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중식당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맛있는 청혼>이 방영됐다. 당시만 해도 <사춘기>로 유명했던 정준을 제외하면 신인들 위주의 실험적인 캐스팅이었는데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 보면 <맛있는 청혼>의 신인들은 대부분 엄청난 스타로 성장했다. 실제로 올해 다시 <맛있는 청혼>의 출연진이었던 손예진과 소유진, 홍수현, 소지섭, 권상우, 지성을 동시에 캐스팅하려면 엄청난 제작비가 필요할 것이다.

1999년에 개봉한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도 마찬가지. <주유소 습격사건>에는 주연 4인방으로 출연했던 이성재, 유오성, 강성진, 유지태 외에도 이요원이 주유소 아르바이트, 김수로가 중국집 배달원, 유해진이 용가리, 이종혁이 용가리 패거리 중 한 명으로 출연했다. 당시 배우로 조금씩 얼굴을 알리던 차승원도 폭주 청년으로 특별출연했다. 당연히 다시 모으기 힘든 라인업으로 2009년에 개봉한 속편에서는 박영규를 제외한 멤버 전원이 교체됐다.

이렇듯 방영 혹은 개봉 당시에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배우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 톱스타로 성장해 새삼스럽게 재조명을 받는 드라마나 영화가 적지 않다. 1996년 <세 친구>를 통해 주목 받은 임순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황정민, 박해일, 류승범, 박원상, 오광록 등 충무로의 '믿고 보는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세월이 흐른 뒤에 더욱 애틋한 감성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개봉 당시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류승범은 포스터에 얼굴이 나오는 행운(?)을 누렸다.

개봉 당시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류승범은 포스터에 얼굴이 나오는 행운(?)을 누렸다. ⓒ CJ ENM

 
충무로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들의 무명 시절

황정민은 자타공인 최고의 흥행 배우다. <너는 내 운명>을 시작으로 <부당거래>, <신세계> 등 출연하는 영화마다 뛰어난 연기로 극찬을 받았던 황정민은 의외로 흥행 성적에서는 '초대박'과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2015년 한 해 <국제시장>과 <베테랑>을 통해 '연속 천만 배우(주연기준)'에 등극하면서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런 황정민도 초창기에는 <장군의 아들>과 <쉬리> 등에서 단역을 전전하며 무명생활을 했는데 황정민이 처음으로 '주연'에 이름을 올린 영화가 바로 <와이키키 브라더스>였다(황정민은 훗날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내 영화 인생의 '한 방'이었다"고 회상했다. 비록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흥행작은 아니었지만 황정민은 이후 <로드무비>, <바람난 가족> 등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연기 인생의 반전을 만들어 냈다.

연극계의 유망주였던 박해일도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스크린에 공식 데뷔했다. 주인공 성우(이얼 분)의 고교 시절을 연기한 박해일은 영화 속에서 특유의 멜로 감성을 뽐내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보여준 멜로 감성은 영화 <국화꽃 향기>의 주연 캐스팅으로 이어졌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주연과 조연, 선역과 악역을 가리지 않고 안정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박원상도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키보드 주자 정석으로 출연했다. 박원상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젊은 여자 손님만 보면 연주 중 튀는 행동을 하는 바람둥이 기질을 가진 멤버로 나온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보여준 박원상의 바람둥이 연기는 2004년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 제비 역을 통해 '완성형'이 됐다.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 성우를 연기한 이얼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중독>, <홀리데이>, <화려한 휴가> 등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2012년 단편영화 출연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얼은 2018년 <라이브>를 시작으로 <왓쳐>, <스토브리그>,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에 출연하며 다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억지 해피엔딩 지양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매력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음악인이자 생활인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소 쓸쓸한 감성의 음악 영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음악인이자 생활인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소 쓸쓸한 감성의 음악 영화다 ⓒ CJ ENM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의 고별공연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무대는 대형 스타디움이나 방송국 공개홀이 아닌 초라한 시골 나이트클럽이다. 사람들은 파트너를 안고 춤을 추는데 정신이 팔려 아무도 성우(이얼 분)의 마지막 멘트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리고 연주할 곳을 잃은 밴드는 성우의 고향 수안보로 향하는데 수안보로 가던 길의 휴게소에서 팀의 맏형이자 색소폰 주자 현구(오광록 분)마저 탈퇴를 선언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연주할 곳이 없어 시골의 나이트클럽이나 지방 축제를 전전하는 무명 밴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장난삼아 녹음해 둔 신곡 데모 테이프를 굴지의 음반 기획자가 우연히 들어 기적적으로 앨범을 발매해 대성공을 거둔다는 반전 스토리 따윈 없다. 그나마 해피엔딩이라고 보여준 마지막 장면이 3인조 혼성밴드로 재편된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가 여수의 나이트클럽에서 심수봉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며 현구가 가장 먼저 밴드를 떠나고 이어 정석(박원상 분)에게 애인을 빼앗긴 강수(황정민 분)도 팀을 탈퇴한다. 설상가상으로 정석마저 만나던 여자의 기둥서방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오른팔을 크게 다친다. 홀로 남은 성우는 생계를 위해 룸살롱의 노래방 백밴드로 나서는데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손님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성우에게 양주를 마시게 하더니 옷을 벗으라고 강요한다.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라면 굴욕에 못 이긴 주인공이 손님에게 주먹을 날리고 룸살롱에서 쫓겨나는 전개가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옷을 벗으라는 만취손님의 강요를 받은 성우는 만 원짜리 한 장을 팁으로 받고 전라의 상태로 기타를 연주한다. 성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이키키 호텔 나이트를 찾아가 보지만 호텔 나이트의 무대는 이미 자신이 악기를 가르쳤던 기태(류승범 분)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이야기가 가득한 영화지만 아역 장면에서는 가슴 설레는 멜로 라인도 나온다. 성우(아역 박해일 분)가 술에 취해 짝사랑하는 인희(문혜원 분)를 찾아가는 장면인데 성우는 그 자리에서 인희에게 악보 한 장을 건넨다. 술에 취한 성우가 준 비에 젖은 악보를 받은 인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 악보를 곱게 챙겨 집으로 들어간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쓴 곡을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인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건들거리는 연기의 일인자, 류승범이 보여준 떡잎 
 
 황정민(왼쪽)과 류승범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사생결단>과 <부당거래>에서 주연으로 함께 출연한다.

황정민(왼쪽)과 류승범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사생결단>과 <부당거래>에서 주연으로 함께 출연한다. ⓒ CJ ENM

 
지금이야 천만영화를 만든 스타 감독이 됐지만 류승완 감독도 초짜 독립 영화 감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그의 출세작으로 알려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단 6500만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는데 류승완 감독은 집에 있던 친동생 류승범까지 배우로 데뷔시켰다(당시만 해도 류승범은 배우에 전혀 뜻이 없었다고 한다).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그렇게 류승완-류승범이라는 보물 같은 형제를 한국 영화계에 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류승범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후 <다찌마와리>에서 와싱톤, <킬러들의 수다>에서 폭주족을 연기하며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류승범이 연기한 기태는 음악에 관심이 많은 와이키키 호텔 나이트의 웨이터로 그 특유의 건들거리는 연기가 매력적인 캐릭터다. 강수, 성우 등에게 부탁해 악기를 배우는데 결과적으로 기태가 와이키키 호텔 나이트의 무대를 독차지하면서 스승(?)인 성우의 일자리를 빼앗는 모양새가 된다. 류승범은 개봉 당시 이름이 알려진 배우가 거의 나오지 않았던 관계로 메인 포스터에 얼굴이 등장하는 행운도 누렸다. 

기태는 영화 중반까지 강수와 부딪히는 장면이 많은데 강수와 기태를 연기한 황정민과 류승범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에도 두 편의 영화에서 재회했다. 2006년 최호 감독의 <사생결단>에서는 악랄한 형사와 마약 판매상으로 만났고 2010년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부당거래>에서는 류승범이 비리검사, 황정민이 광수대 에이스 형사를 연기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황정민 류승범 임순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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