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비극을 영화와 문학으로 다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잊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비극을 초래한 원인을 진단하고 그에 맞선 사람들을 기리며, 어쩌면 반복될지 모를 비극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나치의 대학살을 일컫는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되새김질된 비극이다. 유태인뿐 아니라 집시와 소련군 포로, 동성애자, 정치범 등을 무작위로 잡아 수용했으며, 하루 수천 명씩 가스로 살해해 화장했다. 수용소는 특정 민족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때로는 금지된 생체실험까지 진행했다.
전쟁 막판에 이르러 독일이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했으나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당시의 참상이 역사에 기록됐다.

인간은 강하다. 홀로코스트가 파괴한 폐허 위에 인간은 다시 삶과 문명을 쌓아올렸다. 개중에서도 특정 국가와 사람들의 공헌이 두드러졌다.

스웨덴도 그중 하나다. 박해받는 유태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외교관이 된 라울 발렌베리가 헝가리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수만 명의 유태인에게 거짓 서류와 비자를 발급해 생명을 구한 일화는 유명하다. 발렌베리 뿐 아니다. 스웨덴은 전쟁이 끝난 뒤 수용소에서 나온 유태인들을 받아 보호했다. 병을 치료하고 건강이 회복되도록 도왔다.
 
117편의 러브레터 포스터

▲ 117편의 러브레터 포스터 ⓒ 알토미디어

 
2차 대전 뒤 스웨덴에 모여든 헝가리 유태인

<117편의 러브레터>는 이 시기 스웨덴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다. 통상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들이 전쟁 당시 아우슈비츠 등에 주목하거나 전후 개인의 트라우마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대중매체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전후 스웨덴 요양수용소에서의 이야기를 그린다. 심지어 장르는 절반쯤은 멜로다.

주인공은 헝가리 청년 미클로시(밀란 쉬러프 분)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스웨덴으로 보내진 미클로시는 스웨덴 요양수용소에서 뜻밖의 진단을 받게 된다. 폐 전체에 당대 기술로 치료할 수 없는 질환이 퍼져 있어 남은 시간이 6개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겨우 살아남았더니 불치병까지 걸렸다는 소식을 미클로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미클로시는 진단을 믿지 않기로 한다. 매일 새벽 열이 38도가 넘게 오르는 일이 반복됐지만 깨어있는 동안은 열심히 살아보기로 한다.

미클로시가 열심히 사는 방식은 조금은 독특하다. 미클로시는 일단 117편의 편지를 쓴다. 모두 러브레터다. 자신처럼 스웨덴 요양수용소에 있는 헝가리 여성들의 명단을 구한 뒤 일일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일종의 펜팔인데, 전쟁 전 헝가리에서 기자생활을 한 경험을 살려 흥미로운 내용을 가득 담았다.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컷

▲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컷 ⓒ 알토미디어

 
117편의 러브레터, 마음을 사로잡은 답장 한 통

요양수용소의 따분한 생활 속에서 미클로시의 편지는 효과를 발휘한다. 117편의 러브레터 중 십수통이 답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중에서 어느 한 통이 미클로시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미클로시의 어머니와 글씨체가 비슷하고 편지 하단에 젖은 듯 얼룩이 있는 편지다. 미클로시는 그 편지를 쓴 릴리(에모크 피티 분)가 자신의 짝이라고 믿는다.

열아홉 소녀 릴리도 병으로 몸이 좋지 않다. 그녀에게 날아든 미클로시의 편지는 일상을 이겨낼 힘이 되어준다. 헝가리의 가족들과 떨어져 스웨덴에서 살고 있는 릴리에겐 모든 게 불확실하다. 가족의 생사부터, 자신이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짐작할 수 없다.

미클로시의 적극적인 구애로 릴리는 조금씩 미클로시를 생각하게 된다. 차츰 그가 좋은 사람이란 확신이 들고, 그를 보게 될 날을 학수고대한다.

영화는 미클로시와 릴리의 사랑이야기다. 그들 앞을 가로막은 역경, 예컨대 요양수용소를 나설 수 없는 상황과 좋지 않은 몸 상태에도 서로를 향한 애정은 커져만 간다. 그들 앞을 가로막는 장애는 그들의 사랑을 더 낭만적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컷

▲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컷 ⓒ 알토미디어

 
헝가리 유태인들이 겪은 고통, 줄줄이 영화화

미클로시와 릴리의 연애담은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피테르 가르도시의 부모님이 겪은 실화다. 가르도시는 직접 그 이야기를 소설로 재구성했고 마침내 영화로 제작해 한국에서까지 개봉을 맞게 됐다. 가르도시는 부모님의 연애담으로부터 홀로코스트가 남긴 상처와 그를 이겨내는 인간 내면의 힘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는 불행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비추고 기꺼이 긍정하는 것이다.

근래 헝가리와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줄지어 개봉해 관심을 끌고 있다. <더 시크릿>과 <살아남은 사람들>, <117편의 러브레터>가 모두 그렇다. 이들 영화는 전쟁이 끝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거나 극복하려 애쓰거나 마침내 극복해내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각자 스릴러와 드라마, 멜로의 방식으로 홀로코스트의 상처를 담아내려 애썼다.

그중 어느 이야기가 진실한지, 또는 그 모두가 충분히 사실적인지를, 그와 같은 비극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선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들 모두가 역사적 비극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려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충실히 담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들 영화에 박수를 치고 싶다.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컷

▲ 117편의 러브레터 스틸컷 ⓒ 알토미디어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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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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