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던 'PC통신의 꽃'은 단연 채팅이었다. 오로지 아이디와 닉네임만으로 대화 상대를 상상하고 그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채팅은 7080세대를 관통하던 펜팔 문화의 종식을 알리는 획기적인 커뮤니티였다. 채팅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천문학적인(?) 전화요금 때문에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은 후 PC통신을 금지 당했던 가슴 아픈 추억 하나 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채팅의 열풍은 영화로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칸의 여왕' 전도연의 영화 데뷔작이자 1997년에 개봉해 서울관객 67만이라는 높은 흥행성적을 거둔 <접속>은 PC통신의 채팅을 통한 남녀 간의 묘한 연애감정을 그린 작품이다. 전도연은 <접속>을 통해 가능성 있는 신예에서 최고의 인기 스타로 떠올랐고 당시 레코드 가게에서는 사라 본의 < A Lover's Concerto >가 삽입된 <접속> OST가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하지만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초고속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됐고 '구시대의 유물'인 PC통신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그렇다고 채팅을 향한 사람들의 열정(?)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버디버디' 등으로 대표되는 채팅 전문 사이트와 메신저를 통해 채팅의 즐거움을 만끽했고 급기야 채팅 전용 게임들이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조승우, 이나영 주연의 영화 <후아유>는 채팅게임에서 만난 남녀의 심리변화를 다룬 멜로 영화다.
 
 <후아유>는 이나영과 조승우 모두에게 초기 커리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었다.

<후아유>는 이나영과 조승우 모두에게 초기 커리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었다. ⓒ CJ 엔터테인먼트

 
방황하던 이나영, <후아유>를 통해 길을 찾다

SBS 드라마 <퀸>과 <카이스트>, MBC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를 통해 얼굴을 알린 이나영은 데뷔 초기만 해도 그저 예쁘기만 한 신인에 불과했다. 2001년에는 홍콩스타 여명과 함께 <천사몽>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연기에 큰 열정을 가진 배우로 보이진 않았다.

2018년 <스타투데이>와 한 인터뷰에서 이나영은 "사실 얼떨결에 데뷔해 너무나 바쁘게 달리기만 해 신인 때만 해도 늘 그만둘 생각 뿐이었다"라며 "연기에 대해서도,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였다. 그리고 '후아유'가 그 모든 걸 바꿔줬다"라고 밝혔다. 

<후아유>에서 이나영은 촉망 받는 수영 유망주였다가 사고로 청력을 잃게 된 수족관 다이버 서인주를 연기했다. 사고에 의한 상처 때문에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은 은둔형 외톨이 같은 인물이다. 비록 <후아유>는 2002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기에 개봉하면서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다. 하지만 이나영은 <후아유>를 통해 연기에 대한 열정을 되찾았고 2002년 7월 '인생작'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 출연했다.

사실 이나영은 김하늘, 하지원, 배두나 등 또래의 여배우들과 비교해 보면 다작을 하는 배우도 아니고 흥행작이 많은 배우도 아니다. 2006년 강동원과 함께 출연해 전국 300만 관객을 모았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이나영의 최대 흥행작이다. 실제로 이나영은 <후아유>를 비롯해 <아는 여자(전국 83만)>,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전국 17만)>, <하울링(전국160만)> 등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거나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긴 작품이 더 많다. 

이나영은 지난 2019년 tvN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 출연하며 <도망자 Plan.B> 이후 9년 만에 드라마에 출연해 시청자들을 만났다. 물론 화보나 광고를 통해 만나는 것도 반갑지만 이나영은 역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할 때 가장 빛나는 배우다.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옆에서 힘이 되는 '투명친구'
 
 온라인에서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은 현실에선 좀처럼 친해지지 못한다.

온라인에서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은 현실에선 좀처럼 친해지지 못한다. ⓒ CJ 엔터테인먼트

 
우연찮은 기회로 '후아유'라는 채팅게임의 베타테스트에 참여하게 된 인주(이나영 분)와 제 발로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게임 제작에 목숨을 건 형태(조승우 분). 형태는 '별이'라는 아이디로 게임에 참여하는 인주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멜로'라는 아이디를 만들어 '별이'의 게임 파트너가 된다. 그리고 '멜로'와 '별이'는 약간(?)의 과장과 거짓말로 서로를 알아가고 가까워지며 언제나 옆에서 힘이 돼주는 '투명친구'가 된다.

게임 속 '멜로'와 '별이'가 점점 친해지는 반면에 현실에서 형태와 인주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한다. 오토바이를 빼앗기고 남자에게 버림받아 우울한 친구를 위로해 주다가 노래방에서 우연히 만나 소방차의 <사랑하고 싶어>를 부를 때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이 장면에서 짧게나마 이나영의 '열창'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인주는 실연의 상처로 눈물을 흘리는 친구 보영(조은지 분)에게 큰 소리를 치는 형태에게 주먹을 날리며 화를 낸다.

채팅 속 자아인 '멜로'에게 이유 없는 질투심을 느낀 형태는 그 화를 인주에게 풀고 우울해진 인주는 '멜로'에게 음악으로 분위기를 바꿔 달라고 청한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후아유> 최고의 명장면은 조승우의 통기타 라이브다. 조승우는 어두운 방구석에서 홀로 기타를 치며 윤종신의 <환생>과 긱스의 <짝사랑>, 나미의 <유혹하지 말아요>로 이어지는 메들리를 멋지게 부르며 인주와 별이를 감동시킨다. 

'별이', 그리고 인주를 대하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된 형태는 63빌딩 옥상에서 용기를 내 고백을 하고 인주 역시 그 마음을 받아준다. 하지만 멜로와 형태가 동일인물임을 알게 된 인주는 큰 혼란에 빠진다. 처음에는 자신이 놀림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하지만 채팅 속 투명친구와 현실의 남자친구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다음 파란불에 함께 건너면서 <후아유>는 행복하게 막을 내린다.

1998년 유지태, 김하늘 주연의 <바이준>을 통해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연출했던 최호 감독에게 2002년작 <후아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출한 멜로영화다. 최호 감독은 2006년 황정민, 류승범 주연의 범죄영화 <사생결단>과 조승우와 재회한 유신시대 음악영화 <고고70>, 이정재, 신하균, 보아가 출연한 액션코미디 <빅매치> 등을 연출했다. 하지만 전국 200만 관객을 모은 <사생결단>을 제외하면 흥행에서는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인주와 형태를 이해해주는 진실한 친구들
 
 <후아유>는 영화 개봉시기에 맞춰 실제로 게임이 제작되기도 했다.

<후아유>는 영화 개봉시기에 맞춰 실제로 게임이 제작되기도 했다. ⓒ CJ 엔터테인먼트

 
<후아유>는 남녀 주인공이 어두침침한 방구석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특정 사건보다는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에 애초에 많은 인물이 등장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도 <후아유>에는 그리 많은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데 주인공인 인주와 형태 곁에서 좋은 친구가 돼주는 보영(조은지 분)와 남훈(이장원 분)은 조연들 사이에서 그나마 돋보이는 캐릭터다.

보영은 '곱창을 사랑하는 모임'의 운영자을 남몰래 좋아했다가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비운의 캐릭터지만 인주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다. 특히 인주가 수족관 다이버 일을 그만둔다고 알렸을 땐 인주를 힘껏 안아주며 인주의 새로운 시작을 누구보다 반겼다. 멜로가 보고 싶으면서도 실제 만남을 망설이던 인주에게 멜로와의 만남을 먼저 이야기하라고 부추긴 것도 보영이었다.

보영 역의 배우 조은지는 <후아유> 이후 주연을 맡은 몇몇 영화가 흥행 실패했지만 안정되고 자연스런 연기를 통해 금방 자리를 잡았다. 특히 주인공 친구, 혹은 감초 역에 특화된 연기로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드라마 <파리의 연인>과 <개인의 취향>, <오 마이 비너스>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2018년엔 단편영화 < 2박3일 >을 연출해 고양스마트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형태의 친구 남훈 역의 이장원은 배우보다 성우로 더욱 유명하다. 실제 나이는 1971년생으로 1980년생 조승우보다 9살이나 많다. 많은 애니메이션의 더빙에 참여한 이장원은 <날아라 슈퍼보드> 극장판의 저팔계와 <겨울왕국>의 올라프, <인사이드아웃>의 빙봉 등 익숙한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성우 활동을 하면서도 꾸준히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이장원은 지난 2016년 tvN 드라마 <안투라지>에서 안대표 역을 맡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후아유 이나영 조승우 최호 감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