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주지훈의 <킹덤>도 연상시키고 OCN의 <손 the quest>도 연상시키는 SBS 사극 <조선구마사>가 첫 방송 직후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드라마 속의 사신 접대 장면에서 중국 음식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감우성 분), 충녕대군(장동윤 분), 양녕대군(박성훈 분)을 주요 인물로 내세우는 <조선구마사>는 좀비를 퍼트리는 역병과 맞서 싸우는 과정을 다룬다. 드라마 제1회에서는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의 군사 거점이었던 함주성에서 좀비들과 전투하는 장면이 묘사됐다.
 
하지만 함주성 전투로도 좀비는 근절되지 않았다. 10년이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힘으로는 역병을 막을 수 없겠다고 판단한 태종이 악령 전문가인 요한 신부를 초빙했고, 이에 따라 요한 신부가 로마교황청 사신 자격으로 중국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을 영접하고자 충녕대군 일행이 말을 달려 평안도 의주로 갔고, 대군이 주점에서 신부 일행을 접대하는 자리에 문제의 중국 음식들이 등장했다. 만두와 더불어, 중국인들이 음력 8월 15일 명절에 먹는 월병 과자가 식탁 위에 수북이 놓였다.
 
 SBS 사극 <조선구마사> 한 장면.

SBS 사극 <조선구마사> 한 장면. ⓒ SBS


입장문 내놓은 제작진

시청자들은 한국 사극에 중국 음식이 대거 출현한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조선 음식이 아닌 중국 음식이 차려진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의견들이 나왔다.

드라마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에는 '아니 근데 기생집 왜 중국풍이에요?'라는 제목하에 "달려 있는 등불들도, 배경 음악도, 분위기도, 인테리어도, 심지어 음식도 전부 중국 느낌 밖에 안 나서, 저는 압록강 북쪽에 있는 명나라 기생집에서 잠시 몸을 녹이고 다시 조선으로 가는 건 줄 알았습니다"라는 의견도 있다.
 
수많은 의견들이 쏟아지자 제작진은 신속히 입장문을 내놨다. "명나라를 통해서 막 조선으로 건너온 서역의 구마사제 일행을 쉬게 하는 장소였고, 명나라 국경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중국인의 왕래가 잦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을 가미하여 소품을 준비했다"며 "이는 극중 한양과 멀리 떨어진 변방에 있는 인물들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한 설정이었을 뿐, 어떤 특별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SBS 사극 <조선구마사> 한 장면.

SBS 사극 <조선구마사> 한 장면. ⓒ SBS

 
중국과 가까운 의주의 분위기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설명이다. 의주가 중국문명과의 접경 지역이므로 중국 분위기가 많은 나는 곳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는 해명이다.
 
병자호란 이후인 1644년에 만주족(여진족)이 명나라 땅을 차지함으로써 만주와 중국이 하나로 통합되기 전까지, 만주는 중국문명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었다. 명나라의 영향력이 부분적으로 미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유목민 혹은 반농반목민인 여진족의 문명이 숨 쉬는 곳이었다. 이곳이 중국과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한 것은 1644년 이후다. 그렇기 때문에 1644년 이전의 의주는 중국문명을 건너편에 둔 도시가 아니라 만주문명을 건너편에 둔 도시였다.
 
또 베이징(북경)에 명나라 수도가 들어선 것은 1421년이다. 1368년 건국으로부터 53년 뒤였다. 그 전에는 상하이 근처의 난징(남경)이 명나라 수도였다. 그래서 1421년 이전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교류에서 육로뿐 아니라 해로의 중요성도 높았다. 해상 교류의 비중도 높던 시기였으므로, 1421년 이전의 의주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의주와 다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구마사> 제1회에서 세자 이제(훗날의 양녕대군)의 자유분방한 사생활이 언급됐다. 이는 드라마 속의 시점이 태종 이방원(재위 1400~1418)의 집권 후반기임을 뜻한다. 따라서 드라마 속의 충녕대군이 로마교황청 사신을 접대한 시점은 1418년 이전이다.
 
이 시점은 명나라 수도가 베이징이 아닌 난징에 있을 때이자, 만주가 중국문명에 편입되기 이전일 때였고, 의주의 위상이 훗날과 다소 다를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의주를 통해 중국 분위기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제작진의 해명은 1418년 이전 상황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 '만주는 언제나 중국 땅'이었고, '명나라 수도는 항상 베이징'이었고, '의주는 항상 한반도와 중국문명의 가교'였다는 잘못된 관념에 기초한 해명이다.

국가 대 국가의 만남
 
한편, 교황청 사신에게 중국 음식을 접대하는 장면과 관련해서는, <조선구마사> 제작진이 드라마 속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부분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제1회 방송이 35분을 경과하는 부분에서 요한 신부의 통역사인 마르코(서동원 분)가 한 발언이 그것이다.
 
마르코는 충녕대군 일행을 처음 만나 숲속에서 모닥불을 켜놓고 휴식을 취할 때 "이분은 교황 그레고리오 12세께서 니콜라스 신부와 조선국왕의 요청으로 파견한 요한 신부님"이라고 소개한 뒤 두루마기를 집어 들며 "그리고 이것은 그레고리오 12세께서 보내신 친서"라고 말했다.
 
교황의 친서가 전달됐다는 것은 비록 모닥불 앞이기는 하지만 이 자리가 조선 정부와 로마교황청의 공식 만남임을 의미한다. 양측의 만남을 이렇게 공식 회동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요한 신부 일행에 대한 접대 역시 외국 사신단에 대한 접대 관행을 근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땅에서 중국 음식이 제공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지만, 이 드라마가 양측의 만남을 국가 대 국가의 것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음식 접대 역시 공식 관행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사신단이 방문하면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기도 했지만, 음식 재료만을 제공하고 알아서 요리하도록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상대방을 무시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일본을 방문하는 조선통신사의 식사도 이런 식으로 해결되는 일이 많았다. 2008년에 <역사와 경계> 제66집에 실린 심민정 부경대 교수의 논문 '18세기 왜관에서의 왜사(倭使) 접대음식 준비와 양상'에 이런 부분이 있다.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에도 일본에서 일공(日供)으로 음식 재료를 주면, 일행을 따라간 조선의 숙수(요리사의 일종)나 도척(요리사의 일종) 등이 음식을 직접 요리하여 통신사들의 세 끼 식사를 제공하였다."
 
중국 왕조들도 이런 방식으로 사신단을 접대했다. 1780년에 사신단 일원이 되어 청나라를 방문한 실학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음력으로 경자년 8월 2일(양력 1780년 8월 31일)에 기록된 일기는 청나라 관원들이 사신단의 식사를 어떤 식으로 준비했는지 보여준다.  
 
"아침 일찍 예부·호부의 낭중과 광록시의 관원들이 아문에 모여들었다. 쌀과 팥 대여섯 수레와 돼지·양·닭·거위·채소 종류가 바깥뜰에 가득 차 있었다."
 
알아서 해먹으라고 음식 재료를 잔뜩 갖고 왔던 것이다. 이런 방식 말고, 조리된 음식을 제공하는 일도 당연히 있었다. 이럴 때 내놓는 음식은 현지 재료를 사용한 현지 음식인 경우가 많았다. 중국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상보 대전보건대학 전통조리과 교수의 <조선시대의 음식문화>는 1643년에 방문한 명나라 사신단을 위한 접대와 관련해 "조선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맨 처음 먹는 음식이 죽이듯이, 명나라 사신에게도 죽을 위주로 한 초조반(初早飯)을 차렸다"고 한 뒤 그들에게 제공된 아침 밥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간단히 말해 육류는 전혀 없이 두부·표고버섯·식이버섯·무·다시마·산삼·잣·녹두·의이·찹쌀·꿀·참기름·간장·소금·생강·후추·파·식초들이 재료가 되어 죽·만두·국수·탕·찜·조림·구이로 음식을 만들어 사발과 접시에 담아 조반상을 차린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해 양념 배합을 조절하기는 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조선 요리사가 조선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음식을 맛보는 중국 사신도 조선 음식을 맛본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숙소로 돌아가 중국 음식을 먹으면 됐기 때문에 음식 문제로 고충을 겪을 일은 많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상대방 나라의 음식을 내놓는 일도 당연히 있었다. 위의 심민정 논문은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메밀국수가 일본 사신의 식탁 위에 오르기도 하고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해산물 요리가 많이 제공됐다고 말한다.
 
<조선구마사>에 등장하는 교황청 사신단처럼 소규모 일행이 방문한 경우에는, 음식 재료를 제공하기보다는 완성된 음식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접대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조선의 식재료로 조선의 음식을 제공하되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을 특별히 추가해주는 방식이 사용됐다고 추측할 수 있다.
 
교황청 사신을 위해 이탈리아 음식이나 유럽 음식을 준비하기는 힘들므로 이런 경우에는 조선 음식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을 거쳐 입국했다는 이유로 중국 명절 음식을 내놓는 것은 개연성이 낮은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구마사 사신 접대 월병 좀비 로마교황청
댓글1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