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2개월 만의 컴백, 에픽하이는 지난 1월 18일 열 번째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2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 힙합 트리오 에픽하이의 귀환은 그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대대적인 조명과 함께 이뤄졌다. 국내 주요 음원 차트 석권은 물론 애플 아이튠즈, 스포티파이 차트에서도 선전하며 여느 케이팝 그룹도 부럽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오랜 팬들을 결집하는 에픽하이의 고유 감성과 문법, 멜로디 등 핵심 요소는 굳건하다. 분명 변했으나 변하지 않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또 새로운 < Epik High Is Here 上 >. 에픽하이가 여기에 있다.

지난 2월 22일 서울 압구정에 위치한 투컷의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난 에픽하이는 <신발장> 발매 때보다 더욱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멈춘 힘든 시기가 앨범에 영향을 주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대화와 진지한 설명에서는 베테랑의 여유가 느껴졌다. '마침표 같은 쉼표!'. 투컷의 표현처럼 에픽하이의 음악은 순간을 마감한다. 그리고 또 자연스레 다시 시작된다.
     
-< Epik High Is Here 上 >은 우울하면서도 독이 뻗친 듯, 가시가 뻗쳐 있는 앨범처럼 들린다. 전체적으로 톤도 다운되어 있고.
타블로: "앨범을 만들기 시작한 건 코로나 19 범유행 전이었다. 2020년 전까지는 으쌰 으쌰 하던 게 있었고, 힘찬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도 있었다. 초청받은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선보이고 싶은 곡들도 많았다. 원래는 더 세고 더 자극적인 작품을 기획 중이었다. 하지만 누가 지금 같은 상황을 상상했겠나. 많은 노래들을 제외했고, 메시지와 가사도 다듬어 고쳤다. 에픽하이처럼 많은 앨범을 낸 팀에겐 '최고의 앨범을 만들자!'는 개념보다는 '맞아, 이런 일들이 있었지', '그때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이 있었지'라며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결정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 만들어야지 싶었고."

-투컷과 미쓰라는 이번 앨범을 어떻게 정의하나.
투컷: "마침표 같은 쉼표! 마침표일수도 있지만 쉼표일 수도 있는. 아무래도 정규 10집이라 하면 꽉 찬 앨범처럼 보이지 않나. 작업 중에도 계속 그런 의미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타이틀이 부담되기도 했고.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으면 좋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작업에 임했다."

미쓰라: "앞서 멤버들이 이야기한 그대로다. 이런 예상치 못한 어려운 일을 겪은 것은 우리 셋 모두에게도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준비된 음악을 내고도 못 낼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최대한 이번 앨범에는 최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시간을 모두 쓰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것까지 털어놓자는 생각이었다."
 
 2월 22일 압구정 투컷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에픽하이. 왼쪽부터 타블로, 미쓰라진, DJ 투컷이다.

2월 22일 압구정 투컷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에픽하이. 왼쪽부터 타블로, 미쓰라진, DJ 투컷이다. ⓒ IZM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타블로가 쓴 앨범 속지가 떠올랐다. '매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모든 것을 바친다. 언젠가는 반드시 마지막 작품이 될 테니까…(I gave my all to every single one of our albums thinking that it will be our last, because one day it inevitably will be.)'. 이를 질문하자 타블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 중 하나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음악 하는 데 있어서는 적어도… 우리의 음악을 들어주는 팬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언젠가 어떤 작품이 마지막 앨범이 됐을 때 좋은 마무리, 좋은 작별 인사처럼 여겨졌으면 하는 거죠."

타블로, 미쓰라, 투컷의 커리어에는 언제나 우울이 깃들어 있다. 물론 그 정서가 팬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유명세를 가진 슈퍼스타에게 보통 이 정도 우울감은 찾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 그 감정에 대해서도 타블로는 "그게 내 정서"라며, "성공하고 돈을 벌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빠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행복해지면 불행이라는 게 왜 있겠냐"라 대답했다. 이어 대답도 담담했다. "우리 앨범이 우울한 99%는 저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행복한 순간들 역시 음악에 담아내지 않나.
타블로: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평소 내 기본 세팅이 어두운 거다. 다행히 노력해서 중간중간 그 좋은 순간이 많이 반복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다. 내게 의지하는 가족 친구들 사람들까지 우울한 감정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지 않나."

다시 한 번 앨범 속지 한 구절을 가져와봤다. '불평과 비난, 반박과 철회, 알리바이와 사과 대신에 노래를 쓴다(I write songs because the alternative is to write complaints and accusations and retorts and retractions and excusses and explanations and alibis and apologies.)'. 이에 대해서는 앞서와 조금 다른,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문장 그대로다. 내 노래가 우울함의 극치, 부정적인 에너지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감정을 세상에 보태지 않으려고 음악으로 만든다. 음악은 참 아름다운 예술 아닌가? 엄청나게 날카롭고 위협적이고 위험한 감정을 가져가도 완성되어 나올 때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변한다. 아무리 분노가 담긴 이야기라도 음악으로 표현하면 누군가에게는 꼭 위로가 된다. 만약 내가 음악을 안 만들었으면 불평만 늘어놓거나, 화만 내거나, 싸움을 걸거나 했겠지."
 
 에픽하이의 정서가 우울로 수렴하는 데 반해 그들의 발화 방식은 상당히 다채롭다. 이미 힙합이라는 범주를 넘어 대중가요의 영역에 진입했다 봐도 무방하다.

에픽하이의 정서가 우울로 수렴하는 데 반해 그들의 발화 방식은 상당히 다채롭다. 이미 힙합이라는 범주를 넘어 대중가요의 영역에 진입했다 봐도 무방하다. ⓒ IZM

 
-이런 정서를 표현하는 노래를 꼽아줄 수 있나.
미쓰라: "에픽하이의 음악에는 항상 그런 감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투컷: "나는 'End of the world'."
타블로: "'Rosario'다."

-'Rosario'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정서를 담은 곡인가?
미쓰라: "'Rosario'는 지금 같은 시기에 그냥 뭐… 그런 곡이다. (웃음)
타블로: "그냥 뭐… 그런 곡이지. (웃음)
미쓰라: "이런 메시지는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모두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레전드가 아니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 모두 레전드가 되고 싶다'라는 독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자 노력했다."

에픽하이의 팬들은 이번 앨범 중 최고의 곡으로 '수상소감'을 꼽는다. 이 노래는 보통 에픽하이 대부분과 다르게 타블로 대신 미쓰라의 랩으로 시작한다. "원래 제가 먼저였는데 바꿨죠. 미쓰라 랩으로 시작하는 게 더 진한 감성으로 느껴졌어요. 항상 앞뒤를 바꿔봐요." 타블로의 대답이다. 

-어떤 상황에서 만든 곡인가.
타블로: "투컷의 데모 비트 버전만 있었다. 거기다 가사를 쓰고 랩을 얹은 후 노래로 완성해나가는 단계가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수상소감이라는 제목은 없었다. 당시 가제는 '안티 히어로'였다. 그런데 그 제목이 너무 직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수상소감'이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새로운 제목 '수상소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달라.
타블로: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는 대체로 기분 좋은 순간 아닌가. 사람들이 잘했다고 손뼉 쳐주고, 성과를 트로피라는 물리적인 소재로 전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상식이라는 행사에는 굉장히 무서운 이면이 있다. 상을 줬다는 것은 언제든 그걸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기에… 꼭대기 같은 높은 위치의 기분을 한 번 맛보면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 더욱 쉽지 않다. 여담이지만 그런 의미로 시상식에 불참하기 시작했다. 불러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그게 족쇄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화려한 레드카펫 밟고 축하 공연하고, 각자 숙소로 가서 혼자 앉아있으면 그 감정의 편차가 너무 커서 가끔 견디기 힘들 때도 많았다."

이윽고 우울한 'End of the world'에 대해서도 물었다. 어쩌면 '세상의 끝'을 노래하는 에픽하이의 지향은 우울과 분노 등 부정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지점에서 확실하게 타블로가 선을 그었다.

"하지만!(웃음)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날 사랑해달라는 긍정의 표현도 숨겨져 있어요. 우린 없는 희망 얘기 못해요... 모든 에픽하이 노래가 그렇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이 힘들다는 것을 일단 이야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꾸고 힘을 내보자는 메시지를 담는 것. 이게 에픽하이의 지향이에요."

에픽하이의 정서가 우울로 수렴하는 데 반해 그들의 발화 방식은 상당히 다채롭다. 이미 힙합이라는 범주를 넘어 대중가요의 영역에 진입했다 봐도 무방하다. 라틴어쿠스틱 기타 리듬으로 출발하는 'Rosario'가 힙합 팬들에게 어필한다면 '내 얘기 같아'는 드럼 없는 오케스트라 구성이 귀를 잡아끈다. 헤이즈가 참여한 '내 얘기 같아'는 아예 드럼 비트가 없다. 투컷의 대답을 빌리자면 '앨범에서 가장 공들인 작품'이다. 

최적의 파트너만 섭외한다는 게스트와의 호흡도 정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싱어송라이터 김사월부터 우원재, 넉살, 창모 등 래퍼까지 섭렵했다. 전체 커리어에서 김종완, 아이유, 윤하, 헤이즈, 이하이 등 베스트 게스트들을 선정하는 그들은 '좋은 게스트는 녹음할 때부터 느낌이 온다'며 에픽하이의 음악을 빛내준 모든 참여진에 감사를 표했다.

문득 데뷔 초부터 끊임없이 장르 뮤지션의 덕목을 요구받았던 에픽하이의 도전 정신은 4집 < Remapping The Human Soul > 속 '노 장르, 저스트 뮤직(No Genre, Just Music.)' 문구가 떠올랐다.  

"어떻게 감히 힙합에 EDM을 넣냐, 어떻게 감히 힙합을 120 BPM으로 하냐. 공격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지금 모두가 그렇게 음악을 하고 있잖아요. 힙합 한다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못하면 그게 오히려 힙합이 아니지 않나요?"

에픽하이로 데뷔하기 전 록 밴드를 꿈꿨다는 타블로가 웃으며 이야기를 건넸다. 에픽하이의 안정 아래에는 치열한 도전과 고민, 자유로운 창작의 노력과 뚝심이 있었다.
 
 'Epik High Is Here 上'로 3년 2개월 만에 컴백을 알린 에픽하이. 장난기 넘치면서도 진지할 때는 진지한 모습에서 베테랑의 관록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표 같은 쉼표!'라는 투컷의 대답이 긴 여운을 남겼다.

'Epik High Is Here 上'로 3년 2개월 만에 컴백을 알린 에픽하이. 장난기 넘치면서도 진지할 때는 진지한 모습에서 베테랑의 관록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표 같은 쉼표!'라는 투컷의 대답이 긴 여운을 남겼다. ⓒ IZM

 
- < Epik High Is Here 下 >도 다채로운 작품인가?
타블로: "하편이 더욱 다양하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가 어떤 장르로 느껴지고 이런 논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내일 아침 일어났는데 컨트리 음악이 하고 싶다? 그럼 하는 거다. 왈츠를 하고 싶으면 그냥 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해보자'는 생각이다. 물론 실수한 적도 있고 빗나간 적도 있다. 처음 시도하는 장르라 표현하는 데 있어 팬들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뭐지' 싶었던 적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 되겠나. '에픽하이가 왜 이런 음악을 해?'라고 한들 꾸준히 계속해야 어느 날 능숙해져서 '에픽이 이런 음악도 해줘서 고맙다', '언젠가 이런 음악도 해달라' 얘기가 나오는 거다. 처음 해보는 건데 어떻게 잘하나. 완전히 색다른 걸 할 때 응원해줘야 한다."
투컷: "'트로트'도 있지 않나 (웃음). 지금 뒤 컴퓨터에 '하(下)' 편이 있다."
미쓰라: "안 들려 드릴 거다 (웃음)."

-이번 앨범을 빛낸 많은 게스트들에 대해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타블로: "'Rosario'의 지코는 입대 열흘 전에 다 해주고 뮤직비디오 촬영도 했다. 촬영장 와서 입대 소식을 알렸다. 쉬고 싶기도 했을 텐데 끝까지 열심히 열정적으로 해주는 모습이 너무 멋졌다. 뮤직비디오 나온 날 가장 먼저 문자 해주고… '정당방위'에서 창모가 마디 수 잘못 세서 여덟 마디 더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경쟁하자는 건 아니지만 많은 래퍼들이 참여하는 곡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마디 수가 같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창모는 느낌으로 작업을 해서인지 본인도 몇 마디인지를 모르고 우리에게 작업물을 보내줬다. 결과물을 들어보니 우원재, 넉살에게 이야기를 해줘야만 했다. 이렇게 됐다고 (웃음)."

에픽하이의 행보에서 독특한 것은 홍보 방식의 최신화다. 스포티파이와 더불어 틱톡 챌린지 등 다양한 SNS 홍보 수단을 통해 과거와 또 다른 재미있는 행보 및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Epik High Is Here 下 >로 다시 돌아올 에픽하이에게 < Epik High Is Here 上 >을 듣는 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물었다. 

"이번 작품으로 앨범이 완성된 게 아니다. < Epik High Is Here 下 >를 생각하며 애피타이저처럼 즐겨달라."(투컷)

"모든 관심이 정말 고맙다. 10장의 정규 앨범을 낸 팀이라 관심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핏대를 세워 누군가는 옹호하고 응원하고 누군가는 비판하는 모습이 행복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이 좋다. '에픽하이가 좋아서 음악을 듣는다'라는 반응을 더 이상 바라진 않는다. 우리 음악을 여러분들의 삶에 어떤 용도로 사용했으면 좋겠다. 에너지가 필요할 때, 면접을 앞두고 있을 때 'Rosario'를 듣다가 모든 걸 잊고 싶어 질 때는 '수상소감'이나 '내 얘기 같아' 같은 노래를 듣듯이. 생활에 자연스레 녹아들었으면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곡과 가사를 외워주시는 것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하지만… 당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그런 음악이 되었으면 좋겠다."(타블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대중음악웹진 이즘(www.izm.co.kr)에도 실렸습니다.
에픽하이 인터뷰 EPIK HIGH 음악 힙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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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에디터 (2013-2021) - 대중음악웹진 이즘(IZM) 편집장 (2019-2021) 메일 : zener1218@gmail.com 더 많은 글 : brunch.co.kr/@zenerkre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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