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눈물의 은퇴선언을 하며 각자의 삶을 위해 떠났을 때 남겨진 대중들, 특히 청소년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청소년들에게 서태지와 아이들은 단순한 인기가수가 아닌 말 그대로 청소년들의 문화를 이끌어 주던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슬픔은 어른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 그들을 위로해 줄 새로운 영웅을 등장시킬 수 있다면 커다란 이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대통령의 대안을 찾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1996년 대성기획에서 선보였던 듀오 아이돌은 멤버들의 연령대가 너무 어려 청소년들 전체의 공감을 얻기 힘들었다. '포스트 듀스'로 불리며 앨범 수록곡을 직접 만들었던 언타이틀도 <책임져>로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데뷔곡 <정>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영턱스클럽은 노래에서 강하게 느껴지던 '뽕필' 때문에 10대를 주요 고객으로 삼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때 세상이 간과하던 인물이 있었다. 전직 포크가수 출신으로 1995년 2월 자신의 이름을 딴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마삼트리오의 맏형 이수만 대표였다. 그는 1996년 9월 자신의 한을 풀어줄 5명의 10대 소년들을 세상에 선보였다. 바로 현재 BTS까지 이어지는 아이돌 문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0대들의 승리' H.O.T.였다.

10대 소녀를 타깃으로 만든 '기획형 아이돌'의 시작
 
 H.O.T는 시작부터 철저히 10대 소녀들을 타깃으로 준비하고 데뷔한 '기획형 아이돌'이었다.

H.O.T는 시작부터 철저히 10대 소녀들을 타깃으로 준비하고 데뷔한 '기획형 아이돌'이었다. ⓒ SM 엔터테인먼트

 
"아~~ 니가 니가 니가 뭔데 도대체 나를 때려 왜 그래 니가 뭔데 힘이 없는 자의 목을 조르는 너를 나는 이제 벗어나고 싶어 싶어 싶~~~어!"

장우혁의 폭발적인 샤우팅으로 시작하는 H.O.T.의 데뷔곡 <전사의 후예(폭력시대)>는 분명 지금까지 발표된 가요와는 느낌이 달랐다. H.O.T.는 데뷔하고 보니 10대들에게 사랑 받은 가수가 아니라 아예 시작부터 철저히 10대 청소년(더 정확히는 여학생)들을 타깃으로 기획된 아이돌 보이그룹이다. 따라서 데뷔곡 <전사의 후예>에서도 기성세대들은 이해하기 힘든 학원폭력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비록 데뷔곡 <전사의 후예>는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기대만큼 크게 히트하지 못했지만 H.O.T.는 후속곡 <캔디>를 통해 데뷔곡의 부진(?)을 한 번에 만회했다. <캔디>의 열풍은 그야말로 '신드롬'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폭발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멤버들 각자의 고유 번호(문희준23, 강타27, 토니7, 정우혁35, 이재원48)가 새겨진 원색의 의류 상품이나 가방, 모자, 장갑 등이 대형 팬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여기에 멤버들의 고유 번호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도 팬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설'이 돌기도 했다.

H.O.T.가 무겁고 심각한 <전사의 후예>에 이어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의 <캔디>를 히트시키자 이 같은 현상은 당시 활동하던 보이그룹 사이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H.O.T. 이후 데뷔한 젝스키스(<학원별곡>→<폼생폼사>)와 신화(<해결사>→<으쌰으쌰>), O.P.P.A(<애국심>→<그대야 미안해>), 이글파이브(<궤도>→<오징어 외계인>) 등은 H.O.T.와 비슷한 활동 양상을 보였다. 

H.O.T.는 1997년 2집 앨범을 발표해 <늑대와 양>, <행복>, < We Are The Future >를 히트시키며 최고의 아이돌로 자리 잡았다. 타이틀곡 <늑대와 양>이 "늑대! 빌어먹을 짐승 같은 놈들"이라는 가사로 방송불가판정을 받았지만 H.O.T.의 인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1997년 골든디스크상 대상, KMTV 가요대전 대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SBS 가요대전 대상을 휩쓸며 데뷔 2년 만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물려 받았다.

하지만 H.O.T.가 엄청난 팬덤을 과시하며 '10대들의 우상'으로 성장하는 사이 반대편에는 좋지 않은 여론도 형성되고 있었다. 이는 특정 팬층을 타깃으로 하는 아이돌 가수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런 식의 논란은 충분히 예상되던 일이었기에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H.O.T.는 3집 앨범을 통해 또 다른 '음악적 도전'을 시도했다.

멤버 5명이 9곡을 직접 만든 H.O.T 3집
 
 H.O.T는 멤버들이 9곡의 작사,작곡에 참여한 3집을 통해 지상파 3사의 가요대상을 휩쓸었다.

H.O.T는 멤버들이 9곡의 작사,작곡에 참여한 3집을 통해 지상파 3사의 가요대상을 휩쓸었다. ⓒ SM 엔터테인먼트

 
1998년 9월에 공개된 3집 'Resurrection'의 타이틀곡은 <열맞춰>였다. SM의 음악적 대부이자 H.O.T. 1,2집 프로듀서 유영진이 만든 곡이다. 유영진이 만든 H.O.T.의 곡들이 대부분 그렇듯 <열맞춰> 역시 <전사의 후예>, <늑대와 양>처럼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의 곡으로 소위 'SMP(SM Music Performance)'의 색깔이 강했다(표절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유영진은 이 앨범에서 <열맞춰>와 H.O.T. 멤버들의 우정을 다짐한 4번 트랙 <우리들의 맹세>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유영진의 손길이 닿은 곡은 이 2곡 뿐이었다. H.O.T. 멤버들은 3집에 수록된 14곡 중 무려 9곡의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SM의 연습생이 됐을 당시엔 작곡 등에 익숙지 않았던 이들이 태반이었겠지만 멤버들은 꾸준한 노력을 통해 직접 쓴 곡을 앨범에 넣을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3집 앨범을 발표하고 유영진이 만든 타이틀곡 <열맞춰>로 활동하던 H.O.T.는 그 해 겨울부터 강타 작사,작곡의 <빛>으로 활동곡을 바꿨다. <빛>은 밝고 희망적인 가사와 경쾌한 멜로디, 그리고 멤버 5명의 적절한 보컬 및 랩 분배가 돋보이는 곡이다. <빛>은 오늘날까지도 <캔디>, <행복>과 함께 H.O.T.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꼽히는데 H.O.T.는 물론 노래를 만든 강타의 개인 콘서트에서도 앙코르곡으로 자주 쓰인다.

특히 <빛>은 드라마 타이즈 형식의 뮤직비디오를 잘 만드는 김세훈 감독이 연출한 뮤직비디오가 큰 화제가 됐다. 사업에 실패한 문희준의 집안, 사랑에 실패한 강타,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친 장우혁, 동생이 아픈 토니, 엄마가 아픈 이재원이 각각 큰 시련을 겪는다. 그러다가 강타가 멘탈을 잡고 피아노를 수리하니 모든 이의 고민이 저절로 해결되는 감동적인(?) 내용이다.

사실 H.O.T.가 3집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곡은 <열맞춰>와 <빛>이 전부였다. 하지만 3집에서는 각 멤버들의 음악적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곡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앨범 마지막에 있는 강타 작사, 작곡의 < Wedding X-Mas >는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애인에게 불러 주라고 추천해 주고 싶은 달달한 발라드 러브송이다(지금 애인이 없다고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아직 11개월의 시간이 남아있다).

<전사의 후예> 이후 랩을 거의 하지 않았던 강타가 랩에 참여한 토니 작사, 작곡의 <홀로서기>도 주제는 무겁지만 썩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대중적인 곡이다. 토니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해외파지만 정작 H.O.T.앨범에서는 한글로 된 가사를 많이 썼다.

이 밖에 문희준이 <투혼>과 < In I-이 세상에 버려진 모든 아이들을 위하여...- >, 장우혁이 <소년이야! 신화가 되어라>, 이재원이 < You Got Gun >을 직접 만들었다. H.O.T.는 3집 앨범으로 1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1,2집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1998년 지상파 3사의 가요대상을 모두 휩쓸었다. 

오늘날 아이돌 문화의 시작점이 된 H.O.T.
 
 H.O.T는 지난 2018년 <무한도전-토토가3>를 통해 17년 만에 '완전체'로 무대에 올랐다.

H.O.T는 지난 2018년 <무한도전-토토가3>를 통해 17년 만에 '완전체'로 무대에 올랐다. ⓒ MBC 화면 캡처

 
H.O.T.는 1999년 9월에 발표한 4집 < I yah! >에서도 무려 11곡에 직접 참여했고 2000년 10월에 공개된 5집 < Outside Castle >에서는 앨범 수록곡 전체를 직접 만들며 뮤지션으로서 영역을 더욱 넓혔다. H.O.T.는 5년 동안 5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면서 600만 장에 가까운 누적 판매량을 기록하고 지상파에서만 5번의 연말 가요대상을 수상하는 등 아이돌 가수로는 믿기 힘든 인기와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전설의 아이돌' H.O.T.도 헤어짐의 과정은 썩 매끄럽지 못했다. 여전히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문희준과 강타를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가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 팀을 떠나면서 H.O.T.는 다소 허무하게 활동을 마무리했다. 결국 문희준과 강타는 솔로로 활동했고 장우혁, 토니, 이재원은 JTL이라는 팀을 결성해 2003년까지 활동했다.

H.O.T.가 해체되고 20년의 세월이 시간이 지난 오늘날 SM엔터테인먼트에 남아 있는 멤버는 강타뿐이다. 해체 후 재결합에 대한 많은 소문이 돌았던 H.O.T.는 지난 2018년 <무한도전-토토가3>를 통해 해체 후 17년 만에 단독 공연을 열었고 그 해 10월에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다만 팬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H.O.T.의 신곡 소식은 각자 속한 소속사의 사정 때문에 아직까지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하지만 H.O.T.가 현재까지 20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아이돌 문화'의 시작점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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