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산어보>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

영화 <자산어보>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3년 만에 신작을 들고 온 이준익 감독은 몸이 좀 말라 있었다. 멀리 남도의 한 섬으로 내려가 온갖 태풍을 겪으며 만들어낸 영화 <자산어보>의 영향이었을까.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했던 <동주>와 <박열>을 거쳐, 영화 <변산>으로 다시금 현대에 주목하나 싶었는데, 이번엔 아예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난 24일 인터뷰차 만난 이준익 감독은 "중구난방이지! 자기복제 하면 재미없잖아"라며 일단 웃어 보였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정약전의 책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작품은 약전(설경구)과 그의 형제 정약용(류승룡), 그리고 이들이 깊게 받아들인 서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흑산도 청년 창대(변요한)의 이야기를 가공해 접목했다. 성리학을 더럽히고 백성을 현혹하는 학문을 했다는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 간 약전, 그리고 그와 함께 훗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실용서를 쓴 창대와의 우정이 <자산어보>의 주요 골격이다.

전작의 실패로 눈에 들어온 사람

역사 마니아로 알려진 이준익 감독의 관심사는 동학이었다고 한다. 구한말 성행했던 동학사상에 담긴 우리나라의 근대성을 들여다볼 요량이었는데, 이를 파고드니 조선 후기의 서학이 보였다는 게 이준익 감독의 설명이었다.

"역사를 자꾸 집단성과 사건에 근거해 바라보는 건 틀린 방법이다. 개인의 관점으로 근대성을 바라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동학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개인의 근대성이 농민으로 결집된 건데 왜 이름을 동학으로 지었나 보니 앞 시대에 서학이 있더라. 그리고 그 앞에 박제가 등의 북학이 있었고. 여기에 당시 민중과 사대부의 근대성이 담겨 있거든. 근데 남학은 없더라. 일본을 공부해야 했는데 안 해서 먹힌 게 아닐까. 이건 그냥 내 개인 생각이다.

그래서 서학을 보니 가장 먼저 황사영이 들어왔다. 충북 제천 성지에 가서 황사영에 관한 논문을 쓴 신부님을 만나고 시나리오를 당시 작가랑 썼다. 다 쓰고 나니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더라. 엎자고 하고, <사도> <변산> 등을 찍었지. 근데 내가 <변산>에서 실패했잖나. 에잇, 초심이 뭐지 하는 차에 정약전이 보이더라. 정약용도 있었는데 너무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16부작 드라마로 해야 할 것 같더라(웃음). 근데 약전은 2시간 영화로 충분히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한 위대한 인물을 살피기 위해 그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위대한 인물을 조명하는 방식. 이준익 감독이 <동주>와 <박열>에 적용한 방식이 <자산어보>에도 투영됐다. 유배지에서 <목민심서> 등 백 편이 넘는 저술 활동을 한 동생 약용에게 "뜻 모를 사람 속보단 명징한 자연의 섭리를 공부해보려 하네"라고 말한 약전. 이준익 감독은 "근데 그 공부는 창대 없인 이룰 수 없는 거지"라며 약전과 약용의 다른 방향성을 창대를 통해 바라보려 했다고 강조했다.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그 차이로 근대성을 찾아가는 것"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이 영화의 작가와 촬영 감독 등 주요 스태프가 <변산> 때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우리끼리 그랬다. <변산>으로 실패했으니 패자부활전 하자고"라며 웃어 보였다.

"설경구, 변요한? 연기지시 할 게 없었다"

가상의 캐릭터가 주로 등장하는 현대물과 달리 실존 인물을 다루는 사극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남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왕의 남자> <황산벌> <사도> 등 서로 다른 개성의 사극을 연출해온 그는 배우의 연기 면에서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땐 분명 가공의 인물 때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설경구와 변요한 등 주요 배우들이 중요했다고 한다.

"현대물이면 캐릭터마다 어떤 직업이 있잖나. 배우가 해당 직업군을 직접 만날 수도 있고, 간접체험을 할 수 있는데 역사 속 인물은 만날 수 없다. 함부로 꾸밀 수 없지. 그래서 배우 개인의 설정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결국 배우마다 자기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설경구 안의 약전, 변요한 안의 창대처럼 말이다. <동주> 속 강하늘을 보자.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용식은 캐릭터를 설정해서 한 거고 동주는 강하늘 내면에서 가져온 거다. 이런 건데 감독이 어떻게 연기 지시를 하나. 배우가 자기 내면에 있는 어떤 걸 끄집어낼 때까지 보는 거지."

<자산어보>엔 배우 개인의 내면만 반영된 게 아니다. 이준익 감독에게 다짜고짜 시나리오를 달라고 해 출연하게 된 설경구를 보며 "과거 나의 할아버지 모습이 보였다"고 말한 바 있는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 곳곳에 자신의 어린 시절, 그리고 할아버지와의 기억을 배치해 놓았다고 고백했다.

"어렸을 때 같이 살았던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새벽 4시만 되면 날 깨우신다. 이불 개라고. 매일 대님을 하고 계셨던 게 기억난다. 글을 쓰시면 난 옆에 앉아서 먹을 갈곤 했다. 또 시골 평상에 누워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면 그게 그렇게 좋잖나. 누구나 그런 추억이 있을 거다. 그걸 창대에게 발현시키고 싶었다(웃음). 나만의 힐링이지!"

이준익 감독은 자신의 최근작들에 담긴 일상성을 말했다. 큰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푸는 게 아닌 인물의 사연, 일상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면서 말이다. "일상의 가치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정서를 유지하는 건데 <자산어보>에도 일상성의 비중이 높다"며 그는 "그래서 이 영화가 사극이지만 현대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목적은 <목민심서>와 <자산어보>의 배치로 조선의 근대성을 보이는 것이기에 일상성은 하나의 재미 수단으로 생각해주시면 된다"고 설명했다.

"현재나 역사는 인간이 구분해 놓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연과 인간이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잖나. 그렇기에 시간으로, 시기로 인간을 구분해서 반성하는 건 부정확한 해석일 수 있다.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발전한 건 하나도 없다. 기술이 발달했을 뿐이지. 기술이 발달했다고 과거를 열등하게 보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현대인이 과거를 우월감으로 보면 안 된다."
 
 영화 <자산어보>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

영화 <자산어보>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분에 넘치는 대우 받고 있어, 영화는 밥 벌어먹기 위한 것"

<변산>이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담긴 기성세대의 뼈저린 반성은 이준익 감독 본연의 정체성 중 하나기도 하다. "폼 나게는 못 살아도 후지게는 살지 말자"와 같은 류의 시원한 자기 고백을 담은 현대물을 또 보고 싶다는 기자 말에 이준익 감독은 "이미 써놓은 것도 있고 준비하는 것도 있지만 결국 내 차기작은 앞선 작품의 상업적 결과가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변산>이 안 망했으면 <자산어보>는 없었을 것이다. <변산>이 잘 되니 아마 더 비슷한 다른 걸 했겠지. 이래서 실패는 성공의 미덕인 것 같다. 다 상호작용이다. 이렇게 난 가끔 한 방씩 맞아야 한다(웃음). 어떤 기자가 영화 속 대사인 '주자는 참 힘이 세구나'를 쏙 바꿔 '이준익은 참 힘이 세구나'라는 제목을 뽑았더라. (웃음) 난 내가 가진 역량보다 큰 대우를 받고 있는 거다. 

영화제 상복이 없다고? 상업영화 감독이 흥행 좀 했다고 영화제에서 대접받는 건 좀 아니지. 영화제 출품 위한 작품을 만드는 감독들이 받아야지. 난 그런 감독이 아니라 상은 어색해서 힘들다. 이미 인지도나 유명세 면에서 과분하다. 크게 대우받고 있지. 난 그저 스태프들과 내 밥벌이를 위해 찍는 건데."


이준익 감독은 "언제 영화 일을 그만둘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목표를 위해 하진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내 작품 보면 참 중구난방이지 않나?"라고 되묻는 천진함 속에 그의 개성이 느껴졌다.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는 중구난방 정신을 그는 꽤 즐기고 있었다.
이준익 자산어보 설경구 변요한 정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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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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