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폭로'가 이어지는 것을 보자니 착잡하다. 회복되지 못한 피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제는 말하겠다'의 결기를 담은 폭로는 역설적으로, '그때는 말할 수 없었다'를 증명하고 있기에 안타깝다. 그때 그들은 왜 말할 수 없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고통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걸까.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는 지금 주의 깊게 짚어봐야 할 이 질문들을 의미심장하게 던지고 있다.
 
학교 폭력 피해자가 교사가 되어 학교에 돌아왔다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의 한 장면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의 한 장면 ⓒ KBS

 
지독한 학교 폭력을 당한 아이가 있었다. 폭력을 호소했지만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긋지긋하게 날아드는 주먹을 피해 도망치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이 아이가 교사가 되어 폭력의 현장인 학교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교사가 된 학교폭력 피해자 진우(김대건)는 그때의 상처를 늘 새로이 다짐하기 위해 자신의 책상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학교'라는 슬로건을 붙여 놓았다. 자신이 당하는 폭력을 담임 선생님에게 알렸던 그날, 멈추리라 믿었던 가해자의 주먹이 더 센 펀치로 날아들던 그날, 그는 제자의 피맺힌 호소를 외면했던 저런 나쁜 교사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서슬 퍼렀던 그의 다짐은 교사가 된 지금, 여전히 서늘한 날을 세우고 있을까.
 
진우는 학교폭력의 피해를 잊었다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니던 고등학교를 떠나게 만든 그때의 가해자와 맞닥뜨리면서 깨달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완쾌했다고 믿었던 피해의 바이러스는 잠복되어 있었을 뿐, 자신은 여전히 피해 바이러스의 숙주였다. 그때의 고통은 플래시백을 터뜨리며 날것 그대로 튀어나와 진우를 가격했다. 그는 처참히 무너졌다. 피해자였던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가해자 유강(유성필)에게 진우의 몸과 마음은 분노와 참담함으로 북처럼 울렸다.
 
사진처럼 박힌 트라우마가 엄습할 때 피해자는 속수무책이다. 그때의 현장이 '새겨지는' 혹은 '뇌리에 박히게 되는' 까닭은 피해자가 고통의 현장을 정상적인 기억으로 남기는 과정을 누락했기 때문이다. 모두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냥 조용히 넘기자고 몰아세웠던 고통의 기억은 피해를 무화시킨다. 죽을 만큼 억울한데 누구도 그 고통에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면 피해는 피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의 기억은 트리거만 당겨지면 토씨 하나 변형되지 않은 채 플래시백처럼 튀어나오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야말로 피해자는 그 피해의 현장에 갇혀있는 셈이다.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즉 몸과 뇌에 각인된 고통이 기억이 되려면,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는 피해자의 증언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고통스런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병적인 기억'은 이야기 속의 기억으로 바뀌게 되고, 이 고통스런 과정을 경유해 변화하고 있는 자아를 다시 세우게 되는 것이다.

기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기억에 대해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로 복기되는 고통을 들으며 기억을 정면 돌파하는 이 과정이 바로 회복인 것이다. 이 과정이 생략된 트라우마 피해자의 고통은 절대 봉인되지 않는다(수잔 브라이슨,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참고).
 
가해의 메카니즘엔 조력자가 있다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의 한 장면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의 한 장면 ⓒ KBS

 
가해자를 마주하자 트라우마가 튀어나와 고통스런 진우는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평정심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진우의 앞에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다. 담임으로 배정받은 진우 학급에는 학교 재단 이사장의 손녀 희진(우다비)이 있다. 희진은 진우의 트라우마를 알아채고 거절하기 힘든 거래를 제안해 온다.

조부의 '빽'을 두른 교내 최고 무법자 희진은, 단지 '재미'를 위해 '왕따'로 지정한 한 아이를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괴롭혀왔다. 교육부가 발표한 '2020 학교폭력 실태 전수조사'를 보면, 가해 이유 중 '장난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가 가장 많은데, 드라마에 펼쳐지는 희진의 경악할 수준의 가학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희진이 고른 단지 재미만을 위한 가해의 희생양은 조손 가정의 은서(이연)다.
 
은서는 오랫동안 학교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왔다. 방어막이 돼 줄 부모가 없는 은서에게 학교 재단 이사장의 손녀 희진은 대적할 수 없는 상대다. 싸울 상대가 아니니 대들지 않는다. 자신의 피해에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구조에서 그런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은서의 피해를 감지한 담임 진우가 내막을 캐자, "애매하게 굴지 말고 외면하"라는 은지의 도발적 반응은 이 아이가 처해왔던 고립무원의 지형을 드러낸다.

은서의 고독한 처지는 진우를 과거로 회귀시킨다. 피해를 알렸지만 외면했던 과거의 선생님이 오롯이 떠오르자, 진우는 자신의 교사됨이 그때 그 선생님과 얼마나 다른가, 뼈 아프게 돌아본다. 해서 은서가 진우에게 "도와 주세요 선생님, 안 해봤을 거 같아요?"라며 쏘아붙이는 사나움은 오히려, 그 애가 보낼 수 있는 가장 절박한 SOS 신호임을 알아챈다. 같은 고통을 겪어본 자는 그 고통이 내뿜는 징후적 공기를 예민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희진이 기간제 교사인 진우에게 했던 맹랑한 제안은 정규직 교사로의 전환이었다.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젊은이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희진의 제안에 흔들리는 진우를 손가락질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진우가 희진의 폭력에 타협했다면, 시청자는 깊이 상처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진우는 안정된 미래를 위해 과거의 아픔을 저당잡지 않았다. 그가 어려운 선택을 한 데엔 교사(어른)로서의 책임감이 컸겠지만, 더 근본적인 발로는 피해자의 고통에 그 누구보다 공명했던 연대감이었을 것이다. 피해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피해의식을 연대감으로 승화시킨 진우의 용기 있는 선택은, '학폭 미투'가 연일 터져 나오고 있는 현실에 함의하는 바가 크다.
 
할머니 상을 치르고 자퇴하러 온 은서에게 진우가 진심을 다해 건네는 말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의 입장을 절실히 대변한다. 자퇴라는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폭력에서 도망치려는 은서에게, 진우는 같은 학교폭력 피해를 겪은 앨라이(연대자)가 되어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니가 평생 남아. 계속 괴롭혀." 은서의 피해를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은 어쩌면, 극복되지 못한 고통의 트라우마였음을 진우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는 은서가 자기와 같은 불행한 어른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기인 것이다.
 
진우는 어쩌면 가해의 방관자이자 조력자일지도 모르는 교실의 아이들에게 자신 역시 치명적인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음을 용기 있게 증언한다.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면, 희진이 벌인 가해의 증거를 과속방지턱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희진의 폭력의 질주를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직을 건 진우는 아이들에게 희진이 벌인 폭력을 증언해달라고 호소한다. 냉담했던 아이들이 진우에게 마음을 열고 그에게 가해의 증거를 속속 전달하기 시작한다. 두려움을 걷어낸 아이들이 용감한 증인이 되고 있었다. 정교사직을 내던지고 피해자인 은서와 연대하기로 결심한 진우는 은서의 피해를 학교폭력위원회에 회부하는 승부수를 던지며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피해를 회복하는 데에 공동체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가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의 한 장면

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의 한 장면 ⓒ KBS

 
단막극이라는 드라마의 특성상 진우의 결연한 선택(학교폭력위원회에 은서의 피해를 회부)이 드라마의 엔딩이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우가 띄운 승부수는 기실, 가해와 피해를 지정하는 방편일 뿐 피해의 진정한 회복으로 나아가는 데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학교폭력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학교에 학교폭력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해 단지 처벌만이 학교 폭력의 해결책인 양 학교 폭력 대처를 매뉴얼화했다. 그렇다고 학교 폭력이 줄어들었을까? 전혀 아니다. 매뉴얼화된 학교 폭력 프로세스는 사건 당사자 간 비밀로 다루어지고, 사건 공동체의 일원들은 누구에게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다. 어떤 아이가 사라지고 나면 피해자나 가해자였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이렇게 처벌 만능으로 흐른 학교 폭력 대처는 가해의 재발을 막고 피해를 회복시켜야 하는 공동체의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가해와 피해의 역학이 절차를 만족시키는 진정성 없는 사과와 처벌로만 축소되는 과정에서(힘의 불균형으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피해자인 가해자가 생기는 경우도 발생한다), 가해자가 어떤 성찰을 할 수 있고 피해자는 어떤 회복을 할 수 있을까?
 
폭력이 일어나면 가해와 피해를 쉬쉬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만이 당사자인 문제로 가져가서는 안 된다. 가해와 피해가 벌어진 공동체의 일원 모두를 당사자로 보고 가해와 피해의 메커니즘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폭력 피해는 그저 불운한 개인사가 되고 만다. 폭력이 암묵적인 질서로 자리 잡는 것이 가능한 것은, 공동체의 모든 일원이 가해의 조력자일 수 있는 가해와 피해의 중층적 위치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피해자가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공동체가 피해를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처벌로 정의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어떤 회복을 원하는 가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에 제대로 공명하지 않은 채, 처벌했으니 해결되었다거나 사과했으니 끝났다거나(이조차도 부재한 경우도 허다하지만) 하는 공동체의 불능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을 지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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