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다가와 예절바른 말투로 "저를 좀 도와주시겠어요?"라고 말을 건넨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매력적이다. 흘깃 바라보니 귀공자처럼 품위있게 잘생긴 훈남이다. 거기에 상냥한 표정까지 곁들였다.

그 순간, 그가 선량한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황급히 어딜 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 같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않는다는데,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말쑥하고 매너있게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다가오는 이한테 차갑게 굴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스틸컷: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

▲ 영화 스틸컷: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 ⓒ 넷플릭스

 
 
테드 번디(Theodore Robert Bundy, 1946-1989)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밝혀진 사건만으로 최소 30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 두 번의 탈옥에 성공한 범죄자, 사형으로 생을 마감한 사형수, 누명을 벗겠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시작한 거지만 결국은 연쇄살인의 행위와 심리를 구술해 녹음테이프로 남기게 된 남자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는 그 녹음테이프(총 100시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전체 4화이며, 마지막화(74분)를 제외하고는 상영시간이 50-60분이다.
 
영화 포스터: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

▲ 영화 포스터: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 ⓒ 넷플릭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를 짚고 가기로 하자. 미국에서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가 활동할 1970년대 중후반 영국에서도 연쇄살인마(피터 섯클리프)가 나타났었다. 이 두 연쇄살인마는 담당형사들의 혼신을 다한 열정적 수사결과로 체포된 게 아니고, 도로에서의 사소한(?) 교통위반 사항 때문에 순찰 돌던 교통경찰에게 의심을 받아 검거되어, 추후 보완수사와 재판을 통해 범인으로 확정되는 과정을 거쳤다. 또, 공교롭게도 이 두 연쇄살인마의 타겟은 젊은 여성들이었다. 두 범죄자의 살인행위는 여성에 대한, 여성만을 향한 폭력이었던 것이다.
 
두 연쇄살인마를 다룬 각각의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어있다. 번디를 다룬 다큐멘터리 <살인을 말하다>는 1970년대 활발히 꽃피운 여성운동의 여파로 인한 여성의 지위향상, 그리고 포르노그라피에 영향받았다는 번디 자신의 구술을 예시하며(포르노그라피의 실제장면들을 반복해서 보여줌),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를 건드린다.

섯클리프를 다룬 다큐멘터리 <더 리퍼(The Ripper)>는 일반여성과 성매매여성을 자의적으로 구분하는 사회적 선입견 때문에 살인사건이 적합하게 해결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재발 또한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역시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두 다큐멘터리는 공히 두 연쇄살인마가 당대에 "멀쩡한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번 언급한다. "멀쩡한 남성"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살인행위가 뜻밖이거나 갑작스럽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맞다. 멀쩡한 남성은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런데 '멀쩡하다'는 것이 외모. 표정. 행동거지를 가리키는 거라면, 우리는 이 개념을 현실의 사람에 적용할 때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외모, 표정, 행동거지로 한 사람을 판단하는 일반화를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논리가 여성들에게도 공평히 적용되도록 유의해야 한다. 외모, 표정, 행동거지 면에서 여성들을 자의적으로 분류해 확대일반화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멀쩡한 남성 번디는 호감가는 외모와 표정, 그리고 행동거지의 소유자였다. 음성도 매력적이었고 말할 때의 태도와 발음도 좋았다. 그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비록 자기가 원하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로스쿨에서 공부를 했다. 졸업 후 그는 시애틀의 '범죄위원회(여성범죄문제 연구)'에서 일했으며, 공화당 선거운동원으로도 활동했다. 지인들에게 예의바르게 굴었으며, 이웃에게 딱히 해를 끼친 적도 없다. 남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대중에게 주목받는 것은 적극적으로 즐기는 한편, 여성과의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는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편이었다는 점이다. 번디는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고 털어놓았다.
 
다큐멘터리 <살인을 말하다>에서 번디는 자기에 관한 일에 대하여 '내가(1인칭)'로 표현할 때는 자기자랑만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어릴 적 미혼모로 자기를 출산한 엄마를 한동안 '누나'로 알고 자랐으나 불만이 없었다고 말했고, 할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받았으나 괜찮았다고 강조했으며, 학교와 동네에서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으나 왕따 당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공부를 곧잘 했다고 뻐겼지만, 실제성적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가 기자 스티븐 미쇼(Stephen Michaud)를 불러 인터뷰를 요구한 진짜 이유는,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며 자기자랑을 실컷 떠들어보고자 했던 것이 틀림없다.
 
허나,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 번디의 자화자찬을 중단시키고 싶었던 스티븐은 그에게 한 가지 깜짝 제안을 한다. "심리학전공자로서 연쇄살인마를 '그(3인칭)'로 지칭하여 그 행위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자 번디는 마치 자신이 미국 최고의 심리학자라도 된 양, 연쇄살인마의 행위와 심리를 분석해나가기 시작했다. 스티븐은 번디가 구술한 연쇄살인마의 행위와 심리를, 번디 자신의 행위와 심리로 볼 수 있다고 풀이한다. 아닌 게 아니라 <살인을 말하다>를 계속 보다 보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된다.    
 
번디는 곧장 연쇄살인마에 '빙의'하여 (결국 그 자신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연쇄살인의 의도, 방법, 결과들을 설명하며 해석한다. 그 해석 중 소름끼치도록 섬뜩했던 것 중의 하나는, 연쇄살인마가 고통스러울 만큼 강렬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인을 저질렀다는 번디의 논리다.
 
그 논리를 풀어가기 위해 번디는 먼저 하나의 가설을 세운다. 한 젊은이가 어떤 불가사의한 욕망 때문에 목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여성에 대한 성폭력 이미지로 가득한 사도-매저키스트적 포르노그라피 이미지들이 그 젊은이의 고통을 숙성(?!)시킨다. 그 젊은이가 인간관계 안에서 분노, 좌절 등 '자부심에 상처를 입는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겪으면서 고통은 극도로 올라간다.

마침내 그 젊은이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을 해치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그 젊은이는 목표물을 발견한다. 그녀를 무자비하게 성폭행한다. 성폭행 직후 그녀를 안전하게 되돌려보내면 안 되니까, 그녀를 죽인다. 그런 다음 또다른 목표물을 물색한다. 여기까지 말하고 번디는 간략히 덧붙인다. "그의 입장에서 살인은 증거인멸 차원의 행위다."
 
다큐멘터리 <살인을 말하다>는 우선 아동학대의 후유증과 포르노그라피의 폐해를 다룬다. 이 문제는 우리가 지혜롭게 처리해야 할 심각한 사회병리적 측면이기도 하다. 한편 <살인을 말하다>는 인간의 극단적 이기주의의 문제에도 매우 진지하게 접근한다. 한 인간이 자기의 욕망이나 고통의 해소를 위하여 타인을 끌어들이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하여 타인을 재료(물건)처럼 사용하는 것, 자기의 어떤 행동이 발각되지 않도록 타인의 입을 막는 것 등.

그런데, 가만 보면 그 같은 행위들은 평범한(!) 우리도 (갈등 상황, 혹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칫 시도해볼까 생각해봤던 행위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번디처럼 하지 않는다. 이기적 행위를 극단적으로, 저런 방식으로 전격 실행하지는 않는 것이다. (번디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가벼운 이기적 시도일지라도 그것 자체를 자제하거나 조절함으로써 무겁고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예방할 내면의 정신적 힘이 (번디와 달리) 우리 스스로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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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h Arendt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출간작가 | ‘문학공간’ 등단 에세이스트 | ‘기억과 치유의 글쓰기(Writing Memories for Healing)’ 강사 | She calls herself as a ‘public intellectual(지식소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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