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까지만 해도 1편이 성공하면 속편이 제작되고 속편까지 성공하면 3편이 나오는 게 일반적인 영화제작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기획단계부터 속편은 물론이고 3편 제작까지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다(물론 3부작으로 기획된 영화도 1편의 흥행성적이 부진하면 속편 제작 계획이 전면 파기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3부작으로 제작되는 책이나 영화를 흔히 '트릴로지'라고 부르는데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트릴로지가 대중화된 작품이 바로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이었다. 잭슨 감독의 고향인 뉴질랜드에서 세 편을 연속으로 한 번에 찍은 <반지의 제왕>은 세 편 합쳐 세계적으로 29억17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흥행수익을 올렸다. <반지의 제왕> 성공 이후 큰 규모의 영화들은 3부작으로 기획·제작되는 게 할리우드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흔히 3부작 영화는 스케일이 큰 판타지 영화나 액션 히어로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때로는 규모가 작은 잔잔한 멜로 영화도 3부작으로 제작되곤 한다. 리차드 링클레이커 감독이 무려 18년에 걸쳐 선보인 '비포 3부작'은 멜로 영화의 대표적인 트릴로지로 꼽힌다. 그 중에서도 '비포 트릴로지'의 시작을 알리는 <비포 선라이즈>는 주인공 에단 호크를 '멜로왕자'로 만들며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비포 선라이즈>는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지는 '비포 트릴로지'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으로 이어지는 '비포 트릴로지'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죽은 시인의 사회>의 유일한 생존자(?) 에단 호크

에단 호크는 만14세였던 1985년, 동갑내기 배우인 고 리버 피닉스와 함께 <컴퓨터 우주탐험>에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했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가 배우로 승승장구한 것과 달리 에단 호크는 활동을 중단하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던 에단 호크는 10대의 끝자락이었던 1989년 영화계로 돌아왔다. 그의 복귀작은 바로 90년대 초반 수많은 청소년들의 가슴 속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던 명작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소심한 학생 토드 앤더슨을 연기한 에단 호크는 키팅 선생님(고 로빈 윌리엄스 분)이 학교를 떠날 때 "오,캡틴! 마이 캡틴!"을 가장 먼저 외치며 일약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에단 호크와 닐 페리 역의 로버트 숀 레오나드가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가면 식당 안 손님들이 일제히 테이블 위로 올라가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쳤다는 전설 같은 일화도 있다.

하지만<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학생으로 출연했던 배우들의 행보는 그리 순탄치 못했다. 극 중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닐 페리 역의 레오나드는 200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뚜렷한 대표작을 남기지 못했고 2013년을 끝으로 거의 활동이 없다.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러브라인이 있었던 조쉬 찰스도 인기배우가 되진 못했고 찰리 댄튼을 연기한 게일 핸슨은 1993년 <헤븐 허스트의 신입생>을 끝으로 연기 활동을 접었다.

하지만 에단 호크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 출연한 주요 학생 역할의 배우들 중에서 유일하게 할리우드에서 스타배우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95년 작품인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의 대학생 셀린느와 사랑에 빠지는 제시 역을 소화하며 '멜로 왕자'로 급부상했다. 처음 보는 셀린느에게 스마트하고 능숙하게 말을 건네는 제시를 보면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소심한 토드 앤더슨과 동일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에단 호크는 2004년과 2013년,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에서도 주연과 각본을 맡으며 '비포 트릴로지'를 완성했다. 그리고 <위대한 유산>, <가타카>, <뉴욕,아이 러브 유>, <더 퍼지>, <보이후드>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다. 2016년 <매그니피센트7>에서 명사수 굿나잇 로비쇼를 연기했던 에단 호크는 2019년 <퍼스트 리폼드>를 통해 미국과 영국의 5개도시 비평가 협회상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의 로맨스
 
 기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레코드 가게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부쩍 말수가 줄어든다.

기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레코드 가게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부쩍 말수가 줄어든다.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여행을 좋아하는 대다수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낯선 환경에서 오는 낯선 자유를 즐긴다는 점이다. 평소 모르는 사람에 대해 경계심이 많은 사람도 여행지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걸기도 하고 현지인, 혹은 여행객들과 금방 친해지곤 한다. <비포 선라이즈>는 유로레일에서 우연히 만난 미국 남자와 프랑스 여자의 하룻밤 여정을 다루는 영화다.

비엔나를 거쳐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제시(에단 호크 분)와 셀린느(줄리 델피 분)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금방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은 나에 대해 아무런 고정관념이 없는 사람이 털어놓기 힘든 속 깊은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줄 때도 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하루를 쫓아가는 것이 영화의 주요 스토리이기 때문에 <비포 선라이즈> 속 제시와 셀린느는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설레는 장면은 대사가 없는 레코드 가게 감상실 장면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듣던 두 사람은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제시가 바라보면 셀린느가 눈을 돌리고 셀린느가 바라보면 제시가 딴청을 피우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반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클럽에서 핀볼게임을 하며 옛사랑에 대해 털어 놓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사실 연애를 할 때 옛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제시와 셀린느는 클럽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가볍게 과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제시는 마드리드에서 여자친구에게 차인 얘기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차였을 때 가장 화나는 건 날 찬 여자가 내 생각을 안 할 거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야"라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셀린느에게 건넨다. 

<비포 선라이즈>는 연출과 각본을 맡은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과거 필라델피아에서 한 여인을 만나 좋은 추억을 만들었던 경험을 토대로 <비포 선라이즈>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영화 개봉 후 그녀를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링클레이터 감독과 헤어진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6개월에서 9년으로 늘어난 그리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6개월 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실제 재회까지는 무려 9년의 시간이 걸렸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6개월 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실제 재회까지는 무려 9년의 시간이 걸렸다.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제시와 셀린느는 관람차에서 키스를 나눈 후 한층 가까워진다. 그리고 노천 카페에서 수다를 떨던 중 범상치 않은 패션감각을 가진 떠돌이 손금쟁이를 만난다. 셀린느와 눈이 마주친 손금쟁이는 제시와 셀린느가 있는 테이블로 찾아와 능숙하게 가격을 흥정하고 셀린느의 손금을 봐준다.

손금쟁이는 그 어떤 정보도 듣지 않고 셀린느가 여행중이라는 점과 제시와 잘 모르는 사이라는 점, 심지어 여권(여성의 권리) 신장에 관심이 많다는 점까지 정확히 알낸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덕담을 남기고 떠나는데 제시는 자신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는 손금쟁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셀린느는 어린 아이처럼 비꼬는 제시의 말투를 지적하고 이날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여느 오래된 연인들처럼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인다.  

'밀크쉐이크'라는 주제로 두 사람을 위한 시를 지어준 부랑자 시인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부랑자의 시는 기존에 있던 시에 '밀크쉐이크'라는 단어만 끼워 넣어 억지로 만든 엉터리 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시를 지어준다는 것은 꽤나 낭만적인 일이다. 결과적으로 손금쟁이와 거리의 시인은 제시와 셀린느의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비엔나에서의 하룻밤을 추억으로 삼고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한 제시와 셀린느는 기차역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만나고 싶다고 고백한다. 처음엔 5년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재회 시간은 1년으로 줄었다가 최종적으로 6개월로 줄어든다. 그리고 두 사람은 6개월 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해가 뜨기 전에' 아쉬운 작별을 한다. 그 때만 해도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9년이나 걸릴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비포 선라이즈 비포 트릴로지 에단 호크 줄리 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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