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물은 소설과 영화에서 어엿한 하나의 장르다. 통상 사설탐정이나 경찰이 등장해 범죄의 진상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감춰진 사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지적 쾌감에 집중한다.

추리물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에드가 앨런 포가 1841년 발표한 <모르그가 살인사건(The Murders in the Rue Morgue)>이 최초의 추리소설로 꼽힌다. 이전에도 미스터리와 스릴러가 없지 않았으나 탐정이 등장해 난제를 풀고 범인을 밝히는 장르적 원형을 정립했단 점에서 이견이 크지 않다.

등장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탐정소설은 이내 영화로 받아들여졌다. <모르그가 살인사건>은 1932년과 1954년, 1986년 세 차례에 걸쳐 영화화됐다.

<모르그가 살인사건> 속 탐정 오귀스트 뒤팽은 이내 보다 영민하며 매력적인 후배들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중 유명한 인물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르퀼 포와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스틸컷

▲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스틸컷 ⓒ EMI

 
소설 원작 탐정시대, 홈즈와 포와로

괴팍하고 사회 규칙에 적응하지 못하는 천재탐정 셜록 홈즈는 가이 리치의 영화와 영국 그라나다TV, BBC 드라마에서 멋지게 재해석돼 생명력을 얻었다.

역동적인 수사 대신 깊은 탐구로 문제를 풀어가는 애르퀼 포와로는 역대 최고의 추리소설로 꼽히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주인공이다. 둘 모두 수차례 영상화됐는데, 25년이나 인기리에 방영된 ITV <명탐정 푸아로>와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 유명하다.

요컨대 19세기엔 포, 20세기엔 코난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가 있었다. 영화는 이들의 작품을 받아 그대로 소화했다. 개중 최고로 꼽히는 건 크리스티에게 인정받은 걸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일 것이다. 이 영화가 20세기 최고의 추리영화란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19세기 포의 소설을 20세기 코난 도일과 크리스티가 넘어섰듯, 20세기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도 21세기 영화가 넘어설 게 분명하다. 그리고 혹자는 이미 2019년 역대 최고의 추리영화가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21세기 최고의 추리영화로 언급되는 <나이브스 아웃> 이야기다.
 
나이브스 아웃 포스터

▲ 나이브스 아웃 포스터 ⓒ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재개봉한 21세기 추리영화 No.1

영화는 어느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저택의 주인 할란(크리스토퍼 플러머 분)이 제 방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것이다. 사인은 칼로 경동맥을 자른 자상이다. 겉으로 볼 때 뚜렷한 타살흔적이 없어 그대로 마무리될 것도 같지만, 명망 높은 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 분)은 조금씩 이상한 점을 찾아나간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스포일러가 될 만큼 이야기는 정교하게 짜여 있다. 해답이 아닌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추리물의 특징이 그대로 녹아들었다.

흥미로운 건 영화의 주인공이 탐정이 아닌 용의자란 점이다. 그것도 영화 도입부에 범인임이 드러난 남미 출신 간병인 마르타(아나 디 아르마스 분)다. 추리영화 도입에 범인이란 사실이 드러났다면 이후엔 범인임이 아님을 증명하고 뒤집는 과정으로 채워질 게 자명한 일이다. 스스로 낸 흥미로운 숙제다. 

영화는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설정을 부여했다. 마르타는 거짓을 말하면 구토증상을 보이는 특이체질로 설정한 것이다. 그녀의 이 특질을 이용해 블랑은 진실에 조금씩 근접해간다.
 
나이브스 아웃 스틸컷

▲ 나이브스 아웃 스틸컷 ⓒ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위해 태어난 걸작 추리물

<나이브스 아웃>이 다른 추리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건 처음부터 영화를 위해 쓰였다는 점이다. 다른 유명 추리물은 소설 원작을 영화와 드라마에 맞게 각색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이 영화는 라이언 존슨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영화로 옮겼다. 덕분에 영화의 표현방식에 적절한 배경과 공간에서 적합한 인물들이 필요한 행동을 하게 된다. 빼어난 각본가답게 이 모두를 이면에 감춰두고 가장 극적인 순간에 드러낼 줄 안다. 기존 추리물이 필연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미덕이다.

19세기와 20세기 추리물은 결국 소설의 것이었다. 소설에서 태어나 영화로 옮겨졌다. 각색이 이뤄졌다곤 하지만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마음껏 손댈 수도 없었다. 얼마쯤 손을 댔다간 추리팬들의 비난을 그대로 받아내야 했다.

<나이브스 아웃>은 영화가 추리물을 직접 하나의 장르로 소화해냈음을 증명한다. 소설 원작 없이도 수준급 추리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입증했다. 2017년 다시 태어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전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은 점을 떠올리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2019년에 이르러 추리영화는 소설로부터 뒤늦은 독립을 쟁취했다고, 2019년은 추리영화 독립의 원년이라고 말이다.

더불어 <나이브스 아웃>은 그 탁월한 완성도로 21세기 최고를 넘어 역대 가장 빼어난 추리영화 자리를 다툴만한 작품이 되었다. 이번 재개봉은 바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나이브스 아웃 스틸컷

▲ 나이브스 아웃 스틸컷 ⓒ (주)올스타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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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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