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연출한 이태겸 감독.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를 연출한 이태겸 감독. ⓒ 영화사 진진

 
첫 장편 영화를 찍고 두 번째를 찍기까지 12년이 넘게 걸렸다. <소년 감독>(2008)을 통해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감독은 머리가 제법 희끗희끗해졌고, 이번엔 여성 파견 노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본사에서 권고사직 위기에 몰린 정은(유다인)이 지방 현장으로 파견 나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명확한 사유 없는 업무 배제, 그리고 막상 현장으로 내려갔지만 하청 업체에서도 일종의 차별을 당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내면 변화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송전탑 유지 보수를 위해 정은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직접 탑에 올라가는 장면 등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하다.

불안함 앞에 홀로 서 있는 노동자

연출을 맡은 이태겸 감독은 2015년 무렵 우연히 한 신문의 단신을 접한다. 서울 사무직 여성이 갑자기 지방 현장직으로 발령 났고, 어떻게 해서든 버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저 역시 정규직이 아닌 직업군이고, 그때 영화도 두 번 정도 엎어진 경험을 하다 보니 우울했던 상황이었다"며 "당장 영화화가 어렵더라도 일단 글이라도 써보자는 식으로 시작했다"고 감독은 운을 뗐다. 

"그때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고, 불안증 같은 게 있었다. 무기력한 나날이었기에 뭔가 계기가 필요했는데 그게 시나리오 쓰기였던 것 같다. 한 달 만에 초고를 썼고, 송전탑이 등장한다는 설정은 그 이후 각색하면서 넣게 됐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직업인으로 사는 한 개인이 불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뉴스를 보면서 그 생각이 더 들었지. 이런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송전탑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이서 보면 거대한 거미줄 같다. 그 크기와 높이에 압도돼서 올라갈 엄두가 안나고, 주저앉을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

GDP가 선진국 수준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쫓겨나거나, 갑자기 그만 둬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하고, 가족이 해체되기도 한다. 송전탑이 그런 부분을 상징한다고 봤다. 우리 모두 그 부분을 극복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걸 정은의 시선으로 그리고 싶었다."


직업 앞에 서 있는 개인의 불안함, 그리고 그 불안함이 현실이 됐을 때 파괴되는 개인을 바라보는 이태겸 감독의 시선은 남달라 보였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라는 제목 자체에서도 느낄 수 있듯 영화는 막연한 투쟁기나 노동자들의 연대기가 아닌 화자 스스로 품는 일말의 다짐, 누구도 흔들 수 없을 것 같은 강단을 정은이라는 캐릭터로 내보이고 있었다. 

"극단적 상황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이 시나리오를 쓴 이유가 바로 자기 긍정성을 보이고 싶어서였다. 엄청난 부자가 된다, 출세한다, 이런 게 인생의 본질은 아닌 것 같더라.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다시 시작한다는 자기 긍정은 나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최초의 힘이랄까. 좋은 상황일 때 하는 여러 다짐은 위기의 순간이 오면 사라지기 쉽거든. 근데 위험한 상황에서 하는 자기 긍정은 다르다. 

(파견 직원들도 정은에게 다소 냉소적이게 묘사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이 삶을 살 때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살아갈 때가 많지 않나. 인생 밑바닥에서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극중 충식(오정세)이처럼 착함을 품고 있으나 자기 삶에 빠져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고, 현장 소장처럼 자신의 권리와 상관없이 견디며 사는 사람도 있다. 정은 주변의 작업자들은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견해를 반영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관련 이미지.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관련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내적 진실을 연기하다

배우가 중요하지 않은 영화는 없겠지만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차분한 분위기, 현실적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살릴 배우가 중요했다. 이태겸 감독은 이를 내적 연기라 표현했다. 갈등의 씨앗이 있고,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절망할 법도 한 정은은 결코 입 밖으로 감정을 내지르지 않는다. 꾹꾹 온갖 감정을 눌러 삼키며 하나씩 본인 내면에 집중해 가는 게 특징이다.

"우리 영화가 사실 인물의 집이라든가 사적인 통화 모습을 잘 안 보여준다. 정은이 회사에서 겪은 일로 화내고 울고 하는 장면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걸 넣지 않았다. 인물의 내적 진실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말해 내면 연기를 잘할 사람이 필요했다. 30대 여배우 중 유다인 배우가 생각나더라, 매우 잘해주셨다고 생각한다. 오정세 배우 또한 시나리오를 보시고 착하지만 세상에서 대우를 못 받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데 표현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대부분 사람들이 마음에 선한 의지가 있음에도 바쁘게 살다 보면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곤 하는 것 같다. 충식 역시 세 딸을 키우며 바쁘게 사는 아빠와 보편적 착함 사이의 묘한 경계에 있는데 그걸 인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연기가 필요했다. 오정세씨가 너무 잘 표현해주었다." 


현장은 토론과 대화의 연속이었다. 이태겸 감독은 "영화를 오랜 만에 찍다 보니 뇌가 분열하는 것 같았다"며 "너무 힘들어서 술과 담배를 할 생각도 못하고 잠들어 쓰러지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과정에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장례식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정은이 본사 직원을 향해 외치는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는 유다인이 직접 생각해 낸 대사였다. 

"정은의 그 진정성은 제가 담보 못 할 것 같아서 배우에게 생각해달라고 말했었다. 다인씨가 감독님도 생각해보라더라. 물론 저도 생각한 게 있었는데 그건 아무 의미가 없지. 무조건 그 순간의 대사는 배우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촬영지 근처에 조그만 시골 카페가 있었다. 거기서 전 지쳐서 잠시 엎드려 자고 있었는데 다인씨가 손으로 톡톡 건드리면서 깨운 뒤 앉더니 한참 지나 그 대사를 말씀하시더라(웃음)." 

이 영화의 또다른 특별한 점은 OST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이미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태겸 감독은 광주에서 활동하는 음악인인 유은숙, 김범창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며 주요 테마를 먼저 만들어 줄 것을 의뢰했다. 송전탑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전파음이나 몇몇 음악의 완성도가 높았던 이유기도 하다.

이태겸 감독은 "제작 환경이 열악할수록 후반 작업에서 영화적 힘이 약해지곤 하는 것 같더라"며 "송전탑에 오르시는 분들의 직업병이 이명이나 환청이더라. 음악 또한 우리 영화의 중요한 미장센으로 생각해서 시나리오 완성 직후 곧바로 음악 감독님부터 섭외했다"고 답했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내 일있는 내일을 응원! 오정세, 유다인 배우와 이태겸 감독(가운데)이 19일 오후 열린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시사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파견 명령을 받아 하청업체로 가게 된 주인공이 1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기자간담회는 코로나19방역을 위해 상영관 스크린을 통해 송출되며 진행됐다. 28일 개봉.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내 일있는 내일을 응원! 오정세, 유다인 배우와 이태겸 감독(가운데)이 19일 오후 열린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시사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파견 명령을 받아 하청업체로 가게 된 주인공이 1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기자간담회는 코로나19방역을 위해 상영관 스크린을 통해 송출되며 진행됐다. 28일 개봉. ⓒ (주)영화사 진진

 
"인간성의 회복이 중요한 화두" 

이태겸 감독은 흔히 말하는 진골 영화인이 아니다.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뒤 그럴듯한 공기업에 취직했다가 영화를 접한 뒤 독학한 경우다. 영화와는 아주 관련이 없지 않았냐는 기자 질문에 이 감독은 "학부생 때 탈춤반, 풍물 등을 하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웃으며 답했다. 

사실 그렇다. 그의 첫 단편 <복수의 길>을 보면 이주노동자 문제를 제법 통찰력 있게 담아내고 있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또한 노동자성, 인간다움에 대한 감독의 성찰에 해당할 것이다. 홍보 과정에서 그를 '한국의 켄로치'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정확히 노동이라 국한하기보단 인간성의 회복이랄까 그런 관심이 지금도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복수의 길>을 만들 땐 이주노동자라는 단어조차 없던 때였다. 타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걸 짚으려 했지. 우리 또한 이주노동자이지 않았나. 파독 광부,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 문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국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성을 무시하는 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아마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영화를 하게 된 건 우연이기보단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던 것 같다. 대학생 때도 소외 계층, 사회적 약자, 노동자분들을 만나곤 했거든. 제겐 낯선 존재가 아니다. 물론 영화를 하고 싶다고 다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저 역시 지난 12년간 닥치는 대로 일했다. 공모전도 해보고 그랬는데 어떤 식으로든 영화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영화를 안 지가 얼마 안 돼서 이 시나리오를 쓸 때 스스로 영화를 알고 있는지 많이 물었다. 현장에서도 스태프분들이 하는 말을 잘 들으려 했다. 영화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보다 내가 쓴 시나리오와 나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진지해야 하는지를 이번에 느낀 것 같다. 장면 하나하나가 진지할 수밖에 없는 게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장면을 구상할 때 정말 죽도록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다(웃음). 죽도록 고민하지 않으면 작품을 완성했을 때 티가 난다. 그리고 그건 감독이 책임져야지. 그런 엄격함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는 과정에서 영화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그는 영화를 대하는 진지함과 자신과의 관계성으로 답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영화일 것이다. 이태겸 감독은 "불안한 직업의 시대에 우리 영화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고, 동시에 어떤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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