 한국어뿐이 아니었다. 청소년기를 거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손주들은 조금씩 할머니를 멀리 했다. 대화 나눌 상대조차 찾을 수 없자,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불어를 할 수 없는 할머니는 집 밖을 나가는데도 큰 용기를 내야 했다. 나갈 때마다 몇 발짝씩 더 멀리 나가보지만 친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즈음 피아노 연주 소리에 끌려 프랑스 남자 브뤼니에씨를 만나게 되고 우정일지 사랑일지 모를 애틋한 감정을 키우게 된다. 사전을 펼쳐가며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사이지만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고목나무에도 새 움이 트고 여린 잎이 나올 수 있었다.
 
프랑스로 떠날 때도 자신의 뜻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곳을 떠날 때도 그랬다. 할머니는 갑자기 떠나며 프랑스 연인에게 어떤 이별의 말을 건넸을까. 매일 같은 곳을 산책하고 매일 차 한 잔을 같이 나눈 그를, 그리고 난생처음 남자 앞에서 두드려 보았던 피아노 건반을, 할머니는 어떻게 마음속에 접어두었을까. 활기가 생기고 종종 불어를 물어오는 할머니에게서 손주들은 그의 짧은 연애를 눈치채지만, 할머니를 잃을지 모를 두려움에 모른 체한다.

사위의 주재원 기간이 끝나고 귀국한 할머니는 짐짓 아무 일도 없는 척 다시 한국 할머니로 돌아가 살아갔지만, 브뤼니에씨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 투병 끝에 노구를 죽음의 문턱에 누인 할머니는 아무 것도 쥐고 있지 않은 맨 주먹을 절대 펴지 않았다. 평생 자신의 삶을 오롯이 독점해보지 못한 회한은 마지막 순간에 일생의 아쉬움, 미련, 후회 등의 감정을 기화시켜 손아귀에 그러잡았다. 할머니의 꼭 쥔 손은 손주들에게 빈주먹으로 보일 테지만, 그 안엔 누구의 할머니도 아닌 난실의 일생이 담겨 있다. 마지막 숨을 밭게 내쉬며 주먹을 펴지 않던 할머니가 남긴 말은, "이건 내 것이란다"였다.
 
아메리칸드림에 헌신한 모든 할머니들에게 

자신의 평생을 몽땅 털어 낯선 미국 땅에 손주들을 돌보러 온 할머니. 손주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악령을 기꺼이 자신의 몸으로 받아낸 할머니. 불편한 몸이 딸의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려 끊임없이 움직이며 쓸모를 증명해야 했던 할머니. 모니카와 제이콥 가족이 이룬 좌절과 성취의 이민사는 이렇게 할머니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불운에 지친 딸의 가족들이 거실에 한데 모여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머니의 마지막 눈길은 더없이 웅숭깊지만, 또한 더없이 쓸쓸하다. 할머니 역시 삶의 마지막 숨을 내쉬며 빈주먹을 쥐고 이렇게 말했을까. "이것만은 내 것이란다." 아메리칸드림에 헌신한 할머니를 기억하는 방식이 지극한 '모성' 혹은 훈훈한 '가족주의'로만 추앙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누구의 할머니가 아닌 인간 '순자'는 증발되기 때문이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으로 4명의 한국 여성들이 주검이 되었다. 노동자 혹은 시민이었을 이들을 추모하는 방식엔 어김없이 '헌신의 모성'으로 가득하다. 그가 어떤 한 사람이었는지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까? 허망하게 죽음을 맞으며 꼭 쥐었을 그들의 빈주먹이 사무친다. 자신을 버리고 가족의 아메리칸드림에 헌신한 모든 할머니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 천국에서는 가족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충만하기를...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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