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채널 <노는언니>에 출연했던 이재영과 이다영.

E채널 <노는언니>에 출연했던 이재영과 이다영. ⓒ E채널

 
"키가 엄청 작으시네... 키 몇이에요?"
 
설마, 속삭이듯 언니에게 건넨 말이 끝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스물다섯 쌍둥이 동생의 직구는 거침이 없었다. 초면인 상대가 "154cm"라고 답하자 돌아온 답은 이랬다. 상대는 전 베테랑 펜싱선수 남현희였고, 그 쌍둥이는 짐작했다시피 이재영과 이다영 자매였다.
 
"부럽다. 전 작고 싶은데."(이재영)
"네? 전 (1)60cm만 넘었으면 좋겠는데." (남현희)
"(언니 이재영을 보며) 나도 딱 (1)70cm 정도만." (이다영)
 

어색한 듯 남현희가 헛웃음을 뱉어냈다. 제작진도 '어색'이란 자막을 큼지막히 달았다. 이어 이다영이 남현희에게 나이를 물었고, "마흔이에요"란 답이 돌아오자 이다영은 "엄청 동안이시다"라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최근 지난해 8월 방송된 E채널 <노는 언니> 1회의 오프닝 장면이 다시 회자되는 중이다.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소속 쌍둥이 자매 이재영·이다영 선수의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 가해 사실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면서다. 쌍둥이 자매의 과거 일거수일투족이 소환되면서 <노는 언니> 속 한 장면도 '인성 논란'을 보태는데 일조했다.
 
사실 어색할 만한 상황이 맞았다. 예능 프로그램에 처음 출연하는, 나이대도 다른 전현직 운동선수들이 처음 카메라 앞에 만났고, 하필 쌍둥이 자매와 남현희가 여타 멤버가 도착하기 전 최초로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노는 언니>를 몰아보기 했을 때, 이 장면이 조금 어색하긴 했더랬다. 키가 작은 초면 상대에게 키가 몇이냐고 물어보는 장신의 배구선수들이라니. 물론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는 임기응변에서 비롯된 것일 순 있었다. 더구나 쌍둥이 자매는 박세리, 곽민정, 정유인 등 언니나 동년배 출연자들이 등장한 이후로는 (방송용 편집을 통해서는) 별다른 탈 없이 무리에 잘 섞여 들었다.
 
방송 자체도 여자 스포츠선수들을 한데 모은 남다른 예능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오프닝 장면에서 보여준 쌍둥이 자매의 어찌 보면 무례할 수 있는 태도 역시도 그저 어색함이 빚어낸 방송용 멘트일 수 있겠다 싶었고.

한편으론 1회는 물론 이후에도 각기 다른 종목 선수들을 만나 각자 다른 환경과 노고에 대해 묻고 답하는 이들 선수들의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과연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였을지 모를 고 최숙현 선수 등 체육계 내 각종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해선 어떤 생각일지도 궁금했고. 
 
 겨울철 인기 실내 스포츠 입지를 굳혀가던 한국 프로배구 V리그가 '학교 폭력(학폭) 논란'으로 휘청이고 있다.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 의혹이 불거진 흥국생명의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의혹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둘은 현재 팀 숙소를 떠난 상태다.

사진은 지난 2020년 10월 경기에 출전한 이재영과 이다영(왼쪽).

이다영, 이재영 ⓒ 연합뉴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두 학교폭력 피해자에게는 2차 피해자일 수 있겠다 싶었다. 스포츠 뉴스도, 스포츠 프로그램도 아닌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가해자인 쌍둥이 자매의 웃고 떠드는 그 행복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피해자의 마음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쉬이 짐작하기 어려우리라.
 
5.18 광주의 피해자 중 한명인 소설 <봄날>의 소설가 임철우는 1980년 이후 뉴스에 나오는 전두환씨의 얼굴을 마주보며 TV 브라운관 앞에서 매일을 절망했다고 한다. 좁게는 학교 폭력이든 성폭력이든, TV 등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유명인에게 폭력의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의 심정도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건이 일파만파 커진 후 E채널은 물론 넷플릭스 역시 쌍둥이 자매가 출연한 회 차의 다시 보기를 중지한 상태다. 하지만 이후로도 사태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쌍둥이 자매와 어머니 김경희 전 배구 국가대표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 되는 중이다.
 
최근 한국배구연맹(KOVO)이 연맹 차원에서 쌍둥이 자매에게 징계를 내릴 수 없다며 '학폭'관련 규정을 신설하겠다고 입장을 밝힌 것도 여론 악화에 기름을 붓는데 일조했다. 그러는 사이, 이번 사건이 일깨우는 교훈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성적지상주의라는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와 학교 폭력의 심각성 말이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일벌백계' 의견들 


"여긴 동네 배구하는 곳이 아니다. 보호해야 할 초등학생이 있는 곳도 아니다."
 
지난 16일 인천 계양체육관 홈경기에 앞서 취재진 앞에 선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의 말이다. 카메라 앞에서 고개 숙여 소속 선수의 학교 폭력 의혹에 사과한 박 감독은 이재영·이다영 자매의 어머니인 국가대표 세터 출신 김경희씨의 '훈련 참관' 의혹에 대해선 강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앞서 한 네티즌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 글을 통해 배구계에서 직접 겪은 일화라며 김씨가 '배구계의 최순실'로 군림해왔다는 주장을 펼쳤다. 엇비슷한 증언이 인터넷 상에서 퍼졌고, 김씨가 주목을 받게 되자 김씨의 배구계 선배이기도 한 박 감독이 "프로배구 팀의 훈련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 나뿐 아닌, 모든 프로 지도자들에게 실례가 되는 얘기"라며 이를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이나 배구계 목소리는 조금 다른 듯 싶다.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하면, 배구 국가대표 출신인 김씨의 존재가 배구계나 학생 시절부터 쌍둥이 자매의 소속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출중한 쌍둥이 자매의 경기력이 그러한 김씨의 영향력을 키우는 한편 쌍둥이 자매에게도 무소불위와 같은 권력을 쥐어줬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실력이 뛰어나고 팀에, 협회에 기여도가 높은 선수라면, 쌍둥이 자매와 같이 팀 분위기를 해치고 피해자까지 양산하는 부정이나 치부를 감싸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이 결국 발목을 잡았지만, 그러한 성적지상주의가 쌍둥이 자매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번 사태로 이어진 것 아니겠는가.
 
 체육시민연대, 인권과 스포츠 등 스포츠ㆍ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고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체육시민연대, 인권과 스포츠 등 스포츠ㆍ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지난해 7월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고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가까운 예로, 고 최숙현 선수를 비극적 결말로 몰아간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 집단 폭력 사건 또한 금메달리스트인 선배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줬던 것이 사건의 도화선 아니었는가. 해당 사건과 이번 사건의 가장 다른 점은 감독을 비롯한 코팅 스태프조차 그 폭력을 용인하는 것도 모자라 본인들이 앞장서 폭력을 선도하는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이겠지만.
 
국가대표 자격 박탈 등 쌍둥이 자매를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나타났다(관련 기사 : 학폭 선수 국가대표 박탈 "일벌백계" 70% 압도적 http://omn.kr/1s3jl). 체육계 폭력도 문제지만 학교 폭력의 폐해에 공감하고 피해자 입장에 선 이들이 다수라는 방증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가해자인 쌍둥이 자매의 방송 출연을 목도해야 했던 피해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번 계기로 더 악랄한 방향으로 심화되고, 과거와는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다변화되는 학교 폭력의 현 단계를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해당 조사에서도 "국가대표 자격박탈은 지나치다"는 응답은 23.8%에 그쳤다. 학교폭력의 기억과 심리적, 물리적으로 좀 더 가까운 2030세대일 수록 일벌백계에 대한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울러, 고 최숙현 선수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사건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언론 보도가 쏟아지는 중이다. "배구계만의 문제가 아니다"와 같은 필요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보도 역시 적지 않다. 금번 사건이 체육계에 만연한 성적지상주의와 갈수록 심각성을 더하는 학교 폭력 가해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를 바라는 대다수 이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보도 행태라 할 수 있다. 그 성적주의와 체육계 학교 폭력은 결국 같은 뿌리로 연결될 테고. 

우리 사회는 과연 그런 자정과 빠른 회복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출연자들 전체가 체육계에서 잔뼈가 굵은 은퇴 선수가나 현직 선수로 이뤄진 <노는 언니>를 보며 일말의 궁금증과 불편함이 교차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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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어제는 영화기자, 오늘은 시나리오 작가, 프리랜서 기자. https://brunch.co.kr/@hasungtae 기고 청탁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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