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에게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독설이 쏟아졌다. 마치 '이건 노래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무시당하던 세 명의 젊은이는 1992년 MBC <특종 TV 연예>를 통해 데뷔 무대를 가졌다. 전주가 깔리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만 해도 여느 댄스 가수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주가 끝나자 노래 대신 '말'을 했다. 멜로디도 없이 그냥 빠르게 중얼거렸다. 

지켜보던 심사위원들은 '저게 노래야?'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노래가 끝나자마자 심사위원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발라드를 주로 쓰는 인기 작곡가는 "참신하지만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고 했고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인기방송인은 "섬세한 노래가 과격한 댄스동작에 묻힌 것 같다"고 했다. 가요계의 대표적인 싱어송라이터인 선배 가수만이 "댄스곡에 강렬한 메탈사운드가 나와서 신선했다"라며 평가를 유보했다. 

결국 그들은 데뷔 무대에서 7.8점이라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표정은 담담했다. 특히 노래를 하던 안경 쓴 멤버는 간간이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미소 뒤엔 '곧 우리가 세상을 뒤집을 것이다'는 자신감이 담긴 듯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정말로 세상은 뒤집혔다. 대한민국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내뱉은 건 '말'이 아닌 '랩'이란 걸 알았을 때 쯤이었다. 그들은 바로 '문화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고등학교 중퇴를 결심한 소년
 
 19세의 어린 나이에 참여한 시나위 4집은 프로뮤지션으로서 서태지의 시작점이었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참여한 시나위 4집은 프로뮤지션으로서 서태지의 시작점이었다. ⓒ 한국음반산업협회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난 서태지는 대동중학교 재학시절 일렉트릭 기타를 처음 접하며 음악에 빠졌고 1985년에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스쿨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비록 스쿨밴드는 집에 있던 의자와 선풍기날로 드럼을 만들어 연주할 정도로 조악한 팀이었지만 서태지는 그 안에서 작사, 작곡, 편곡, 베이스,보컬을 전담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뽐냈다(하지만 서태지의 첫 밴드는 멤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서태지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 북공고에 진학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음악'이라는 확실한 진로를 결정한 만큼 학교생활과 고등학교 졸업장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서태지는 2개월에 걸친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학교 자퇴 후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잠시 몸담았던 서태지는 '록의 대부' 신중현이 운영하던 클럽 '우드스탁'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신중현의 장남이자 록밴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에게 캐스팅되면서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참여했다. 10대 소년이 신대철, 김종서 같은 쟁쟁한 멤버들이 있는 한국을 대표하는 록밴드의 멤버가 된 것이다.

그는 시나위에 들어가면서부터 다소 평범한 본명인 정현철 대신 서태지라는 활동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태지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X-JAPAN이라는 일본 록밴드의 베이시스트 'taiji'에서 따왔다는 설이 가장 많다. 하지만 정작 서태지는 X-JAPAN의 음악은 즐겨 들었지만 베이시스트의 이름을 알 정도로 열성팬은 아니었다며 X-JAPAN과의 연관설을 부정했다.

당시 시나위는 김종서와 신대철, 그리고 서태지가 모인 '드림팀'이었지만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정통 록을 고수하던 신대철과 대중지향적인 록음악을 원했던 김종서, 그리고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던 서태지는 자주 의견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시나위는 4집 앨범을 끝으로 잠정적으로 해체됐다.

서태지는 새로운 밴드를 알아보던 증 우연히 들은 랩 음악에 심취해 혼자 랩 연습과 컴퓨터 작곡 공부에 몰두했다. 이후 그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추구하면서도 대중성을 유지할 수 있는 댄스그룹을 결성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이태원 클럽에서 댄서로 이름을 날리던 양현석과 이주노를 차례로 영입한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댄스그룹으로 다시 데뷔를 하게 됐다. 당시 서태지의 나이는 고작 만으로 스무살이었다.

대한민국 청소년을 하나로 만들었던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가 들어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은 2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하여가>가 들어 있는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은 2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 스포트라이트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대중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들의 데뷔무대를 본 전문가들은 낯선 음악에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대중들, 특히 10대 청소년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과 춤이 주는 새로움에 열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이후 댄스 음악은 본격적으로 주류 음악으로 올라섰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거나 그들을 따라 하려는 댄스가수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각 학교에서는 장기자랑 무대에서 너도 나도 <난 알아요>의 회오리춤을 추는 것이 유행을 넘어 마치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무대에서 입었던 벙거지 모자와 목걸이, 조끼가 패션 아이템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데뷔 앨범의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로 두 곡 연속 가요톱텐 골든컵(5주 연속 1위)을 차지했다. 연말 MBC < 10대 가수 가요제 >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신승훈을 제치고 가수왕에 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20~30대가 주요 고객이었던 가요시장이 10대 중심으로 재편됐다.

1993년 2집이 발표된 후에도 '서태지 열풍'은 이어졌다. 각 방송국에서는 컴백 몇 주전부터 엄청난 광고를 하며 그들의 컴백 소식을 알렸다. 앨범 발매 당일에는 쉬는 시간에 담을 넘어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거나 조퇴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힙합리듬에 국악을 접목시킨 2집 타이틀곡 <하여가>는 <난 알아요>에 비해 음악적으로 한층 난해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들의 노래에 열광했다.  

데뷔 앨범인 1집을 134만 장(이하 한국 음악 통계 연감 기준) 팔아치운 서태지와 아이들은 2집으로 무려 213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2집 앨범에서 <하여가>를 비롯해 <너에게> <우리들만의 추억> <마지막 축제>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랑 받으며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3년이 끝난 후 3집 준비를 위해 다시 휴식기에 들어갔다. 지금은 흔해진 활동 중단과 컴백이란 가요계의 활동방식도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서태지의 뿌리였던 록음악으로 돌아간 3번째 앨범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4장의 정규 앨범 중 음악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앨범으로 꼽힌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4장의 정규 앨범 중 음악적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앨범으로 꼽힌다. ⓒ 스포트라이트

 
댄스가수로 화려하게 변신을 했지만 서태지의 음악적 뿌리는 역시 하드록이었다. 이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3집을 통해 또 한 번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재킷에는 오우삼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낯설어 했고 3집은 그들이 발표한 4장의 정규앨범 가운데 가장 적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하지만 3집은 훗날 많은 팬들에게 서태지와 아이들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서태지는 1,2집에도 <환상 속의 그대>나 <죽음의 늪> 같은 사회 비판적인 노래들을 많이 담았지만, 3집부터는 가사 속에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는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곡이다. 이 노래는 지난 2002년 고등학교 <음악과 생활> 교과서에 199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로 수록되며 그 가치를 인정 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발해를 꿈꾸며>로 활동하면서 대형 태극기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의 타이틀곡은 <발해를 꿈꾸며>였지만 당시 청소년들이 가장 열광하던 노래는 따로 있었다. 바로 교육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교실이데아>였다. 메탈 밴드 크래시가 피처링에 참여한 <교실이데아>는 시커먼 교실에서만 아까운 젊음을 보내던 청소년들의 꽉 막힌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노래였다.

하지만 <교실이데아>는 노래의 인기와는 별개로 괜한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다. 바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태지의 사탄 숭배설'이었다. <교실이데아>의 테이프를 거꾸로 재생하면 '피가 모자라'라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테이프 거꾸로 듣기를 시도하다가 테이프를 망가뜨린 학생들이 다수 발생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을 재구매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인간이 가진 이중성과 약물 중독의 위험을 다룬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변화무쌍한 곡전개가 인상적인 노래다. 특히 노래 중간에 지킬박사가 하이드로 변신해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묘사되는 가사가 있는데 놀랍게도 심의를 통과했다. 참고로 1년 후에 발표한 4집에서는 <필승>의 '내 속에서 살고 있는 널 죽일 거야'나 <시대유감>의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같은 비유적인 가사들조차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3집에도 두 곡의 애절한 사랑노래를 실었다. 세상을 떠난 연인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영원>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서태지의 미성이 조화를 이룬 곡이다.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에 열었던 솔로 라이브 공연에서도 실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영원>을 부르며 노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은 엔터테인먼트업계의 거물이 된 양현석이 가사를 쓴 <널 지우려 해>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댄스팀의 색깔을 유지했다면 단연 타이틀곡 1순위가 됐을 노래다.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1, 2집에 이어 100만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자존심을 지켰다. 하지만 '문화대통령'이라 불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상업적으로 그리 성공한 앨범은 아니었다. 특히 서태지가 록음악으로 회귀하면서 '아이들'의 비중이 더욱 작아진 앨범이었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서태지의 음악적 행보와 향후 솔로 활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됐던 앨범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중들 기억 속에 영원할 '우리들만의 추억'
 
 서태지는 2014년 지상파 TV토크쇼에 출연하며 팬들에게 반가움을 안겨 주기도 했다.

서태지는 2014년 지상파 TV토크쇼에 출연하며 팬들에게 반가움을 안겨 주기도 했다. ⓒ KBS 화면 캡처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4집 <컴백홈>과 <필승>을 통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 후 1996년 1월 눈물의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해체를 선택했다. 사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는 이미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지만 사전정보가 전혀 없던 대중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서태지는 2년 후 6곡이 수록된 솔로 앨범을 발표했고 2000년에는 <울트라맨이야>와 <인터넷 전쟁>, <ㄱ나니> 등이 수록된 앨범을 들고 다시 대중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당시 5년 만에 귀국한 서태지를 보기 위해 김포공항(당시엔 인천공항이 개항하지 않았다)에는 3000명이 넘는 많은 팬들이 운집했고 시크한 단발머리로 나타난 서태지는 엷은 미소로 55개월을 기다려 준 팬들과 인사했다.

이후에도 서태지의 행보는 팬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장의 정규앨범과 3장의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던 서태지는 솔로 데뷔 후에도 정규 앨범 5장만 선보였을 정도로 활동이 뜸하다. 개인적으로도 비밀결혼과 이혼, 그리고 지나친 은둔생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서태지가 가요계에 미친 파급효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비주류였던 댄스음악과 음반 구매층의 변방이었던 10대들을 가요계의 중심으로 끌고 왔다. 게다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심의제도를 폐지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면서 동료 뮤지션들이 제약 없이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이는 서태지가 영원한 '문화대통령'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이유이기도 하다.

소녀들의 영원한 오빠, 청소년들의 영원한 문화 대통령일 줄 알았던 서태지도 어느덧 한국 나이로 50세가 됐고 올해 드디어 귀여운 딸을 학교에 보내는 '학부형'이 된다. 서태지가 간간이 발표하는 음악 역시 이제는 예전처럼 모든 대중들이 한마음으로 열광하진 않는다. 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우리들만의 추억'을 선물해준 고마운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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