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여성의 정치참여권은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부인들이 발표한 '여권 통문'에서 최초로 주장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전문 10조)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한 일체 평등임"을 명시하였다.

이어 1948년 7월 17일 제정·시행된 헌법 제8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하며 성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여성의 법적 지위를 말하고 있고, 1958년 1월 25일 공포된 '민의원 의원선거법'과 '참의원 의원선거법'에 의해 여성은 민의원과 참의원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되어 남성과 대등한 공법적 지위를 가졌다.

우리나라의 여성 참정권은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향한 여성들의 투쟁이 참정권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서구의 여성 참정권은 남성들을 향한 지난한 투쟁이었다. 영화의 배경인 영국의 여성 참정권은 1928년에야 가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정권을 위한 투쟁의 상대가 선명한 적이 아닌 여성들의 아버지이며 남자 형제이며 남편이기에 그들의 참정권을 위한 투쟁은 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란 단어는 '참정권'을 뜻하는 영어 '서프러지(Suffrage)'에 여성 이름에 사용되던 어미 'ette'를 붙여 만든 것이다. 이른바, "참정권을 달라고 주장하는 여자들"이란 뜻인 셈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타인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재산권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WSPU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거나 진열장 유리창 부수기, 유명 정치인의 집을 방화하는 등의 급진적인 행동을 전개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감옥에 수감된 여성 참정권 운동가는 약 1천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다음 백과)

영화 <서프러제트>는 1912년 런던의 한 세탁 공장에서 시작된다. 저임금의 고된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규정하는 남성 정치인들이 나온다. 그들은 '여자들은 정치에서 판단력을 행사하기엔 너무 감정적이고 쉽게 냉정을 잃고', '여자들에게 투표할 권리를 준다면 사회 구조가 무너진다'라고 말한다. '여자의 권리는 그 아버지나 형제 남편을 통해 잘 이루어지고 있고', '투표권까지 주어지면 멈출 수가 없게 되고', '여자들은 국회의원, 국무위원, 판사까지 되겠다고 주장할 거'라고 단정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당시 여성 사회 정치연합(WSPU)을 이끌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도, 1913년 국왕이 참석한 더비 경마 대회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세상에 강력히 알려내기 위하여 국왕 조지 5세의 말 앞에 뛰어들어, 죽음을 통해 여성의 투표권을 주장한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로몰라 가레이)도 아닌, 세탁 공장에서 죽으라고 일을 하던 여공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다.

평범한 노동 계급의 여성 모드는, 팽크허스트의 연설을 보고 난 후 집회에 참여하고 조직하고 선전물을 만들고 여성 참정권자의 목소리를 알리는 작업에 앞장선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이슈화 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하원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런 투쟁을 통해 1928년 영국의 여성들은 투표권을 갖게 된다.

'희생만이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며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여자아이에게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고, 우리의 운명을 규정짓는 여성의 힘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며 범법자가 아닌 입법자가 되고 싶다고 팽크허스트는 여성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투표권을 얻기 위해 감옥에 가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이 당연시되고 그들의 목소리를 죽이기 위해 공권력의 폭력이 자행되는 모습에서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모드에게 주목하고 그녀를 회유하는 형사(브렌단 글리슨)의 말대로 여성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복수나 명분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명분 없는 역사는 없다. 명분 없는 발전도 없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명분과 목표를 갖는 순간 놀라운 폭발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모드를 통해 보여준다. 

모드는, 세탁공장에서 벌어지는 테일러(제프 벨)의 무도한 폭력에도, 자신의 아이를 키우기 힘들어 다른 사람에게 입양 보내는 남편(벤 위쇼)의 무책임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성의 힘. 법적인 지위만이 그 모든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드는 평생을 남자들이 시키는 대로 살았고,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지만,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며 투사로 거듭난다. 

영화의 중간중간 아들을 향한 애끓는 모성은 눈물겹다. 비 오는 날 아들의 창문 밖에서의 그녀의 공연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오마주 같다. 주인공 귀도(로베르토 베니니)가 아들 조슈에(조르조 칸타리니)를 위해 씩씩한 발걸음으로 독일군에게 잡혀가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귀도가 죽음을 향해 웃으며 걸었던 것처럼, 모드는 아들과의 자유로운 만남을 위한 투쟁을 위해 빗속에서 공연을 펼친다. 

자식과 가정밖에 몰랐던 한 여성이 자신과 주변의 부조리함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과정은 놀랍다. 그녀는 자신을 내부의 스파이로 점찍고 거래를 시도하는 형사에게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편지를 쓴다. 편지를 쓰는 순간, 그녀는 이미 평범한 주부가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이미 여성 참정권자가 되어 있다. 남편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고 자신의 눈앞에서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보내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엄마에게 기존의 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법 때문에 제가 아들을 볼 수 없다면 전 그 법을 바꾸기 위해 싸울 겁니다. 형사님이나 전 둘 다 나름대로의 병사인 거겠죠. 둘 다 명분을 위해 싸우니까요. 전 제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형사님은 배신하시겠습니까? 제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절 잘못 아신 거네요. 법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어요. 내가 만든 법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창문을 깨고 물건을 불태우는 건 남자들이 알아듣는 언어이기 때문이죠. 우리한테 폭력을 행사하고 남은 게 없으니까요. 집마다 여자가 있어요. 인류의 반은 여자예요. 우린 이길 거예요.(모드의 편지 중)

기득권이 지켜내려고 애쓰는 법을 바꾼다는 건 어렵다. 우리나라도 최근 중대재해 처벌법 통과를 두고 노동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뉴스가 많았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 법'이라거나 '기업'에 대한 처벌은 쏙 빠진 중대재해 처벌법은 지난 1월 16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와 국회의 입법이 누구를 위한 입법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신입 정치인이 팟캐스트에 나와서 한 말에 크게 공감이 갔다. 그는 세상에 가난한 사람,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 경제를 전공하고 아프리카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긴 시간 일했지만 세상은 바뀐 것이 없었고 굶주린 사람과 가난한 나라는 여전한 상황에서 경제 논리만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보다 위에 경제를 지배하는 정치가 있다고 했다.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세상에 아직 억울한 사람,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과 말도 안 되는 무수한 사연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세상이 이런 것을 보면, 여전히 정치는 변해야 하고 법은 바꿔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기득권이 쥐고 놓치 않으려는 것을 공공의 것으로 가져오기 위한 투쟁은 외롭다.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 그 길을 걷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노동의 둑으로 내려가 고통의 물을 건너야 한다.' 
 
 방황하는 여자는 자유의 땅을 찾아 나선다.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여자가 말하자 이성이 대답했다. 
"그곳에 가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노동의 둑으로 내려가 고통의 물을 건너야 하죠. 다른 길은 없어요." 
 가지고 있던 전부를 버린 여자는 울부짖었다. 
"아무도 안 간 먼 길을 왜 가야 하는 건데? 난 혼자야, 철저히 혼자." (모드 'DREAM' 독백)

영화가 끝나면, 여러 나라들의 여성의 참정권이 법적으로 보장된 해가 엔딩 크레디트에 나온다. 미국 여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이 1920년, 1971년에는 스위스 여성들이, 영화가 나온 2015년에는 사우디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아직 여성 참정권이 없는 나라가 여전히 존재한다. 
서프러제트 여성의 참정권 캐리 멀리건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