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 어린이 유괴 피해자들이 금자씨(이영애 분)가 잡은 가해자 백선생(최민식 분)을 어떤 방식으로 처단할지 회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간혹 경찰에 넘기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자식을 잃은 '분노의 힘' 앞에서 사회적 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은 힘을 잃었고 결국 백선생은 철저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친절한 금자씨>처럼 개인적인 복수를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가해자가 천하의 못된 놈이라도 피해자가 법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자행한다면 세상은 커다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멋진 액션으로 악을 소탕하는 <아저씨>의 원빈도 마지막엔 결국 경찰에게 잡혀 간다(담당형사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폼 나게 김새론을 안아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씻을 수 없는 고통에 비해 가해자들이 재판에서 지나치게 가벼운 벌을 받는걸 볼 때면 과연 법이 올바르게 범죄자들을 심판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적지 않다. 매튜 맥커너히와 산드라 블록,그리고 사무엘 L. 잭슨이 주연을 맡은 조엘 슈마허 감독의 1996년 개봉작 <타임 투 킬>은 피해자들의 분노와 개인적인 심판, 그리고 법이 가진 '정의'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법정 영화다.
 
 존 그리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타임 투 킬>에서 산드라 블록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존 그리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타임 투 킬>에서 산드라 블록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 오스카 픽쳐스

 
전성기 달리던 산드라 블록의 의외의 선택

독일계 미국인 산드라 블록은 할리우드에서 흥행력과 연기력을 동시에 인정받는 몇 안 되는 특급 여배우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렇듯 산드라 블록 역시 데뷔 초기에는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연기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1993년 산드라 블록은 1993년 실버스타 스텔론과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SF액션영화 <데몰리션맨>에서 형사 레니나 역을 맡으며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4년, 산드라 블록은 영화 <스피드>에서 과속으로 면허 정지를 당했지만 대형 버스까지 몰 수 있는 고양이 문신이 매력적인 여성 애니 포터를 연기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스피드>는 3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전세계에서 3억5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대박'을 쳤고 얀 드 봉 감독과 주연 배우 키아누 리브스, 그리고 산드라 블록은 할리우드에서 '귀하신 몸'으로 신분이 급상승했다.

산드라 블록은 <스피드> 이후 <당신이 잠든 사이에>와 <투 이프 바이 씨>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 출연하며 새로운 매력을 뽐냈고 액션 스릴러 <네트>에서는 단독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산드라 블록이 1996년 선택한 영화는 바로 법정 드라마 <타임 투 킬>이었다. <타임 투 킬>은 딸을 성폭행한 가해자를 살해한 아버지의 변호를 맡은 신참 변호사의 분투기를 그린 영화로 산드라 블록은 비중이 썩 크지 않은 준주연을 맡았다.

사실 출연분량이나 비중을 생각해 보면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뜨거운 배우였던 산드라 블록이 맡기엔 너무 작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산드라 블록은 흑인 아동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타임 투 킬>을 기꺼이 선택했고 <타임 투 킬>은 북미 1억 달러, 월드와이드 1억5000만 달러의 성적을 올리며 흥행에도 성공했다(하지만 <타임 투 킬>의 다음 작품으로 키아누 리브스가 빠진 <스피드2>를 선택한 것은 전혀 현명하지 못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미스 에이전트> 시리즈와 <투 윅스 노티스> 등으로 명성을 날린 산드라 블록은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블라인드 사이드>를 통해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2013년에는 <그래비티>를 통해 세계 흥행 7억 달러를 돌파했고 악당 스칼렛 오버킬의 목소리 연기를 했던 <미니언즈>와 넷플릭스 영화 <버드박스>까지 크게 흥행하면서 5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연기력과 흥행력을 겸비한 여성배우로 군림하고 있다. 

미안함을 먼저 이야기하는 딸, 더욱 커진 분노
 
 <타임 투 킬>이 첫 주연작이었던 매튜 맥커너히(왼쪽)는 2014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타임 투 킬>이 첫 주연작이었던 매튜 맥커너히(왼쪽)는 2014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 오스카 픽쳐스

 
슈퍼에 심부름을 갔던 어린 딸 아이가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술과 마약에 취한 건달들에게 무참하게 성폭행을 당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 칼(사무엘 L. 잭슨 분)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장 딸에게 달려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딸아이가 힘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본 칼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다. 그래도 칼은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힘들게 다가가 자신보다 더 힘들 토냐를 안아준다.

아빠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린 토냐는 계속 아빠를 부른다. 아빠를 부르는 토냐의 목소리가 마치 "왜 날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 "내가 아플 때 아빠는 대체 어디 있었어요?"라는 원망의 소리로 들리기에 칼의 마음은 더욱 괴롭다. 하지만 이어진 토냐의 이야기는 "(심부름 시킨) 식료품을 잃어 버려서 미안해요"였다. 분노가 폭발한 칼은 다음 날 법정으로 향하는 2명의 가해자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며 철저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응징을 가한다. 

칼의 변호를 맞게 된 신참 변호사 제이크(매튜 맥커너히 분)는 칼을 정신이상에 의한 우발적 살인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위험한 곳도 마다하지 않은 앨런(산드라 블록 분)의 활약으로 원고측 증인에게 피고측에 유리한 진술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제이크와 앨런의 노력에도 앨런은 KKK단을 자처하는 백인 폭력 단체에 납치되고 설상가상으로 피고측 증인마저 전과자로 밝혀져 배심원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누가 봐도 칼에게 불리했던 상황을 뒤집은 것은 제이크의 마지막 변론이었다. 제이크는 배심원들의 눈을 감게 하고 어느 어린 소녀가 건장하고 거친 남자들에게 성폭행 당하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한다. 제이크의 끔찍한 묘사에 배심원들을 비롯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칼의 딸 토냐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제이크는 마지막으로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소녀를 백인이라 생각하십시오" 

영화는 판사의 최종 판결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법정 문이 열리고 한 꼬마가 뛰어 나오면서 "무죄"라고 외치는 것으로 칼의 개인적인 복수가 법정에서 '정의'로 인정 받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즐기는 칼의 집에 제이크 부부가 찾아온다. 영화 <타임 투 킬>은 인종과 빈부, 피부색에 상관 없이 우리는 모두 존중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살인사건 용의자일 때도 숨길 수 없는 국장님의 카리스마
 
 <어벤저스>의 닉 퓨리 국장 사무엘 L. 잭슨(오른쪽)은 힘없는 흑인 소녀의 아버지 연기도 완벽하게 소화했다.

<어벤저스>의 닉 퓨리 국장 사무엘 L. 잭슨(오른쪽)은 힘없는 흑인 소녀의 아버지 연기도 완벽하게 소화했다. ⓒ 오스카 픽쳐스

 
<타임 투 킬>은 변호사 출신의 소설가 존 그리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 <타임 투 킬>은 1989년에 발매된 존 그리샴의 첫번째 소설이다. 소설이 발표된 지 7년 만에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존 그리샴 원작치고는 영화 제작이 제법 늦은 편이다(<펠리칸 브리프>나 <의뢰인>은 소설 출간 이듬 해 곧바로 영화가 완성된 바 있다). 그럼에도 <타임 투 킬>은 <야망의 함정>에 이어 존 그리샴 원작 영화 중 역대 흥행 2위에 올라 있다.

<타임 투 킬>은 변호사 제이크의 분투를 다루는 법정 드라마로 법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덜한 관객들에게는 2시간26분의 런닝타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아버지이자 가해자가 되는 칼의 감정을 실감나게 표현한 배우 사무엘 L. 잭슨의 호연으로 이야기의 긴장감이 극대화되고 자칫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가 입체적인 생명력을 얻었다. 

언제나 냉철하게 슈퍼 히어로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어벤저스>의 퓨리 국장님과 달리 <타임 투 킬>의 칼은 성폭행 당한 딸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해 가해자들을 직접 응징한다. 배움도 부족하고 말주변도 없지만 의외로 뛰어난 임기응변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흑인 교회에서 찾아와 변호 기금을 앞세워 제이크를 쫓아내려 할 때엔 남다른 카리스마로 변호 기금을 궁핍한 가족들의 생활비로 가게 만든 장면이 대표적이다.

지난 2017년 미성년자 성추행 미투로 위상이 추락한 케빈 스페이시는 검사로 출연해 매튜 맥커너히와 지략 대결을 벌인다. 재판에 승리하기 위해 비열한 수단을 동원하는 악역 같지만 재판이 끝난 후에는 쿨하게 자신의 패배를 시인한다. 이 밖에 2012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이자 2013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열심히 "치킨"을 외치며 한국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옥타비아 스펜서도 간호사 역할로 짧게 등장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타임 투 킬 산드라 블록 사무엘 L. 잭슨 매튜 맥커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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