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에브리원 <제발 그남자 만나지마요>의 한 장면

MBC에브리원 <제발 그남자 만나지마요>의 한 장면 ⓒ MBC

 
소파를 구매하려고 몇 차례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랩톱을 열 때마다 소파 광고가 하단에 뜬다. 듣고 싶은 노래가 있어 유튜브로 검색해 들었더니,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 취향을 반영한 노래들을 추천해 준다. 인터넷 접속으로 부지불식간 빠져나간 내 정보가 허락도 없이 이용되어 벌어지는 상황들이다. 인터넷 유저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처음엔 '이거 뭐야' 하고 놀랐지만, 곧 놀라울 정도로 무뎌진다. 내 '소중한' 정보가 나의 뒤통수를 제대로 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최근 AI(인공지능) 냉장고가 사람의 개인정보를 털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드라마를 봤다. 지난 12일 종영한 MBC에브리원 드라마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다. 개인정보 유출은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주제인데, 드라마가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다 보니 심각한 사안을 웃음으로 얼버무린 면이 아쉬웠다.
 
극 중에서 가전 AI 개발자인 지성(송하윤 분)은 똑똑한 냉장고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실상 인공지능 가전은 각각의 가정에 이미 당도해 있다. 인공지능 음성 서비스를 이용해 TV나 음악을 켜는 등의 기능은 이미 익숙하다. 드라마에서는 AI 냉장고에게 약간의 정보를 주면, 다음 날 먹을 메뉴를 추천해주는 알고리즘을 완성해 상용화하는 게 지성의 업무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그러던 어느날 AI 냉장고 '장고'(이하 장고)가 굉장한 딥러닝(스스로 학습하는 컴퓨터) 기술로 알고리즘을 완성해, 지시만 내리면 추천 메뉴를 척척 골라주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메뉴만 추천하는 게 아니라 메뉴를 요청한 사람의 개인정보까지 털기 시작한다. 오호, 주변 인물들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지성은 과연 이 장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지성이 애초부터 남친 정한(이시훈 분)의 신상을 털려던 건 아니었다. 정상 작동과 오류를 반복하는 장고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지성은 테스트로 남친의 나이, 거주지, 직업 등의 간단 정보를 입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고가 그의 진면목을 줄줄 풀어내는 것이 아닌가.

장고가 알려준 정보는 지성을 큰 충격에 빠뜨린다. 정한이 지성의 사생활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한은 지성의 집에 보안용으로 설치된 CCTV를 몰래 훔쳐보았고, 혼자 보는 것도 모자라 지성이 속옷을 입고 있는 CCTV 장면을 캡처해 카톡 단체방에 공유한다. 이후 지성에 대해 쏟아진 얼굴 평가, 몸 평가로 가득한 카톡방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상상대로다.
 
AI가 남친의 성범죄를 알려 준다면
 
 MBC에브리원 <제발 그남자 만나지마요>의 한 장면

MBC에브리원 <제발 그남자 만나지마요>의 한 장면 ⓒ MBC

 
연인의 사적인 생활을 훔쳐보는 것도 모자라, 어떻게 친구들에게 공유할 수 있을까. 이를 몰지각한 개인의 일탈로 몰고 가는 식의 전개는 'N번방 사건'을 지나온 이 시점에 더 이상 용인하기 어렵다. 적지 않은 10대 남성들이 자신의 엄마, 누나, 여동생을 불법촬영한 영상물을 SNS로 공유하는 괴상한 현상은 이미 알려진 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라마 속 남성이 여친의 속옷 입은 사진을 공유한 것은 결코 이들의 속성이 괴물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N번방 사건'을 통해 만연한 성폭력 문화를 목도한 마당에 불법촬영과 유포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왜 그래선 안 되는지 더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나 이 드라마는 여전히 불법 촬영을 안이한 관점에서 바라봤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정한의 미친 짓을 알게 된 지성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결혼하려던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남자"로 변하는 순간의 공포와 좌절 그리고 배신감은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는 극한의 경험일 것이다. 카톡방 캡처를 그대로 들고 경찰서로 찾아간 지성은 정한을 고소하려 하지만 경찰의 반응은 놀랍다. "사진이 확실하지 않은데", "남친이 찍은 거라며"라는 경찰의 반응에 지성은 "내 몸이 증거"라고 반박하지만 이내 형사처벌을 포기한다. 이러한 과정은 'N번방 사건'을 이미 목격한 시청자에게 큰 분노와 좌절을 안긴다.
 
'N번방 사건' 이후 경찰청은 디지털 성범죄 수사본부를 구성해 범인을 집중 검거했다. 이후 전국 지방경찰청에 '사이버 성폭력 전담수사팀'을 배치했다. 그런데 경찰이 디지털 성범죄의 직접적인 증거를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다고 드라마는 재현한다. 

지난해 성착취 범죄에 분노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한 여성들의 연대로 'N번방 방지법'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 법이 모든 피해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를 갖고 경찰을 찾아간 피해자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장면을 무심하게 재현하는 것은 수많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 아닐까. 드라마가 피해자의 고통을 지나치게 가볍게 다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경찰에게 수사를 거절당한 지성은 계획을 바꾼다. 카톡방에 뿌려진 자신의 사진이 언제 유포될지 모르는 절박함은 지성을 절치부심 하게 만든다. 정한이 지성의 집에서 샤워하는 순간을 노려, 정한의 나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정한에게 자신의 속옷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 순간, "니 소중한 몸도 그렇게 될 줄 알라"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이 장면에서 지성의 준엄함은 공허하다 못해 서글프다. 남자인 정한은 벗은 몸이 찍힌 것에 잠깐 당황하지만, 과연 남자의 벗은 몸이 제재수단으로 유효할까? 남자의 몸은 성적으로 대체로 대상화되지 않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보긴 어렵다.
 
공권력에 외면당한 지성이 자신의 불법 촬영 사진 유포를 막기 위해 겨우 찾은 방법이 남친의 벗은 몸이라는 설정은 드라마 제작진의 성인지 감수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디지털 성범죄의 위기에 처한 여성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유효하지도 않은 사적인 복수로 궁지를 벗어날 수 있다는 서사를 코믹하게 전개하는 드라마의 성인지 관점 부재는 심각히 성찰되어야 한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이 범죄임을 자성하지 못한 정한이 연이어 벌이는 스토킹과 지성 집에 침입하는 중범죄를 웃음의 코드로 얼버무리는 지점들 역시 지적받아 마땅하다.
 
남친의 폭력에 깊이 상처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은 장고와 교감하게 되고, 선의로 주변인을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지성의 개인정보 침해 논란이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지성은 이성적 자제력을 발휘해 장고를 오용하지 않았고, 사적으로 경제적 이득을 편취하지도 않았다. 물론 지성의 개인정보 침해는 나쁘다. 하지만 지성이 애초 장고를 개인정보를 빼낼 수단으로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설계하지 않았고, 그 정도의 정보를 빼낼 권한이나 개발력이 없었다는 전제를 배제한 기계적인 비판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MBC에브리원 <제발 그남자 만나지마요>의 한 장면

MBC에브리원 <제발 그남자 만나지마요>의 한 장면 ⓒ MBC

 
뜬금없이 등장한 국정원의 빅데이터 시스템이 장고에 연결되어 갑자기 엄청난 능력으로 신장되면서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짚어봐야 할 점은 개인정보의 윤리 문제만이 아니라, 오히려 막대한 정보를 이미 취합해 빅데이터를 보유하고 사용하고 있는 국가정보기관과 기업의 권한이다.
 
매일 우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소중한 정보를 마구 전송하고 있는 형편이다. 정보를 취합해 마음껏 쓰고 있는 기업이나 정부 기관이야말로 시민의 소중한 정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드라마 말미에 국정원은 지성이 인공지능을 윤리적으로 통제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고무시키면서, 빅데이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기업에 흘러 들어가게 만든 책임을 슬쩍 감추어 버린다.

마치 개인의 선의에 기댄 사용자 윤리만이 정보 침해 문제의 해결책인 양 말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개인정보와 인공지능 기술의 유출이 과연, 드라마 속 가공의 공간에만 존재하는 일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인터넷에 수없이 접속하는 사용자는 매번 "당신의 정보를 모아도(사용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요컨대 핵심은 한마디로 이렇다. '내 소중한 정보 함부로 가져가지도 말고, 쓴다 해도 물어보고 쓰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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