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허트 로커(The Hurt Locker)>는 전쟁영화이다. 이라크전쟁을 배경으로 폭발물 처리반에서 활동하는 미군의 이야기를 그렸다. 전쟁영화이고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사전 정보에 근거하여 관객이 이른바 스펙터클한 장면을 상상한다면 상상과는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고통에 사로잡힌 인간

<허트 로커>는 전쟁영화이지만 전쟁영화가 아니기도 하다. 전쟁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분명 전쟁영화이지만 전쟁 자체보다는 고통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는 측면에서 전쟁영화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조명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부수적으로 끌고 들어오거나 인간의 고통에 집중하며 전쟁을 잘 보이는 병풍으로 늘어놓는 등 강조점의 차이만 있을 뿐 전쟁과 인간 모두를 포착한다. <허트 로커>는 전쟁의 참상이란 '사실'이 그저 표면적 현상에 그치고, 인간 내면에 응집된 전쟁의 상흔이 전장에 우뚝 선 회오리바람처럼 고독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묘사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이다.

제목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미군이 쓰는 말로 알려진 'hurt locker'는 전쟁에서 물리적 고통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겪은 군인이 그것에 심리적으로 고착돼 빠져나오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상태를 말한다. 아마 그런 상태에 빠진 사람까지도 일컫지 싶다. 'hurt locker'라는 단어가 'hurt'와 'locker' 두 개를 결합한 것이니 쉽게 뜻이 와닿는다. 상처를 입고 봉인된 내면의 공간에 갇힌 사태를 상상하면 되겠다.

영화는 윌리엄 제임스(제레미 레너) 중사와 두 명의 부하 대원 샌본(안소니 마키)과 오웬(브라이언 게라그티)이라는 세 명의 이라크 참전 군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 명은 모두 '허트 로커'라 할 수 있다. 다만 윌리엄의 전임자로 영화 초반에 잠시 등장해 폭탄 해체 작업 중에 사망한 맷(가이 피어스)은 전사자이므로 '허트 로커'라고 할 수 없다. 사신이 잡아간 자는 더는 현실의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3인 1조의 폭발물 처리반 윌리엄, 샌본, 오웬은 모두 '허트 로커'이지만 양태와 정도는 다르다. 외부에서 보기엔 오웬이 고통과 공포에 가장 많이 사로잡힌 존재이다. 동시에 공포와 고통을 극복하려고 가장 많이 노력한 인물이다. 극중에서 오웬이 보여준 것처럼 공포와 고통을 표시하는 것이야말로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거머쥘 첫걸음이 된다.

또는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고통과 공포를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은 고통과 공포를 탈피할 가능성의 시사이면서 동시에 고통과 공포에 전적으로 장악당하지 않았다는 신호이다. 의사를 만나 상담하며 고통과 공포를 토로하는 '허트 로커' 오웬의 모습에서 어쩌면 그가 '로커'에서 풀려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엿보게 된다. 총상을 입고 후송당하면서 윌리엄에게 "네 아드레날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욕하며 적극적 반응을 보인 것에서, 오웬에게 자신이 표시 내는 것과 달리 또는 표시를 낸다는 그 사실로 인해 고통에 가장 덜 포획돼 있다는 성찰적 진단을 내릴 수 있겠다.

샌본은 오웬과 다르다. 위험에 대해 합리적 회피전략을 취한다. 그리하여 덜 공포스럽고 덜 고통스럽기를 기대하지만 혹은 공포와 고통을 외면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알게 되듯 공포와 고통에 전면적으로 장악되어버린다. 그럼에도 군인이든 다른 직업이든 현실에서 가장 바람직한 자세를 지닌 인간형이란 주변의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자신은 공포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뿐더러 결코 영웅이 되지는 못한다.
윌리엄은 문제적 인물이다. 마치 공포와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위험을 대하는 태도는 무모하고 전투적이다. 주위의 시선으론 얼핏 죽음 따위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윌리엄이야말로 전형적인 '허트 로커'임을 약간의 눈썰미가 있는 관객이라면 한눈에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에 사로잡히다가 고통 자체가 된 사람

참전해서 숨지거나 다치지 않더라도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사람이 종종 목격된다. 폭발물 처리 요원으로 폭발물에 가장 가까이 가는 윌리엄은 전쟁의 통상적 위험을 훨씬 초과하는 극단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 극단의 위험에 맞서는 윌리엄의 행동양식은 폭탄을 해체하는 와중에 방호복을 벗는 등 외부에 존재하는 위험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이 위험을 좋아하는 기질 때문인지, 즉 극중 인물 오웬이 지적한 대로 아드레날린 분비량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공포와 고통에 대한 윌리엄만의 특유한 방어기제인지는 불확실하다. 폭발물 해체 현장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양식을 통해 영화 속의 윌리엄은 자신을 향한 위험을 증폭시킬 뿐(이것도 문제이지만) 아니라, 폭발물 해체 현장 밖에서 이상행동을 보인다.

이상행동 중에는 아들에 대한 태도가 두드러진다. 미국에 있는 어린 아들과 아내에게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가능한 한 관계를 단절하려는 모습을 보인 것과 반대로 복무 중인 이라크 미군기지 앞의 이라크 소년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인간폭탄이 되어 죽어 있는 다른 이라크 소년의 시신을 작전 중에 발견한 윌리엄은 폭파해서 해체하려던 당초 방침을 취소하고 봉합한 소년의 배의 실밥을 일일이 따가며 시신의 배 안에서 폭탄을 꺼낸 다음 그 시신을 안고 나와 응급차에 실어 보낸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라크 소년의 시신을 보전한 윌리엄은 개인적 복수까지 기도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기지 앞의 소년과 숨진 소년은 동일인이 아니었고 정작 살아있는 기지 앞 소년을 만나서는 외면한다.

폭발물 해체 현장에서 보이는 로봇 같은 담력과 해체 현장 밖의 이상행동은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전하는 영화 언어에서 동의어에 속한다. 살펴보았듯, 공포와 고통에 대해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하거나, 그러한 시도가 실패해 사실상 고통과 공포에 장악된 채 어렵사리 가짜 평정을 이어가는 방편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공포와 고통이 되어 버리는 가장 극단적인 해체의 방편도 있다. 상처 입어 고통받고 두려움에 떠는 자아는 극단적 해체 이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물쇠가 채워져 봉인된다.

열쇠마저 잃어버린 상황이어서 더는 자아를 대면할 수 없게 된다. 단지, 윌리엄이 인간폭탄을 해체하려다가 실패해 폭발 충격에 날아가는 영화 후반부 장면 같은 데서나 아주 잠깐 자아가 봉인을 뚫고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죽지는 않았지만 쓰러진 채 피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윌리엄의 눈에 들어온 비상하는 연의 모습. 연의 비상과 흡사한 잠깐의 봉인 해제는 아주 예외적인 삶의 순간이다.

이라크 복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어린 아들, 아내와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윌리엄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아주 예외적인 삶의 순간을 찾아서라고 말해도 좋겠다. 그곳에서 자아가 해체되었지만, 본원적으로 그 해체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그곳에서만 드물게 봉인이 풀리는 기회를 얻게 된다. 죽음에 더 가까이 갈수록 삶을 느낄 수 있는 폐쇄회로에 빠진 게 말하자면 가장 중증의 '허트 로커'인 셈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올라가는 "The rush of battle is a potent and often lethal addiction, for war is a drug."이란 자막이 말하듯 전쟁은 마약이어서 병사는 전장에 중독된다. 강력하고 치명적 중독에 휩싸인 어떤 병사는 '허트 로커'가 되어 영화의 윌리엄처럼 전장을 유령으로 떠돌게 된다. 11일 국내 재개봉.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영화를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